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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
사도 1,1-11; 에페 1,17-23; 마르 16,15-20
2021.5.16.; 주님 승천 대축일; 이기우 신부
⒈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총정리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강림을 앞두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발현하시며 공생활 3년의
가르침을 복습시켜 주셨고 총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사도로 변신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루카는 예수님의 이러한 교육적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여 복음서와 연결된 사도
행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는 사실상 루카가 유일하게
기록해 놓았고, 마치 시청각 교육을 하듯이, 십자가 죽음-부활-승천-성령 강림의 구도를
짜서 신자들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교회도 이러한 루카의 의도를 반영하여 사도신경과
대신경에서 승천의 신비를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십자가에 달리시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뜻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표현은 하지만 그 의미는 영혼이 높이 들려 올라간 것입니다. 하늘이라는
공간으로 육신이 이동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고귀해 진 상승 작용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단순히 죽음으로 끝난 일이 아니고 삶이 하느님을 닮을 수 있도록 거룩
하게 변화된 일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⒉ 루카의 승천 메시지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독서의 말미에 나와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
다”(사도 1,10). 그렇습니다. 우리가 쳐다보아야 할 하늘은 없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하늘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하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리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는 모습입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비천하고 불편하며 고달픈
십자가일지언정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심으로써
하느님 사랑의 진면목을 증거하셨는데, 바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하늘이 이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낮춤, 십자가의 비움.
⒊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 조상들의 심성과 의식구조
속에는 하느님, 즉 하늘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이 땅의
선각자들과 민중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데 원초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수용된 지 200여년 정도밖에 안 된 그리스도교가 이 민족의 역사를 주도하는 종교로
성장하게 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초월적이고 절대자이신
창조주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기존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던 문화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속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명패를 붙여 놓은 예배소를 실마리로 하여 엉뚱하게도 맨땅에 헤딩하다시피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오로의 경우와 비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종교에 없는
유일신 사상과 삼위일체의 하느님, 강생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 등 그리스도교의
많은 교리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⒋ 그러나 한국의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의 초대 교회와 사정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로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지녀온 하늘과 하느님에 대한 심성 덕분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충분한 상황을 조성하고 토착화 작업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 민간신앙에 전해 내려오는 ‘최고신’ 신앙은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과
민간신앙의 하느님 신앙 사이에는 그 내용과 깊이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 땅의 천주교 신자가 된 한국인들은 전통적인 민간신앙의 하느님 관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심오하고 어려운 삼위일체 도리마저도 그러했습니다.
⒌ 조선 후기에 천주교 교리의 특징을 보여 주는 네 가지 기본교리는
천주존재(天主存在)⋅강생구속(降生救贖)⋅삼위일체(三位一體)⋅상선벌악(賞善罰惡)입니다.
이 중 상선벌악이 불가에서도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가르칠 정도로 매우 보편적인
개념이고 보면, 나머지 3개는 천주교 교리의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예비자 시절에 배워도
세월이 흘러야만 깨달음이 올 수 있는 어려운 교리 내용입니다. 하지만 우리 고유 신앙의
원형 속에는 놀랍게도 이것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원초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또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세례와 거듭남, 광명신앙을
통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각 등에서도 상당 부분 서로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천주교가 이 땅에 정착하는 데 중요한 영성적 지반이 되고
매개적 요소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⒍ 이 점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선 후기 유교사회 속에서도 최고의
신앙 대상은 전통적인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교적 조선왕조는 철저하게 제천의례
(祭天儀禮)를 금지시켰고, 모든 제사는 오직 조상에게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명나라가 천자국으로서 신하국 조선에 강요한 질서였는데, 중국의 황제만이
천자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릴 수 있으니 중국의 일반 백성이나 조선의 왕과 백성 모두
하늘에는 제사를 드릴 수 없고 오직 조상제사만 드릴 수 있다고 자격을 제한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무려 5백 년 동안이나 그랬습니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조상제사도 양반 계층만 드릴 수 있었고, 중인 이하 계층에서는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믿음에 있어서 돼먹지 않은 신분차별이 엄존했던 셈입니다.
⒎ 더욱이 조선의 지식층에 있어서는 무신론적인 성리학이 주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 도래한 천주교 사상은 종교적⋅윤리적⋅사회적으로 지식층과 민중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만민이 하느님의 자손이라 불리는
천손의식(天孫意識)과, 만민이 제천의례에 천손이자 주인공으로 참여했던 종교성의
회복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박해시대는 물론 그 이후 시대에도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거의 한 시간씩 걸리는 조과와 만과를 빠짐없이 바치던 그 열성은 강요에 의해서는
가능할 수 없는 정성입니다. 조정에서는 금했던 하느님 찬미를 천주교는 아침 저녁으로
해야 한다고 의무로 가르치니 차라리 부담이 아니라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후기 종교사상사⋅문화사⋅사회사 전반에 일으킨 충격과 파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종교적⋅윤리적으로 독특하고 고립된 교우촌에서,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박해받는 공동체였던 초기 조선천주교회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전파했던 것은 밝음⋅빛⋅구원을 향한 열망, 그들 자신이 그 옛날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하느님을 섬기는 신민(神民)이요 천민(天民), 하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자각⋅확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와 ‘대부모’(大父母)로 고백하며 흔연히 목숨을 바쳐 치명했던 것입니다.
⒏ 사도 바오로도 필리피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필리 3,20). 하늘의 시민들이 기다리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또한 성령 하느님
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십자가로 부활하는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는 에페소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에페 3,17-18).
⒐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권고 말씀은 하느님의 영적 능력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십자가로 부활할 수 있는 내공의 힘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지니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권고입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3,19-20).
그 옆자리가 우리 자리입니다.
⒑ 충만한 승천의식으로 살았던 우리 신앙 선조 중에 이도기 바오로 복자가 있습니다.
충청도 청양 태생인 그는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하느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고향의 천주교인들로부터 입교 권유를 받고 배운 천주교의 가르침을 열심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들여서 가난한 이들을 돕기도 하고 옹기를 구워 팔러
다니는 틈틈이 교리 서적을 구하여 비신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797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를 알던 교우들은
이 소식을 알려주며 피신하기를 권유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권유하여 입교한 교우들이
흔들릴까봐 거절하고 체포하러 온 포졸들을 맞이했습니다. 포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에서 모욕을 주며 조리돌림을 시켰는데, 이도기 바오로는 오히려
희희낙락하며 “천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니 차라리 영광”이라며 관장에게 고맙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약이 오른 관장은 형벌을 가하며 “조선에는 공자의 가르침과 불교가
있거늘 왜 하필 나라에서 금하는 사학을 믿느냐?” 하며 배교하기를 종용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나는 무식하지만 유교는 선비들이 믿는 것이고,
불교는 스님들이 믿는 것이지만, 천주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압니다.” 하고
말하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리고 매질 당한 상처가 곪아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을 감사하며 기도드리는
그를 보고, 함께 갇혀 있던 교우가 그래도 자신은 고문이 두렵다는 말을 하자,
“난들 왜 고문이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떻게 귀한 천당을 헐값으로 살 수 있나?
고통은 천당을 사는 돈이라네!”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귀한 천당을 헐값으로 살 수 있나, 내 고통이 천당가는 노자일세!” 하며
치명한 이도기 바오로를 생각하시면서, 일상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 승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이미 하늘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분 옆자리가 우리 자리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