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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주도 엠마오 연수원에서 지낼 때입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이시돌 피정의 집이 있었습니다. 피정의 집에는 ‘삼뫼소’라는 아담한 호수가 있습니다.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호수엘 갔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주변의 아름다운 모습이 호수에 그림처럼 담겨 있었습니다. 밤에는 하늘의 구름과 달이 호수에 내려왔습니다. 호수의 물이 바람에 출렁거리면 주변의 모습은 호수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름과 달도 호수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호수가 잔잔할 때는 그렇게 주변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바람이 마음에 불면 이웃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바람이 불면 하느님의 뜻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원망과 미움의 바람이 불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거울처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음은 차갑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불은 뜨겁지 않습니다. 거울은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비추어줍니다. 거울은 오는 사람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습니다.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울 같은 사람은 비춰오는 것이 밉다고 해서 배척하지도 않고, 곱다고 해서 환영하지도 않으며, 비춰진 것이 떠나가도 굳이 그 자취를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성모님의 마음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도 마음에 담았을 뿐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모습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2021년에는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여름까지 머물 거라고 합니다. 신문의 홍보도 아직은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성지순례도 올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겨울의 끝에 언 땅을 뚫고 새싹이 나오듯이, 밤이 깊으면 먼동이 트듯이 희망이 빛이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밴쿠버 성 김대건 성당에서 신문 구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림특강을 온라인으로 함께 했습니다. 특강을 마치고 질의 응답시간이 있었고, 신문을 홍보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강의나 피정 후에 신문을 홍보하는 것도 새로운 방법입니다. LA 지역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홍보하겠다는 모임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서부지국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비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진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영적인 갈증을 채우려는 움직임이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도 좋은 지면으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진주와 과자를 주면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맛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양보, 인내, 친절, 겸손, 나눔, 봉사’를 택하라고 하면 웃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힘들고, 어렵고, 얻는 것도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런 것들을 택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당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죄인취급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가족들과도 함께 지낼 수 있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 품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며,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 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2021년 다해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개의 자유, 늑대의 자유>
복음: 루카 5,12-16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굳이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요?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줍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리고 당신도 좀처럼 자유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처럼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이 몰려듦에도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뜻에 나를 봉헌하는 시간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율법에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나병이 나으면 율법에 매이게 됩니다. 무엇이 더 자유일까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더 자유 아닐까요? 사실 사람은 나병에 걸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던지, 율법에 매여 나병으로부터 자유롭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몹시 굶주려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늑대가 어느 날 숲속에서 반지르르 윤이 나고 살이 토실토실한 개를 만났습니다.
늑대: 넌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개: 나랑 같이 가자.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너를 좀 봐. 너무 볼품없고 비참해. 그렇게 있다간 굶어 죽고 말 거야.
늑대: 널 따라가면 난 뭘 해야 하는데?
개: 별거 없어. 가끔 사냥도 나가고, 집에서는 주인한테 잘 보이기만 하면 돼. 그러면 주인이 귀여워해 주고 맛있는 음식도 갖다 주지.
늑대: (기쁜 마음으로 개를 따라가다 문득 개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보며) 그게 뭐야?
개: 이거? 아, 주인이 있다는 뜻의 목걸이야.
늑대: 목걸이! 그럼 넌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는 말이니?
개: 늘 그런 건 아냐. 가끔은 주인이 끄는 대로 가야 해. 대신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잖아.
늑대: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자유가 무척 중요해.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을 준다고 해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자유와 바꿀 수 없어.
여러분은 개와 늑대 중에 어떤 것이 더 자유롭게 보이나요? 좀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자유로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우는 늑대의 삶이 더 좋아 보이나요, 아니면 그런 것은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주인의 목줄을 걸고 다니는 개가 더 좋아 보이나요? 사실 늑대라고 목줄이 없을까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그 나름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약해 보이면 안 되고 내가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 나의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늑대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 나병 환자입니다. 몸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있어 부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개는 배고픔의 욕망을 좇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밥을 주시는 분에게는 순종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보니 국정농단과 관련하여 삼성 이재용 회장이 법정에서 울먹였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검찰이 ‘징역 9년’을 구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재용 회장은 아버지보다 나은 삼성을 만들겠다며 선처를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아도 이렇게 마음이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면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진정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면 법을 지켰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아도 사람은 반드시 어떤 법에는 지배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라 여깁니다. 국정농단 때 이재용 회장은 왜 뇌물을 바쳐야만 했을까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만약 살을 빼야겠다고 결정하면 살이 빠질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자신 안에 그와 반대되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먹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 욕구는 배고플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음식을 더 먹게 만듭니다. 인간은 이렇듯 욕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병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안다면 차라리 목줄을 채우고라도 편안함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목줄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이 목줄을 채우면 세상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1837년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던 링컨은 정부에서 ‘노예제도 폐지론자 규탄안’이 통과된 것을 보며 자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에게 선거에서 패했습니다.
아마 링컨이 권력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위해 명예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1860년, 링컨은 더글러스 의원과 다시 겨루었고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마침내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흑인 중 어떤 사람이 링컨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링컨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리세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누리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 율법의 자녀가 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버지의 자녀로 기도하러 외딴곳으로 향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자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사랑의 법을 장착합시다. 그러면 이전의 자아와 세상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https://youtu.be/Fns232eqmqk
유튜브 묵상 동영상(전삼용신부)
2021년 01월 08일 금요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입당송
시편 112(111),4 참조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로우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별의 인도로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 주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구세주를 믿고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걸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다(복음).
제1독서
<성령과 물과 피>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5-13
사랑하는 여러분,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7(146─147),12-13.14-15.19-20ㄱㄴ(◎ 12ㄱ)
◎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은 네 성문의 빗장을 튼튼하게 하시고, 네 안에 사는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
○ 주님은 네 강토에 평화를 주시고,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당신 말씀 세상에 보내시니, 그 말씀 빠르게도 달려가네. ◎
○ 주님은 당신 말씀 야곱에게, 규칙과 계명 이스라엘에게 알리신다. 어느 민족에게 이같이 하셨던가? 그들은 계명을 알지 못하네. ◎
복음 환호송
마태 4,23 참조
◎ 알렐루야.
○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저희가 경건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천상 성사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공현 감사송 :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 구원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그분을 인류의 빛으로 드러내 주셨나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을 지닌 인간으로 나타나게 하시어
그분께서 지니신 불사불멸의 힘으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1요한 4,9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네. 하느님이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오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성체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은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의 요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장면입니다. 절박한 심정의 사람은 무엇이든 적당히 하거나 대충대충 넘기지 않으며, 간절함을 담아 진실되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달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뿐 아니라 치유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절박함을 네 권의 복음서는 담백하게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체면을 차릴 생각도 없이 길가에서 소리 높여 주님께 외치기도 하고(마르 10,46-48 참조), 많은 군중 속에서도 주님을 찾아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도 하며(마르 5,21-34 참조),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며 염치없이 악령에 시달리는 자신의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마르 9,14-29 참조).
이렇게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곧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이며,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우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첫댓글 어린아이에게 진주와 과자를 주면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맛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양보, 인내, 친절, 겸손, 나눔, 봉사’를 택하라고 하면 웃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힘들고, 어렵고, 얻는 것도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런 것들을 택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