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3월 11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에제 18,21-28
복 음 :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형제님께서 명절 제사를 지내고서는
아내와의 관계가 나빠져서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제사 지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도와줬지만,
그런데도 힘들다며 형식적인 이 제사를 매번 치러야 하냐면서
푸념하는 아내가 너무 미워서 멀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웃으면서 “얼마나 도와주셨는데요?”라고 묻자,
“제가 밤도 까고 전도 부치고 청소와 음식물 분리수거도 해줬습니다.
이 정도면 많이 도왔다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답하십니다.
정말로 많이 도와주신 것인가요? 그러나 제사의 주체가 누구일까요?
제사 지내는 이 조상님은 형제님의 조상님이었습니다.
아내는 형제님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무 상관 없는 조상님입니다.
따라서 엄격히 따지면 남편이 돕는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아내가 도와주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일이 아닌, 남편의 일입니다.
남편은 돕는다는 마음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해야 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서 당연히 아내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워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미움이 생기면 얼른 사랑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 완성의 첫 대목으로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을 제시합니다.
율법을 없애러 오셨다면, 이 계명은 폐기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계명을 더 확장하십니다.
사랑의 법을 우리 마음에 심기 위해, 악한 마음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긴 살인은 악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악한 마음이 뿌리 뽑혀 사라진다면,
굳이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이 등장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뿌리 뽑기 위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보, 멍청이’는 종교적인 뜻이 있는 단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는 자,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
하느님께 불경스러운 자를 가리킵니다.
스스로 형제를 판단하고 단죄해서 아주 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움을 어떻게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니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 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6,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시고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지기보다, 이기려 하기보다,
화해한 제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참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구의 짧은 역사’를 읽으면서 지구와 생명의 상호작용을 보았습니다.
지구의 환경은 지구에 사는 생명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구의 물, 대기, 온도는 생명이 번식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에너지를 얻고 진화하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생명의 활동이 지구의 환경에도 영향을 줍니다.
24억 년 전에 지구에는 산소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산소를 통해서 호흡하는 생명은 자리할 곳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24억년이 지난 후에 지구에는 산소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는 남세균이 광합성을 통해서 산소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 지구의 환경은 산소를 통해서 호흡하는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지금 지구의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생명은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 활동은 공기, 강, 바다, 땅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은 생명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탄소 사용의 증가로 지구온난화라는 엄청난 기후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지구를 보호하고 있는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 활동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으면, 지금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간다면
변화된 지구의 환경에 많은 생명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지구 생명의 최상위에 있는 인간도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지구를 보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호작용으로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으로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이방의 신을 섬겼던 솔로몬은 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낯선 땅으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다윗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였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70년이 지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께서 보는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려고 하셨던 십자가를 보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진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지식이 위선과 가식을 포장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거룩함은 사라지고, 종교라는 제도와 틀만 남게 되었습니다.
채우려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죄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죄가 크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곁을 떠나 주십시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하나는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주님을 배반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열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는 이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나약한 베드로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유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용서받은 것은 죄가 작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것은 배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시고 있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순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과 같이 인간으로서
정말, 정말, 정말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최악의 선으로 그어 놓고,
그것을 어기지 않으면 의인이고 어기면 죄인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응분의 벌이 주어지는 게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태 5,20)고
하시며 '형제에게 성 내는 것, 바보라 하는 것, 멍청이라 하는 것'까지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율법에는 그런 행위에 대한 규제나 징벌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물리적으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인뿐 아니라,
모독이나 모욕, 과도한 분노처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도를 넘는) 갈등의 표현에 대해서도
이웃을 해치는 죄, 인격 살인의 범주에 포함시키십니다.
의로움은 법적으로 깨끗한가의 문제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모욕과 상처를 주는가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벗님 여러분은 참으로 의인인가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십계명이나 교회법, 국법을 명시적으로 어기며 살지는 않습니다.
아니, 대부분은 무슨 법이 있는지조차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기준에 따르면 의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에 따르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른 이웃을 내치고 모욕하고 무시하고 빨리 없어지기를 내심 바란다면,
그런 심보가 더 큰 죄요 악이 됩니다.
인간 사이에 다툼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는 걸 예수님도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진정 형제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작은 상처나 아픔이라도
그것이 야기될 수도 있는 순간에 한 박자 멈추고
당신의 가르침을 떠올리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한쪽이 아니라 서로의 존엄과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형제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보다,
속죄예물을 바치거나 죄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함으로써
법적으로 해결하고 끝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과 예물로 율법이 요구하는 응당의 대가를 치렀으니,
스스로 의로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소위 면피했다고 손을 씻는 짓이지요.
마음 깊이 '미안해'라고 하지는 않고 돈이나 선물 등으로
때우려는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한번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서 상처 입은 그 형제에게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의 마음을 얻고,
그러고 나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쳐 그분의 마음도 얻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사자들이 서로 주고받아야 할 용서와 화해의 장에서
상대를 소외시키고 건너뛰어 버리는 교만을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에는 "돌아서서"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성서에서 돌아선다는 표현은 '회개한다'는 또다른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돌아선다고 다 같은 게 아니라, 악인이 선으로 돌아설 때와
의인이 악행으로 돌아설 때가 다릅니다. 회개와 그에 따른 축복은 전자에만 해당 됩니다.
"악인도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에제 18,26).
과연 돌아서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돌아서는지 그 방향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기억력이 별로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 나약한 인간을 위해 일부러 당신 기억의 능력을 잠재우신 것 같습니다.
죄인인 우리의 허물을 등 뒤로 던져버리시고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시니,
돌아서기만 하면 그 덕에 죄인인 우리가 다시 일어서고 돌아오고
빛을 받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만, 배신한 의인의 경우라면 사정이 좀 다릅니다.
그가 실천했던 정의는 기억되지 않을 거라고,
예전에 행했던 정의 때문에 봐주지는 않으시겠다고, 곧 '지금'의 너를 보겠다고 하십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화해와 타협을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급하고 자기 조절 능력이 부족하며 자기 위주로 사고하는 우리가
사람 사이에 부대끼고 살면서 아무 갈등 없이 지내기는 어렵습니다만,
이미 입힌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고
사랑과 위로의 말, 행위로 치유해 줄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이때는 해를 입혔던 사람만 애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피해를 당한 형제 역시, 과거를 잊어주시는
'선택적 기억 장애'를 가지신 하느님처럼 지난 일을 잊어주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노력해야 합니다.
'과거'의 미웠던 형제가 아니라 '지금' 진정성을 가지고 손을 내미는 형제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가 일어나고,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실 흠 없는 예물을 함께 바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한계를 확장 시킵니다.
살인만, 간음만, 도둑질만 하지 않는 것으로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요구에 섬세하게 응해야 하고, 최소한의 악을 피하며 살기보다
최대한의 선을 행하며 사는 삶이니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보다 무겁고 어려운가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법은 성령의 법, 사랑의 법이기에 문자에 묶여 있지 않고
이미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사랑의 법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누구에게 묻거나 판례를 뒤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의 사랑이, 마음이, 양심이 잣대가 되어주고 믿음이 등대가 되어주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나는 열심히 기도 시간 지켰고,
나름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문제없어.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 내가 좀 미워하고 짜증 내고
화를 좀 낸 것은 당연한 것이야."라고 생각말고,
"아, 그래 나의 말 한마디, 냉정한 눈빛 하나가
저 벗의 마음을 저렇게 아프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좀 고쳐먹으라고. 제발 돌아서라고. 제발 회개하라고.
그게 진정 네가 살 길이라고. 그게 진정 네가 의인이 되는 길이라고.
화 안 내는 법; 에덴동산에서는 화 날일이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려는 의로움과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비교하십니다. 그러며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자칫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큰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의로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화는 내고,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지키지만
음탕한 마음을 가지며, 자선은 하지만 남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행동은 바꾸지만 속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조차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로움은 나의 의지로 행동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언젠가는 힘이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 ‘성을 내는 것’이 나왔기에 이것으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은 내는 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화를 내고 말도 안 통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입니다.
아이는 게임머니로 아버지, 어머니 몰래 수백만 원을 결제하고
경찰서까지 데려간 아버지 앞에서 그냥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모는 매우 차분합니다.
부모를 닮았다면 아이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가 바빠서 아이의 가장 중요한 성장 시기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잔소리와 간섭이 심합니다.
무조건 말을 하면 다 고쳐지는 줄 압니다. 배가 나왔다고 살 좀 빼라고만 합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는 매우 불쾌합니다.
할머니의 잔소리는 자신을 존중해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들어 높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결국 사랑한다고 사랑하는데 아이를 통해 자신의 무언가를 채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왜 화를 내는 것일까요?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하느님을 피해 몸을 숨기는 아담과 하와의 처지와 같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피’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에덴동산에 살 수 있게 만드는 ‘가죽옷’입니다. 그 피가 의로움입니다.
내가 의로워져 에덴동산에 살면 화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화는 에덴동산 밖에서 내는 것입니다.
가죽옷은 분명 창조자의 피 흘림을 전제합니다.
창조자의 피 흘림 없이는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본인들 힘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입니다.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고 합니다.
화가 풀린 곳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오는 것입니다.
화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 안에 머물면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본성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성에서 벗어나려면 에덴동산에 살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의로움이 곧 당신 가죽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가죽옷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피 흘림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우리 아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가 나왔습니다.
금쪽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노 조절을 못 합니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에게도 막말을 쏟아냅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은영쌤이 추천한 방법은 ‘몸 관찰하기’였습니다.
거울을 가져다 놓고 오은영쌤이 금쪽이를 보고
“네가 생각하기에 바른 자세로 앉아봐”라고 합니다.
아이는 일부러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삐딱한 모습으로 앉습니다.
이때 “거울로 한번 봐봐. 바른 자세인지 한번 봐봐”라고 하니까
아이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더니 바른 자세로 앉습니다.
그리고 또 무언가 의미 없는 일을 시켰는데 잘 따라 합니다.
그런데 왜 엄마의 말은 안 들었을까요?
오은영쌤이 금쪽이를 에덴동산으로 데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거울이 바로 가죽옷의 역할을 합니다.
가죽옷도 그렇지만 거울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우선 ‘아버지’가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오은영쌤이 있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상대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자녀에게 성을 낼 수는 있지만,
직장 상사나 본당 신부님에게 와서 성을 낼 수 있을까요?
화가 나도 참을 것입니다.
금쪽이는 지금 오은영쌤과 수많은 제작진이 둘러싸고 있기에
그들 앞에서 힘에 눌린 것입니다.
그다음은 ‘아드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을 내는 것을 자신이 보면 고쳐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거울 효과’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바꾸는 것을 거울 혼자 할 수 있을까요?
아이는 매일 거울을 봅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마지막으로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금쪽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가 이것을 바라며
성의 기둥에 들어가 있는 어머니 덕분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그것을 누르고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그 많은 사람의 고생을 무시할 만큼 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모는 거울과 같은 모범, 창조자의 권위,
그리고 자녀를 위한 피 흘림, 이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없다면 자녀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피 흘림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창조자의 피가 섞여 있느냐, 섞여 있지 않으냐에 따른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피 없이도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이 표출되는 것이 성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자의 피는 성낼 일이 없는 에덴동산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감사만 남지, 성낼 일이 없습니다.
성내고 사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화는 자아에서 나오는데 자아는 창조자의 피만이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에덴동산이 아니라면 화나는 것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본성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남의 문제입니다.
어둠은 어둠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면 어둠은 저절로 가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