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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그림 2>
[출처=http://www.saturn.dti.ne.jp/~ttshk/framepage30.htm]
바로 위의 <그림 1>과 <그림 2>는 일본(日本)에서 ‘산슈노진기’(三種神器; さんしゅのじんぎ) 곧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 ‘쿠사나기노츠루기’(草薙剣; くさなぎのつるぎ), ‘야사카니노마가타마’(八坂瓊曲玉; やさかにのまがたま)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인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라는 ‘구리거울’에 쓰여진 문자(文字)들을 보여줍니다.
출처(出處)에 따르면,
<그림 1>은 일본(日本)에서 1970년대(年代)에 발간(發刊)되어 8개월(個月)만에 폐간(廢刊)된 잡지(雜誌) <오카루토(オカルト; occult) 시대(時代)>에 소개(紹介)된 것의 복사본(複寫本)입니다.
이는 탁본(拓本)으로 추정(推定)되며,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신체(神体) 가운데 하나인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라는 구리거울의 뒷면에 새겨진 모습이라고 합니다.
한편 <그림 2>는 유태인(猶太人) 랍비(Rabbi)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 1936년~)의 책(冊)에서 소개(紹介)된 것인데, 일본(日本)의 해군(海軍) 장교(將校)이자 신도(神道) 연구가(硏究家)이었던 ‘야노 유-타로-’(矢野祐太郎; やの ゆうたろう, 1881년~1938년)가 이세신궁(伊勢神宮)의 궁사(宮司)와 교섭(交涉)한 끝에 그가 직접(直接) 보게 된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라는 구리거울의 뒷면을 그가 손으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것은,
동경(銅鏡) 곧 구리거울 가운데의 동그라미 속에는 히브리(Hebrew) 문자(文字)가 새겨져 있다고 하며, 그 뜻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I am that I am”
이는 <구약성서(舊約聖書)> 출애굽기(出埃及記) 3장 14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럼, <그림 1>과 <그림 2>는 동일(同一)한 구리거울에서 나온 것일까요?
출처(出處)에 따르면,
위에 인용(引用)된 두 가지의 그림은 다소(多少) 차이(差異)가 있지만, 어느 신관(神官)이 제작(製作)한 하나의 위조품(僞造品)을 토대(土臺)로 하여 특정인(特定人)이 베낀 것이라고 추정(推定)합니다.
이는 진품(眞品)이 별도(別途)로 있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하여 성립(成立)되는 말입니다.
‘야노 유-타로-’(矢野祐太郎; やの ゆうたろう, 1881년~1938년)가 그 구리거울의 진품(眞品)을 보았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견해(見解)가 대립(對立)되는 상황(狀況)입니다.
필자(筆者)가 부언(附言)하면,
메이지(明治) 시대(時代)의 문부대신(文部大臣)이었던 ‘모리 아리노리’(森 有礼; もり ありのり, 1847년~1889년)는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의 ‘진품’(眞品)을 직접(直接) 본 후(後)에 “히브리(Hebrew) 문자설(文字說)”을 그가 주창(主唱)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의 진품(眞品)은 미에(三重; みえ) 현(縣)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내궁(內宮)에 안치(安置)되어 있고, 레프리카(replica) 곧 모조품(模造品)은 토-쿄-(東京)의 황거(皇居) 안에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구리거울은 지금(只今)도 일본(日本)의 궁내청(宮内庁)에서 복제품(複製品)조차 일반인(一般人)들에게 절대(絶對)로 공개(公開)하지 않으며, 예로부터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대상(對象)이었습니다.
[참고=http://godpresencewithin.web.fc2.com/pages/zatsugaku/yatanokagami.html]
그런데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신관(神官)도 심지어 천황(天皇)도 함부로 볼 수 없다는 그 구리거울의 진품(眞品)이 어떻게 하여 몇 사람에게 보여졌는지를 필자(筆者)가 구체적(具體的)으로 확인(確認)할 방법(方法)이 없습니다.
특(特)히, 그 구리거울이 메이지(明治) 시대(時代)에 주목(注目)을 받은 것은 무슨 이유(理由)일까요?
그 당시(當時)에 히브리(Hebrew) 언어(言語)에 밝은 일본(日本)의 일부(一部) 기독교(基督敎) 목사(牧師)들도 그 구리거울에 새겨진 문자(文字)의 연구(硏究)에 참여(參與)하였습니다.
쇼-와(昭和) 시대(時代)에는 ‘GHQ’ 곧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戦) 이후(以後) 일본열도(日本列島)에 설치(設置)된 연합국군(連合国軍) 총사령부(総司令部)의 장군(將軍)이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를 강제적(强制的)으로 보았다고 알려졌습니다.
유감(遺憾)스럽게도, 그때 그 장군(將軍)이 보았던 구리거울에 관(關)한 기록(記錄)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진품(眞品)을 보았는지, 복제품(複製品)을 보았는지, 그 구리거울에서 구체적(具體的)으로 무엇을 보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참고=http://godpresencewithin.web.fc2.com/pages/zatsugaku/yatanokagami.html]
‘GHQ’ 이야기가 앞에서 나왔기에 한가지 덧붙이면,
맥아더(MacArthur) 사령부(司令部)에 ‘고다이고’(後醍醐; ごだいご) 천황(天皇)의 후손(後孫)이라는 인물(人物)이 ‘산슈노진기’(三種神器; さんしゅのじんぎ)와 가계도(家系圖)를 가지고 나타나서 스스로 ‘쿠마사와’(熊沢; くまさわ) 천황(天皇)이라고 주장(主張)하며 자기(自己)가 정통(正統) 천황(天皇)임을 인정(認定)해 달라고 호소(呼訴)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일본어는 한국어다>, 김용운, 가나북스, 2006년]
당시(當時)에 그 인물(人物)이 정말로 ‘산슈노진기’(三種神器; さんしゅのじんぎ)를 가지고 왔다면, 당연(當然)히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라는 구리거울도 지참(持參)하였을 것입니다.
만약(萬若) 그가 진짜로 정통(正統) 천황(天皇)이었다면 진품(眞品)의 구리거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주장(主張)이 진실(眞實)이라면, 메이지(明治) 천황(天皇)의 정통성(正統性)이 의심(疑心)되는 상황(狀況)입니다.
지금(只今)부터는 이른바 “일유동조론(日猶同祖論)”[“일본인(日本人)과 유태인(猶太人)은 그 조상(祖上)이 같다”는 가설(假說)]에 관(關)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유태교(猶太敎) 랍비(Rabbi)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 1936년~)는 1999년 일본(日本)에서 “聖書に隠された日本・ユダヤ封印の古代史 ― 失われた10部族の謎”[성서(聖書)에 숨겨진 일본(日本)・유태(猶太) 봉인(封印)의 고대사(古代史) ― 잃어버린 10부족(部族)의 수수께끼]라는 책(冊)을 발행(發行)하였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10부족(部族)”이라는 것은 유태(猶太) 국가(國家)의 “북조(北朝) 이스라엘(Israel)”을 가리킵니다.
12부족(部族)의 유태(猶太) 국가(國家)는 ‘솔로몬’(Solomon) 왕(王)의 사후(死後)에 2부족(部族)인 남조(南朝) 유다(Judah)와 10부족(部族)인 북조(北朝) 이스라엘(Israel)로 나뉘었습니다.
북조(北朝) 이스라엘(Israel)은 기원전(紀元前) 722년에 멸망(滅亡)한 후(後)에 그 자취를 감추었고, 2부족(部族)의 남조(南朝) 유다(Judah)는 기원전(紀元前) 586년 바빌로니아(Babylonia) 제국(帝國)에게 멸망(滅亡)하여 지배자(支配者)와 귀족(貴族)들이 전부(全部) 포로(捕虜)로 끌려갔습니다.
이후(以後)에 2부족(部族)의 남조(南朝) 유다(Judah)는 그들의 땅으로 돌아와 간신(艱辛)히 소생(蘇生)하였고, 그때부터 기원전(紀元前) 1세기(世紀) 무렵 로마(Rome) 제국(帝國)의 속주(屬州)로 편입(編入)된 후(後) 멸망(滅亡)할 때까지 유태(猶太) 국가(國家)를 ‘이스라엘’(Israel)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음모론(陰謀論)>에 따르면,
오늘날의 유태(猶太) 국가(國家) ‘이스라엘’(Israel)은 고대(古代) ‘카자르’(Khazar; 하자르) 계통(系統)의 ‘가짜’ 유태인(猶太人), 다시 말하면 고대(古代) 유태인(猶太人)의 핏줄과는 아무런 관계(關係)가 없이 오로지 후대(後代)에 유태교(猶太敎)를 신봉(信奉)하였던 투르크(Turk) 계통(系統)의 백인(白人) 후손(後孫)들 곧 ‘아슈케나지’(Ashkenazi)가 1948년에 중동(中東)의 팔레스타인(Palestine) 주민(住民)들을 강제(强制)로 내쫓고 세운 국가(國家)라고 합니다.
그럼, ‘카자르’(Khazar; 하자르)는 무엇인가요?
‘카자르’(Khazar; 하자르)는 카프카스(Kavkaz; Caucasus)와 볼가(Volga) 강(江)-돈(Don) 강(江)의 중간(中間) 지역(地域)을 본거지(本據地)로 한 백색계(白色系) 유목(遊牧) 민족(民族)이었는데, 8세기(世紀) 중엽(中葉)에 그 지배층(支配層)이 유태교(猶太敎)로 개종(改宗)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一般的)으로는 그리스도교(Christ-敎)와 이슬람교(Islam-敎)를 믿었으며 10세기(世紀) 후반(後半)부터 러시아(Russia)의 침입(侵入)을 받다가 1016년 러시아(Russia)와 비잔틴(Byzantine) 제국(帝國)의 공격(攻擊)으로 멸망(滅亡)하였다고 합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결국(結局), 카자르(Khazar; 하자르)가 멸망(滅亡)한 후(後)에 주(主)로 그 지배자(支配者)들은 러시아(Russia)와 유럽(Europe)으로 진출(進出)하여 유태교도(猶太敎徒)로서 삶을 유지(維持)하였다고 보입니다.
여기서 ‘유태교도’(猶太敎徒)라는 것은 <구약성서(舊約聖書)>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後孫)이라는 혈연(血緣)과 직접(直接) 관계(關係)되지 않고 단지(但只) ‘유태교(猶太敎)를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고대(古代)에도 모든 유태인(猶太人)들이 유태교(猶太敎)를 믿은 것은 아니었고 다른 종교(宗敎)를 신봉(信奉)한 경우(境遇)도 있었기 때문에 “유태교도(猶太敎徒)=유태인(猶太人)”라는 등식(等式)이 불변(不變)의 법칙(法則)은 아니라고 봅니다.
유구(悠久)한 세월(歲月) 동안의 혼혈(混血)로 인(因)하여 오늘날에는 고대(古代) 유태인(猶太人)의 100% 순수(純粹)한 혈통(血統)은 남아 있지 않다고 보입니다.
‘토라’(Torah) 곧 ‘모세(Moses) 오경(五經)’과 ‘탈무드’(Talmud)를 신봉(信奉)하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태교도(猶太敎徒)들은 오늘날의 <음모론(陰謀論)>에 자주 등장(登場)합니다.
사견(私見)이지만, 일본통(日本通)으로 알려진 랍비(Rabbi)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도 아슈케나지(Ashkenazi) 유태교도(猶太敎徒)라고 여겨집니다.
그럼, 본론(本論)인 “일유동조론(日猶同祖論)”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랍비(Rabbi)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의 주장(主張)에 따르면, 북조(北朝) 이스라엘(Israel)의 10부족(部族)이 동(東)쪽으로 점차(漸次) 이동(移動)하여 일본열도(日本列島)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대(古代)에 그들이 한반도(韓半島)를 경유(經由)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古代) 히브리(Hebrew) 문자(文字)가 새겨진 고조선(古朝鮮) 시대(時代)의 와당(瓦當)이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의 대동강(大同江) 유역(流域)에서 출토(出土)되었다고 하므로 그 가능성(可能性)은 있다고 보입니다.
[참고=http://blog.naver.com/pts9228?Redirect=Log&logNo=60020197837]
역사적(歷史的)으로 유태인(猶太人)들은 고대(古代) 수메르(Sumer) 지역(地域)과 관계(關係)가 있었고, 후대(後代)에 그들은 페르시아(Persia) 지역(地域)에서도 오랫동안 포로(捕虜) 생활(生活)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이동(移動)하는 과정(過程)에서 여러 지역(地域)에 정착(定着)하였다면, 중근동(中近東)의 문화(文化)가 그곳에도 전래(傳來)되었을 것이라고 추정(推定)됩니다.
일본(日本)에서 ‘황조신’(皇祖神) 또는 ‘천황’(天皇)을 ‘수메로기’(すめろぎ) 또는 ‘수메라기’(すめらぎ)라고 훈독(訓讀)하는 것도 중근동(中近東)의 종교(宗敎) 문화(文化)와 관계(關係)가 있다고 추측(推測)됩니다.
설령(設令) 고대(古代)의 유태인(猶太人)들이 한반도(韓半島)와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이주(移住)하였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들은 다수(多數)의 주류(主流)는 아니고 소수(小數)의 비주류(非主流)이었다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적(血統的)으로 한국인(韓國人)들 모두가 유태인(猶太人)의 후손(後孫)이고, 일본인(日本人)들 전부(全部)가 유태인(猶太人)의 후예(後裔)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無理)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고대(古代) 유태인(猶太人) 문화(文化)의 일부(一部)가 관련(關聯) 지역(地域)에 남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일유동조론(日猶同祖論)”은 지금(只今)도 일본(日本)의 기독교계(基督敎界)에서 지대(至大)한 관심(關心)을 가지고 연구(硏究)하고 있습니다.
한편, 정반대(正反對)로 “일유동조론(日猶同祖論)”을 적극(積極) 부정(否定)하는 일본(日本)의 <음모론(陰謀論)> 연구자(硏究者)도 있습니다.
예(例)를 들면, 일본(日本)의 문명비평가(文明批評家)이자 반유태주의자(反猶太主義者)인 ‘오-타 류-’(太田龍; おおた りゅう, 1930년~2009년)는 기독교(基督敎)라는 종교(宗敎)를 ‘새빨간 거짓’이라고 규정(規定)하였고, 사악(邪惡)한 기독교(基督敎) 세력(勢力)이 일본(日本)에 침투(浸透)한 것을 우려(憂慮)하였습니다.
그는 평소(平素)에 일본열도(日本列島) 고유(固有)의 ‘죠-몽’(縄文; じょうもん) 문명(文明)을 높게 평가(評價)한 인물(人物)입니다.
[참고=http://ja.wikipedia.org/wiki/%E5%A4%AA%E7%94%B0%E7%AB%9C]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몇 가지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하고 싶습니다.
히브리(Hebrew) 문자(文字)가 새겨진 야타노카가미(八咫鏡; やたのかがみ)라는 구리거울은 곧 일본(日本)의 천황(天皇)을 상징(象徵)하는 매우 귀중(貴重)한 유물(遺物)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古代)로부터 비밀리(秘密裡)에 계승(繼承)되었던 것이 아니라, 메이지(明治) 시대(時代)에 비로소 신정(神政) 복고(復古)와 천황(天皇) 숭배(崇拜)를 위(爲)하여 누군가가 의도적(意圖的)으로 만든 물건(物件)은 아닐까요?
유물(遺物)과 유적(遺跡)은 후대(後代)에 조작(造作)할 수 있으므로 아슈케나지(Ashkenazi) 세력(勢力)이 특정(特定)한 목적(目的)을 가지고 관련(關聯) 역사(歷史)까지도 날조(捏造)한 것은 아닐까요?
헝가리(Hungary) 출신(出身)의 유태인(猶太人)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성장(成長)한 미국인(美國人) 랍비(Rabbi)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태인(猶太人) 자격(資格)으로 어떤 임무(任務)를 완수(完遂)한 것은 아닐까요?
“일유동조론(日猶同祖論)”은 역사(歷史) 조작(造作)의 일환(一環)이 아닐까요?
1930년대(年代) 일본(日本)의 ‘후구’(河豚; ふぐ) 계획(計劃) 곧 유태(猶太) 난민(難民)을 만주국(滿洲國)으로 이주(移住)시키는 계획(計劃)과도 어떤 관계(關係)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참고=http://ko.wikipedia.org/wiki/%EB%B3%B5%EC%96%B4_%EA%B3%84%ED%9A%8D]
이러한 문제(問題)는 조선(朝鮮) 역사(歷史)의 연구(硏究)와도 깊은 관계(關係)가 있으므로 철저(徹底)한 검증(檢證)이 필요(必要)하다고 봅니다.
[자료(資料)를 인용(引用)하는 편의상(便宜上), 천황(天皇) 등(等)으로 일본(日本) 측(側)의 표현(表現)을 필자(筆者)가 그대로 사용(使用)하였습니다. 부디 양해(諒解) 바랍니다.]

첫댓글 <1930년대(年代) 일본(日本)의 ‘후구’(河豚; ふぐ) 계획(計劃) 곧 유태(猶太) 난민(難民)을 만주국(滿洲國)으로 이주(移住)시키는 계획(計劃)과도 어떤 관계(關係)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 1930년대면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안된 상당히 최근이죠. 현재의 만주에는 하얼빈이라는 대표적 도시 존재합니다. 위키백과에서는 <하얼빈은 만주어로 "그물을 말리는 곳"을 뜻한다. 하얼빈은 "백조 목 위의 진주"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는 아무르 강이 흐르는 모양이 백조를 닮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죠...
그렇다면, 하얼빈이 현재의 만주에 이동하기 전까지는 어디에 있었으며, 이동하기 전까지 그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정체를 규명해 보면 누가 이동을 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고 봅니다. 누가 최후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대규모적으로 옮겨놓은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전세계적인 갈등의 중심에 바로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930년~40년대에 독일의 나치가 점차적으로 세력을 잃어가던 시기이며 동방에서는 군국주의적 사고가 왕성해지는 시점이죠.
일본이 20세기 중반전 까지만 해도 현 일본열도에 없었다는 추론중에 1차대전은 유럽에서 일어난 유럽국가들의 대전인데 어찌하여 1만km이상 떨어져있는 섬나라 일본이 그 전쟁에 참가하였냐는겁니다.
그리고 2차대전때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방사능 피해가 막심했을텐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인구는 현재 각각 1백만 명이 넘어갑니다
2차대전 이후에도 계속 그 지역에 살았다는 것인데 누구는 당시 원폭이 지금 원폭보다 위력이 약했을것이라고 별 근거없는 소리를 하고 있더군요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나라들은.....
러시아, 프랑스, 베트남,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인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뉴펀들랜드, 이탈리아, 루마니아, 미국, 세르비아, 포르투갈, 중화민국, 일본, 벨기에,
몬테네그로, 그리스, 시암, 아르메니아입니다.
[출처=위키백과]
日本は日英同盟に基づいて、1914年8月23日にドイツ帝国へ宣戦を布告し連合国の一員として参戦し、
帝国陸軍はドイツが権益を持つ中華民国山東省の租借地青島を攻略、海軍は南洋諸島を攻略した。
英仏露からは、主戦場であるヨ-ロッパの戦線への帝国陸軍の派遣要請があったがこれを拒絶したものの、帝国海軍は連合国からの再三の要請を受け、
1917年には巡洋艦「明石」及び樺型駆逐艦計8隻からなる第二特務艦隊を派遣、後に桃型駆逐艦などを増派し合計18隻を派遣し、
インド洋と地中海でイギリスやフランスなどが持つ世界各地の植民地からヨ-ロッパへ向かう輸送船団の連合国側商船787隻、計350回の護衛と救助活動を行った。
(계속)
特に、1917年後半から開始したアレクサンドリアからマルセイユへ艦船により兵員を輸送する「大輸送作戦」の護衛任務を成功させ、
連合国側の西部戦線での劣勢を覆すことに大きく貢献したものの、多くの犠牲者も出した。
またロシア革命後の1919年に他の大国とともにシベリア出兵を実施した。
戦後、大日本帝国も連合国の5大国の一国としてパリ講和会議に参加し、パラオやマ-シャル諸島などの、それまでドイツが支配下に置いていた赤道以北の太平洋上の南洋群島を委任統治領として譲り受けるとともに、国際連盟の常任理事国となった。
[출처=위키백과(일본어)]
바로 위의 자료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일본의 육군은 중국 대륙의 산동성 내 독일의 조차지 "청도"(靑島)를 공격하였고, 일본의 해군은 "남양제도"(南洋諸島)를 공략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해군은 "인도양"과 "지중해"에서 수송 선박의 호위 및 구조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9년에 일본은 다른 나라와 함께 "시베리아"로 출병하였습니다.
제가 보는 관점은 바로 그 세계 대전이 '조선왕조의 왕권'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라는 가정입니다. 조선이라는 용어가 전세계를 포괄한다면, 그 것의 권한은 '전세계의 중심'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옛날 대학에서 창조학회 강연회에서 이스라엘 단지파가 단군이 되었다고 하여서 싸움적이 있었습니다. 대륙조선의 주장은 주로 동->서 이지만 서역(양)조선의 주장은 서->동으로 갔다는 주장입니다. 서역조선의 시초는 박용숙 교수의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이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중해 바로 동쪽에 어떤 나라가 있나요 유태인들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계하고자 합니다. 토인비는 문명은 동에서 서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동방의 복희씨 이복 누이인 여와가 성경에서 나오는 창조주 하느님인 여호와가 되었고 탁록의 치우씨가 북유럽으로 가서 "티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멀지 않아 그 반대설이 나올것이라 생각합니다.
박용숙 씨의 책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이 역사연구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크군요... 종래의 동(東)을 서(西)로 바꾼 개념이라서 기발하고요...
사견(私見)이지만, 고대(古代) 샤머니즘에 대한 견해는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박용숙 씨의 전문(?) 분야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각종 지명(地名)의 비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고요...
정확하게는 중앙아시아의 한 지점에서 좌우 사방으로 나뉘어서 같으니, 아마도 그렇게 해석이 되겠죠. 그러나, 현재의 한반도를 중심으로 설명한다면, 서에서 동으로 왔다고 이야기해야 합당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동쪽에서부터는 누군가가 올 수 있는 지리적 구조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지중해 문명과 한국의 고대사는 많은 관련이 있다고 보며 그것은 그지역의 남쪽인 아프리카에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라고 많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즉, 2000여년 더 전에는 동과 서의 관점보다는 남과 북의 관점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사서의 기록대로라면 아프리카가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해석이 되는 부분이 많아서... 지축 변동성이 탄력을 받는 것이죠... 대륙이동설에 따라 지각이 움직인다는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지구의 상하가 거꾸로 되었다라는 것은 지금까지 객관적으로 증명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본다면, 동에서 서로 이동한 것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한 셈이 되고, 그 반대도 역시 성립이 되죠...
저의 예측과 기타 재야의 일부의 주장도 역시 이것은 외부적 순간적 강한 타격에 의해서만 발생가능하며, 그것은 주기적으로 지구로 다가오는 별의 존재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축구공을 공중에 전져놓은 후, 골프공을 빗대어 맞추면 순간적으로 공중에서 공의 회전 방향이 바뀌게 되죠...
토인비가 고조선시대때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그의 말도 오류가 있을 수 있겠죠. 중앙아시아를 세계 중심으로 본다면 문명을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도 아닌 중앙아시아에서 사방으로 뻗어갔다고 봐야하지않을까요?
이씨 조선의 터전도 중앙아시아 지역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두환 선생님의 하멜표류기나 여러가지 사료를 볼때도 그렇고요.
외람되오나 한말씀 저도 드리고 싶어 댓글 남깁니다. 개인적으로 박자우님 이 언급하신부분에 있어서 한민족과 단지파는 관련이 없다 저는 생각을 합니다. 학계의 혹자는 '욕단'(밸랙의 동생)이라고 하는데, 근거가 일리가 있어보입니다 성경창세기에 메사와 스바로 가는 길 동쪽산으로 가서 거주했다고 나옵니다. 시베리아로 가는길 동쪽산은 천산산맥지역이라고합니다.제가 가장 신뢰하는 설은 노아의 장남 셈의아들중에 첫째,둘째 엘람과 앗수르는 언급만 되었을뿐 후손이 안나옵니다. 셋째 아르박삿부터 해서 성경은 셀라 에벨 로 이어지는 족보 설명을 합니다. 대체 엘람과 앗수르는 어디로 갔을까요? 저는 이들이 동방으로향했다봅니다.
저는 성경의 바벨탑 사건 이후에 여러민족이 언어가 혼잡되면서 각지로 흩어졌다고 봅니다. 즉 셈을 머리로 하는 황인종들은 중동지역에서 극동으로 동방으로 이동해온 민족이라 생각합니다. 이설중에 예수도 백인종으로 현재 묘사되지만 사실은 황인종의 모습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 서세동점시기에 기존의 모든 역사가 조작변질되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세계사를 제대로 보면 민족 종교 역사 문화 지리 모두 통합적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