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모은 270억원을 KBS에 기부한 실향민 강태원 회장. |
그런데 최근 재단 이사인 강 회장의 셋째 딸 강혜련(康惠連) 경기대 체육학과 교수가 KBS의 재단운영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파행운영의 실상들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 교수는 “불우한 노인 등 힘든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고 기부한 재산을 KBS가 방송제작에 사용하고 있고, 재단의 사무국장 자리를 복지전문가가 아닌 KBS 퇴직 방송인의 ‘자리’로 만들고 있다”며 “복지시설 설립을 위해 기부한 평택농장을 KBS 측 이사진이 고의로 방치하면서 2012년 증여세 21억원까지 물게 됐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평양 태생인 강 회장은 당시 현금과 주식 200억원이 든 통장, 경기 평택시 1만6000평(5만2892m²) 부지와 용인시 기흥읍 87평형(288m²) 빌라 1채 등 7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KBS에 기탁했다. 강씨는 기부 한 달 전인 2002년 7월에도 1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충북 청원군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에 기증했었다.
당시 강 회장의 기부는 조선, 동아, 중앙 등 주요 일간지들이 사설로 다뤘을 만큼 훈훈한 화제를 모았다. 강 회장은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평양에서 대지주였던 선친께서 늘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한 푼도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며 “1남4녀인 내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 가르치고 결혼시켜 아파트까지 사 줬으니 더는 물려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강 회장은 “재산 기부에 가족들 반대는 없었냐”는 질문에 “내가 결단 내리고 가족들에게는 그 후에 알렸다. 이건 누구하고 상의해서 할 일이 아니다”라며 “오늘 KBS에 재산을 주고 나니까 기분이 상쾌하다. 오늘 밤에 잠이 잘 올 것 같다”라고 했다.
KBS 간부, “독자적 재단 만들자”고 제의
강태원 회장의 기부소식을 일제히 보도한 2012년 8월 17일자 주요 일간지들. |
2002년 강 회장은 경기 평택시의 평택농장에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짓기로 하고 그 일을 셋째 딸 강혜련 교수에게 맡긴다. 그 무렵, 강 회장은 제주 성산포 근처로 거처를 옮기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묫자리도 마련했다.
강혜련 교수에 따르면, 2002년 8월 7일 강 회장은 평소 즐겨 보는 프로그램인 <사랑의 리퀘스트>를 보고 감동해 셋째 딸(강혜련 교수)을 제주로 불러 의견을 물었다. 강 교수는 “KBS는 공신력도 있고, 오갈 데 없는 노인들과 가난한 난치병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효율적으로 할 것 같다”고 했고, 강 회장이 “평택농장에 내가 원하는 시설사업도 가능할까”라고 묻기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제안했다.
강 회장은 딸에게 “전체 자금에서 이자 부분만 6개월 정도 <사랑의 리퀘스트>에 후원해 보고, 그때 가서 다시 결정하자”고 했다고 한다. 8월 7일, 강 회장이 이런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랑의 리퀘스트>에 전화를 했다. 담당자는 장난 전화로 알고 믿지 않았고, 이튿날 담당 PD가 부랴부랴 예능국장을 연결해 통화가 이뤄졌다. 당시 KBS의 이문태(李文台) 예능국장(現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은 강 교수에게 “자다가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당시 KBS 이문태 국장팀의 영상자료에 따르면 2002년 8월 16일경, 이 국장은 강 회장의 기부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촬영팀을 이끌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강 회장을 찾아가 통장과 부동산을 확인한 이 국장은 “독자적인 재단을 만들어 강태원 회장이 원하는 복지사업을 하자”고 제안한다.
2002년 재단 창립식 함께한 KBS강태원복지재단 임원진. 앞줄 왼쪽부터 박권상 당시 KBS 사장, 고건 초대 이사장, 강태원 회장. |
이 국장은 “그렇게 많은 돈을 <사랑의 리퀘스트>에 바로 집어넣는 것보다 오히려 재단을 만들어 회장님의 훌륭한 뜻을 세상에 알리고, 한 번의 선행으로 끝내는 것보다 많은 복지사업으로 키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일본강점기 보통학교 학력이 고작이었던 강태원 회장은 이문태 국장에게 “재단을 만들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돈이 잘 쓰이게 해 달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고 한다.
강혜련 교수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 배경에는 공영방송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 때문이었다”며 “아버지가 이문태 국장에게 말한 뜻은 당신의 재산이 좋은 데 쓰이길 원한다는 의사표시였지, 방송국이 제작비 등으로 스스로 알아서 쓰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문태 당시 국장에게 기자가 “강 회장의 뜻대로 <사랑의 리퀘스트>에 후원해 불우한 이웃들을 돕는 데 쓰게 하지 않고 왜 독립재단을 만들도록 권유했느냐”고 묻자,
“복지사업을 이어가고 싶어하는 강태원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라며 “또 기부자 집안의 갈등이 있을 것 같아 박권상(朴權相) 당시 사장께 ‘가족들이 돌이킬 수 없도록 9시뉴스 톱으로 올리자’는 취지로 건의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KBS, 강태원 측이 낙하산 사무국장 거부하자
2002년 8월 17일 KBS는 KBS 내에 복지재단이 설립될 예정이며, <사랑의 리퀘스트>에 ‘강태원 수혜자 코너’를 신설한다고 보도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강 회장은 “이 국장이 내가 원하는 대로 복지재단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는데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며 차모 변호사를 선임해 강 교수에게 재단설립을 위임했다.
KBS는 재단설립을 서둘렀다. 강 회장이 이문태 국장을 만나주지 않자, KBS는 유균(柳均) 정책기획센터장(前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강태원 회장은 KBS가 자신의 의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재단설립을 강행하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KBS 측은 “재단설립을 빨리 하라는 시민 전화가 빗발쳐 서둘러야 하는데, 따님이 이것저것 힘들게 한다”며 강 회장을 재촉했다.
강혜련 교수는 “KBS는 재단 이름에 기부자의 이름도 넣지 않으려 했다”며 “우리측에서 항의하자 KBS는 마지 못해 받아들였다”고 했다. KBS는 사무국장부터 직원들을 은퇴하는 KBS 직원들을 낙하산 인사로 내려 보내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사나 이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KBS가 추천한 사람들이 이사장과 이사가 돼 과반수를 차지하게 됐다.
재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초대 사무국장 인선을 놓고도 기부자인 강태원 회장 측과 KBS는 의견이 달랐다. KBS는 “KBS 출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강 회장 측은 “사회복지 전문가를 영입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맞섰다. 그러자 KBS가 “그렇다면 재단 설립을 하지 않겠다”고 맞섰다고 한다.
당시 이사였던 이세중(李世中) 변호사(現 이사장)는 “재단은 명칭 자체가 KBS강태원복지재단으로 돼 있고, 또 출발 때부터 KBS가 재단의 구성을 제안해 만들었기 때문에 사무국장이 업무에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일단 KBS 측의 의견이 반영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KBS는 윤대작(尹大作) 전 KBS 실장(現 남서울대 광고홍보학과 겸임교수)을 초대 사무국장으로 내려 보냈다. 강 회장 측 차 변호사는 협의과정에서 “KBS와 도저히 업무협의가 안 된다”며 “차라리 KBS와 별개의 ‘강태원재단’을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KBS강태원복지재단의 정관(定款) 작성에도 KBS가 적극적으로 간여했다. 상식적으로 기부자의 뜻이 정관이 되는 것이다. 강혜련 교수는 “정관을 보면 아버지가 애착을 가진 평택농장을 양로원으로 만드는 길이 막혀 있었다”며 “평택농장을 양로원으로 하려면 정관에 ‘시설법인’으로 해야 하지만, KBS 측은 일방적으로 ‘지원법인’으로 정관을 만들었다”고 했다.
평택농장을 양로원으로 하려면 반드시 ‘시설법인’으로 해야 했다. 그럼에도 KBS 측은 “시설법인을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으니 우선 ‘지원법인’으로 하고, 설립 후 나중에 시설법인으로 변경 신청할 수 있으니 참으라”고 강 회장 측을 달랬다.
이로써 KBS는 방송제작에 재단의 사업비를 쓸 수 있게 됐다.
강혜련 교수는 “그 무렵, 주무관서가 될 보건복지부 김성호(金成豪) 장관이 아버지를 찾았을 때 그 문제에 대해 자문한 적이 있었고, 그때 김 장관은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라며 의문을 표시했다”면서 “당시 복지부장관의 직권으로 법인설립을 단기간에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문태 전 KBS 국장은 “평택농장을 시설법인으로 만들어 노인복지시설로 한다는 건 기부자인 강 회장의 뜻이 아니다”면서 “가족들이 재단에서 KBS를 떼어내고 강 회장의 이름을 빌어 뭔가를 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판식 행사에 기부자 가족 초청도 안 해
2002년 12월 21일, KBS강태원재단이 설립되고 현판식과 함께 만찬이 있었다. 초대 이사장에는 국무총리를 지낸 고건(高建) 씨가 초대 이사장에 영입됐다. 강혜련 교수는 “그 자리에 가족들은 초청자 명단에 없었다”며 “KBS가 과연 공신력이 있는 기관인지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불쾌한 감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KBS 측에 “왜 초청을 안 했느냐”고 항의하자, 그제야 KBS는 강 회장 측을 초대했다. 강 회장 일행은 KBS출신 재단이사와 아나운서, KBS 직원들이 참석한 만찬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스텝들과 함께 인근 식당에서 식사하는 푸대접을 감수해야만 했다고 한다.
강 교수는 “KBS는 <사랑의 리퀘스트>에 ‘강태원 수혜자 코너’를 신설해 주겠다는 말로 아버지를 설득했던 것”이라며 “KBS는 애초부터 기부자의 뜻을 받들 생각 없이 자신들의 복지재단으로 만들어 ‘KBS화’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2003년 7월 9일, 강태원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KBS는 약정서와 달리 일방적으로 ‘강태원 수혜자 코너’를 없앴다고 한다.
강 교수는 “KBS의 이러한 행위들은 우발적 실수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강 교수는 또 “KBS는 자신들의 방송제작 비용을 아버지가 기부하는 돈에서 사용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며 “이문태 국장은 그런 취지에서 아버지에게 재단을 만들어 독자적인 복지사업을 하시라고 권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KBS, 평택농장 팔아 현금화하려 했나
강태원 회장 측은 평택농장(현 KBS평택야외교육센터)의 활용 문제를 놓고 KBS 측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평택농장은 강태원 회장의 ‘기부목록’ 중에 있었다. 현지 부동산 업자들에 따르면, 평택농장은 기부 당시 싯가보다 3배 정도 오른 150억원 상당인 것으로 알려졌다. 강 회장은 텔레비전에서 독거노인들이 홀로 지내다 죽는 모습을 보고, 그 농장을 불우한 노인들을 위한 수용시설로 활용하기를 희망했다.
2002년 12월 20일, 재단 설립 후 처음으로 열린 이사회에서 이사진들은 강 회장이 기부한 재산운용 계획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동귀 이사는 먼저 재단의 정관이 지원사업에 집중돼 있음을 지적하고, “강태원 회장의 설립의도를 살리기 위해서는 평택농장 등을 이용해서 시설운용을 하는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KBS 측이 내세운 이세중 이사는 “재단기금이 아직 완전히 취득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재산과 수입이 확정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단계에서 재논의 하자”고 했다.
2006년 9월 23일, 제16차 이사회에서 KBS측 이사들은 평택농장을 노인복지시설로 운영할 의사가 없음을 처음으로 밝힌다. 손봉호(孫鳳鎬) 이사장은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정관의 변경과 보건복지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며 난감해 했다. 이어진 17차 이사회에서 손 이사장은 “사회복지기관을 지원하는 것은 되지만, 직접 사회복지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법인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며 “KBS가 방송기관이라 직접 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가가 안 될 것이고, 법인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고 했다.
강혜련 이사는 “심지어 이사회에서 아버지의 자서전 ≪아름다운 선택: 강태원 회장이 생애≫의 원고까지 수정해야 한다는 간섭이 있었다”며 “책 내용 가운데 KBS측이 아버지에게 노인복지시설의 설립을 약속했다고 나오는데, KBS 측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2006년 12월 6일 이사회(17차)에서 우창록(禹昌錄) 감사(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는 “우리는 진짜 출연을 하신 분이 뭘 하고 싶어했는지, 고인이 살아계실 때 들었던 가족이 있으니 그에 대해 근본적인 스터디를 해야 한다고 본다”며 “초심(初心) 대로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세중 이사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강태원님은 기부하시면서 법인설립의 의사를 표시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고 했으며, KBS가 그 뜻을 살리고자 재단을 창립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강태원님은 ‘설립자’가 아니고 재단창립의 ‘계기’가 된 것일 뿐”이라고 했다.
평택농장 방치하다 21억원 증여세 맞아
이세중 현 이사장은 재단설립 초기 이사로 재직하면서 평택농장을 팔아 현금화한 후 재단 기금으로 사용하자고 했다. 복지시설을 만드는 걸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강 교수는 “KBS 측이 추천한 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며 “KBS의 입장만 대변하는 이사들과 사무국장에 의해 사실상 재단이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KBS강태원복지재단이 양로원을 만들기 위한 정관개정을 놓고 양측이 격돌하는 사이, 평택농장은 방치됐다. 2010년 평택시는 7000만원가량의 세금을 추가로 냈고, 이어 2012년에는 영등포세무서가 21억원의 증여세를 재단에 부과했다. 기부된 부동산을 제대로 법에 규정된 기간 내에 목적사업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단 설립 후 3년이 지나기 전에 사유서만 썼더라도 고려가 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KBS와 KBS강태원복지재단이 맺은 상호협력약정서를 보면, ‘을(복지재단)’은 기본재산을 인출, 처분하거나 운영방법을 변경할 경우 ‘갑(KBS)’에게 사전 통보한다고 돼 있다. 즉, KBS강태원복지재단 사무국이 정상적인 활동을 했다면, 증여세 부과를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강혜련 교수는 “아버지는 돌아가실 무렵, 자신의 뜻과 다르게 평생 모은 재산이 엉뚱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고 그 배신감과 정신적인 고통으로 괴로워했다”고 했다.
평택농장 증여세 과세를 계기로 재단 내부의 의견충돌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사들은 “KBS측과 강태원 측이 갈라서는 게 낫다”고 주장하고 있다. 손봉호 이사장은 증여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복지전문가가 아닌 퇴직 방송인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와 재단의 전문성이 점점 떨어지자 이사들도 줄줄이 사퇴했다.
복지전문가인 연세대 강철희(姜哲熙)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그만두었고, 성민선(成旼宣)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동귀(李東龜) 호산나전문대 부학장 등도 “젊고 유능한 이사교체가 필요하다”며 사퇴했다.
사업비의 70퍼센트 이상을 방송제작에 사용
강혜련 교수에 따르면, 강태원 회장은 KBS가 방송제작에 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정관을 만든 것에 격분했다고 한다. 강 회장이 기부한 거액의 재산을 불우한 노인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한 취지와 완전히 어긋난다는 것이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KBS강태원재단의 예산·지출현황’과 ‘KBS강태원복지재단 방송지원 현황’ 문건에 따르면, 2012년 말 현재, KBS강태원재단의 기금은 약 230억원이다(평택농장과 대치동 빌라 제외). 2012년 예산대비 지출현황을 보면, 총예산은 42억6800만원이었고, 지출은 22억6000만원으로 52.97%의 집행률을 보였다.
특히 재단의 일반사업비를 살펴보면, KBS가 방송제작에 재단의 기금을 사용한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재단은 공익방송지원비란 항목을 만들어 2억5000만원의 예산을 KBS의 호주머닛돈처럼 쓸 수 있도록 했고, <사랑의 가족>(9000만원), <내일은 푸른 하늘>(3000만원), <동행> 지원사업(12억6987만원), <체험 삶의 현장>(2500만원), <우리말 겨루기>(1500만원) 등에 예산을 책정했다.
2003~2010년 10월까지 방송 지원 현황 자료를 살펴보면, 총 30억7373만원이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됐다. KBS강태원재단 출범 이듬해인 2003년부터 <사랑의 리퀘스트> ‘강태원 수혜자 코너’에 4억5499만원을 지출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한 해에만 5억2400만원을 방송제작에 사용했고, 매년 3억~5억원 가량이 방송 제작에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한 프로그램은 <사랑에 리퀘스트>를 비롯해 <우리말 겨루기>, <러브 인 아시아>, <좋은 나라 운동본부>, <카네이션 기행>, <사랑의 가족> <사미인곡>, <생로병사의 비밀> 등이었다.
재단의 한 관계자는 “주변에서는 그 정도의 종잣돈과 KBS라는 조직의 후원을 갖췄다면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어야 맞다고 한다”며 “프로그램 지원 액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강태원 회장의 본래의 기부 취지대로 돈이 쓰이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는 또 “재단 출범 초기부터 KBS는 재단의 1년 예산 가운데 약 70% 이상을 방송 제작에 사용했다”며 “최근에는 청소년 미래지원, 도서지원사업, 저소득 화상치료, 문화 재능 지원 등을 늘려 그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다행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굉장히 헷갈리는 재단”
2011년 10월 26일, 손봉호 이사장은 재단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다음세대재단 방대욱 총괄실장을 이사회에 초대했다. 방대욱씨는 재단을 파악하고 나서 “KBS강태원복지재단의 성격이 참 독특하다. 굉장히 헷갈리는 재단이다”며 “정체성의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손 이사장은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방송과 연계하기 때문”이라며 “방송과 복지가 혼합된 형태”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성민선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KBS강태원재단의 이사회의록 등 자료를 검토한 후 ‘KBS강태원복지재단 자료 검토 결과’를 작성했다. 자료를 보면, 법인 설립과정에서 오류와 실수가 시작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설립초기에는 기부자 강태원 회장이 KBS 국장을 만나 “병든 환자를 지원해 달라”며 KBS가 대신 재단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주인격’을 잃지 않았으나, KBS와 협의과정에서 ‘주인’과 ‘객’이 바뀌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또 정관을 만들거나 법인설립 허가를 신청할 때, ‘기부문화 창달’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시설운영’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는 것이다. 성민선 교수는 “설립취지서를 보면, ‘KBS강태원복지재단은 도움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사업을 통해’라고 명시하고 있다”면서 “재단의 성격은 이미 기부자에 의해 정립된 것이지만, 법인의 사업을 ‘복지사업’이 아닌 ‘지원사업’으로만 국한한 것이 현재의 문제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갑’이 ‘을’로 둔갑하고, 기부의 ‘뜻’이 변질되고, KBS라는 ‘명칭’이 강태원이란 이름에 무임승차했고, 공기관이라는 ‘명분’에 의한 KBS의 하위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했다.
성 교수는 재단 이사록을 검토한 결과에 대해, “지금까지의 문제는 정체성 공유와 합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며 “KBS의 의도는 ‘기부문화 확산’이라는 공익기관으로서의 명분을 내세워 KBS 프로그램 제작비용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 재단에서 KBS가 공익 국감기관인데다 법인 설립목적이 기부문화 확산에 있어 ‘강태원’이란 명칭이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며 “정관 자체의 변경과 더불어 강태원 회장이 KBS법인 설립을 부탁한 것이 아니라 법인 설립 대행자로서 KBS에게 역할을 맡긴 것임을 분명히 하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김상균(金想均) 서울대 명예교수는 “KBS가 기부자인 강태원 회장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게 아니라 강 회장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 것”이라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내려오는 KBS 사장이 이 재단에 대해 관심을 가질 리 없고, KBS는 내부적으로 귀찮아하고 이사회는 비전문가가 모여 불성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우창록 변호사는 “재단에 대해 애착을 갖고 가장 절실한 건 유족들”이라며 “평택농장에 대해 매년 7000~8000만원의 세금이 나오고, 증여세로 21억원이 부과됐는데, 이사들이 고민해야 한다. 강혜련 이사가 항의를 하면 자식이 아버지 기부한 돈에 대해 집착을 갖는다고 오히려 반격을 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차장을 안내양으로 부르고, 오리털 파카를 선물
강태원 회장은 평양서 보통학교(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그는 광복 때 아내와 돌이 갓지난 아들을 남겨두고 혈혈단신 월남했다. 월남 후 50여 년 동안 그는 억척스레 돈을 모았다. 6·25 전쟁이 나자 부산 부둣가에서 막노동했다. 쉰 떡을 먹어가며 모은 돈으로 서울 광장시장에서 원단가게를 차렸다.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돈이라는 게, 덜 먹고, 덜 자고, 남보다 일 더하고, 신용 지키면 저절로 따라온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신조로 시작한 버스운수사업(동원여객)도 술술 풀려갔다. 운도 따랐다. 60년대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 건설 이전 한강 근처 땅을 평당 2000환(200원)에 사뒀다가 큰돈을 벌었다.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부지 8만2000평(27만1074㎡)도 강씨가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아파트 한 채 값에 팔았다고 한다.
일본강점기의 용어인 운전수(運轉手)를 기사로, 차장(車掌)은 안내양으로 불렀던 그는 그해 초겨울, 직물상가 거래업자를 조용히 불러 안내양 전원의 몸 치수를 재도록 했다. 그는 있는 집 아이들만 입는다는 오리털 파카를 유니폼으로 선물했다. 안내원들은 감동했고, 보는 승객들도 흐뭇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감동해 3000명이나 되는 서울 시내버스 안내양 전원에게 오리털 파카를 선물하기도 했다.
강 회장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손대는 사업마다 돈이 됐다. 지하철 2호선이 강남으로 뻗는다는 소식에 그는 대치동에 주택을 지어 팔아 큰 돈을 벌었다. 그는 18살 때 그의 조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네 몸 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장사치의 피가 흐르고 있다. 무시당하던 장사치의 피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재물을 모으거라. 부자가 도량으로 베푸는 덕이 학자보다 더 위에 있다. 배고픈 자에게 한술의 밥을 떠먹이는 부자가 빈 입으로 떠들기만 하는 학자보다 낫지 않겠느냐?”
그는 남에게 베푸는 삶을 평소 실천했다. 청계천 난민촌에서 살 때, 그는 남편은 날품팔이 나갔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아이를 낳은 지 일주일쯤 되는 그의 아내는 얼어붙은 바닥에서 미역국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채 빈속으로 누워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는 저녁 무렵 쌀자루와 미역 한 다발을 몰래 그 집 덧문을 열고 넣어주었다고 한다.
2002년 병석에 누워있을 때도 옆자리에 누워있는 백혈병 소녀에게 “골수이식을 받으라”며 3000만원을 대주었고, 퇴원할 때 소녀의 어머니에게 1000만원을 꼭 쥐어주기도 했다. 2001년 12월 충북 음성 꽃동네에 낡은 외투에 빛바랜 중절모를 쓰고 김치깍두기에 된장국 한그릇을 얻어먹은 그는 얼마후 80kg들이 쌀포대 100가마를 트럭에 실어보내기도 했다.
“저 소주 반 병을 날 다구”
그럼에도 강태원은 돈이 사람을 키우기도 하지만 망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남4녀의 자식에게는 돈 문제에 관한 한 일부러 냉정하게 대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기름보일러 유량 게이지를 표시해 놓아 엄동설한에 가족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고, 5원짜리 동전이 하수구에 빠지자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홀 속에 들어가 하수구물을 퍼내고 동전을 찾아내기도 했다.
음식점에서 소주 한병으로 반주 삼아 마시다가 옆에 손님이 일어날 때면 종업원에게 “저 소주 반 병을 날 다구”했다. 딸들이 질색하면 “아깝잖아. 종업원들은 그냥 쏟아버릴 것 아니야?”라고 했다.
그는 골프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돈과 시간이 아까워서 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매일 새벽 서울 개포동의 대모산(大母山) 산책을 다녀오다 실내 골프장의 망을 뚫고 나오는 골프공을 보며 “돈들도 많다. 골프채로 돈을 막 때려서 버리는구나. 미친 것들”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강 회장은 등산 스틱으로 수풀까지 세세히 뒤져 버려진 골프공을 주워다 자녀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곤 했다.
1998년경 강태원 회장은 텔레비전에서 북한의 꽃제비 소식을 접하고 “고향에 쌀 1000가마를 보내고 싶다”며 대한적십자사에 통보했다. 통일부도 긍정적이었다. 받아만 준다면 백미(白米) 1000 톤이 아니라 1만톤인들 못 주겠느냐는 게 강 회장의 뜻이었다. 강 회장은 정부 비축미 1000톤(18억원)을 매입할 수 있게 돈을 마련해 놓았으나, 북한의 반응이 무소식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500마리의 소를 몰고 북한으로 건너가 김용순 단장과 악수한 것도 그 무렵이다. 북한은 정 회장의 제의에 “식량난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조선 민간인 자본가의 사치스런 적선을 받을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강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강 회장은 광복이 되던 해 장롱 속 겹겹이 싸둔 전답 문서를 마당에 들고 나와 소작인과 머슴들에게 나눠주던 조부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너희가 사는 세상에 필요한 몫은 너희 스스로 피땀으로 벌어라. 천석꾼이 된 증조부도 만인죽(萬人粥)을 끓이셨고, 오천석꾼이 된 고조부도 만인죽을 끓이셨다. 만인죽은 새 곡식이 나올 때까지 죽을 끓여 만명의 목숨을 부지시켜 준다는 의미다. 이게 우리 집안의 내력이니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라.”
강 교수는 “아버지의 선행에는 이런 선조의 정신이 배어 있다”고 했다. 2002년 8월, 270억원을 기부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큰 결심에 깊은 감동을 하였다”는 격려 전화를 받았던 강 회장은 2003년 7월 1일 노무현(盧武鉉)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강 회장은 이 소식을 듣고 “훈장은 대통령이 주는 것도 아니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주는 상인데, 그런 영광이 내게 오다니”라고 감격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 회장은 일주일 후 혼수상태에 빠졌고, 셋째딸 혜련씨가 대신 훈장을 받았다.
강혜련 교수는 “아버지는 평생 입은 양복과 구두를 다 합쳐도 스무벌이 넘지 않았고,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에 고추장 발라 구운 돼지고기 한 접시를 최고의 진수성찬으로 여기셨다”며 “80 평생 모은 피 같은 돈을 KBS의 공신력을 믿고 맡기셨다면, KBS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차원에서 재단을 조속히 정상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
첫댓글 세상에 이런일이 또 있을까요
진실이라면 kbs는 강태원 회장님에 원혼을 풀어 주시기 바람니다
그시절KBS 모두 종북좌빨 말짱 도둑놈들인데요 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