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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모든 국민이 함께 공유하는 ‘교육의 사회적 합의’가 없다. 아니, 깨어졌다. 지금도 교육을 통해서 키우고자 하는 인간상이 ‘홍익인간’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으나, 그 존재감은 지극히 미미해져 버렸고, 그냥 사문화, 화석화되고 말았다. 혼자 노력만으로는 잘 살아갈 수 없는 삶의 불안전성 때문에 깨어지고 말았고, 그 중심에는 ‘돈’이 있다. 어느 순간 돈이 인품의 기준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야 인간 이상의 대접을 받고, 그 반대일 경우는 멸시와 냉대를 감수해야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로 말미암아 이제는 인식의 범위가 국내를 넘어 국제화되었다. 은연중에 이주노동자에 대해 멸시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들의 처신이 비도덕적이거나 언행이 불량해서가 아니라 단 하나, 가난한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로 돈을 벌러 왔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물신숭배에 대해 말없이 경고를 내리는 것이 바로 ‘기후변화’이다. 계속 이대로 나가면 지금과 같은 세상이 다시는 불가능하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CPP)’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1990년 발간한 보고서에는, 기후변화에 인간이 영향을 미쳤을 정도에 대해서 그 ‘가능성이 크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33년이 지난 2023년에 발간한 6차 보고서에는 ‘기후변화는 인간의 영향이 명백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미래를 결정지을 2세 교육의 중요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이 미래이고, 그들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험하고 만들어야 할 사회적 합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합의에 중심축이 되어야 할 내용은 지금과 다른 방식의 생산과 소비 생활을 하는 것이다. 즉, 생산과 소비에서 ‘공공성을 강화하는 제도 도입’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지금의 현실적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 돈의 효용성을 인정하되, 시민과 기업의 생산과 소비 방식의 패러다임이 공공성을 강화하도록 획기적인 인식변화와 함께 의도적 교육과정 재편이 필요하다. 즉, 학생들이 ‘과연 우리가 미래를 위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변증법적 논의를 전개하여 학생 나름의 의견을 새롭게 세우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생태계 한계를 벗어난 과소비를 일삼는 이들에게 제약을 가하고, 주거, 먹거리, 의료, 노후 안정 같은 기초적인 요소들이 누구에게나 고루 돌아가게끔 만드는 일 등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내용이 중요하다. 국내와 국제 사회의 일상은 구조적으로 서로 엮어있다. 그래서 미우나 고우나 서로를 살피고 서로를 더 연민해야 한다. 생명을 앗아가는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또 수출하여 돈을 버는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말해 줄 수도 있다. 지구촌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지탱해 주어야 기후 위기 같은 어려움을 함께 해결할 수 있다고 힌트를 줄 수도 있다.
교육 현장에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교육 목표를 성취하기까지는 반드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학령에 맞게 재구조화하여 여러 번 반복하는 나선형 교육과정도 필요하다. 비록 과정이 지루할 수 있지만, 목표를 분명히 하고 꾸준히 실천한다면 그 결과의 성숙함을 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육과정 운영의 이론적 배경을 ‘고전’에서 가져오면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지고 명확화될 것이다.
공자도 비근한 사태에서 내 몸으로 느끼고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의 섬세함이 인(仁)이라고 한다. 인(仁)도 대단하지만 인(仁)에서 더 나아가 성(聖)의 경지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聖)의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박시어민(博施於民)하고 제중(濟衆) 해야 한다고 했다. 이웃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원하는 문제야말로 성(聖)의 경지이다. 즉, 내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까지도 남에게 나눔을 실천하며 배고파하는 그들의 배를 채워주고자, 채워주는 행동. 이것이 성(聖)이고, 이런 인간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최종목표이어야 한다.
실천이 무척 어려울 것은 사실이나 학생들에게 실천 여부와 상관없이 이러한 태도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공감할 수 있고, 지도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학교, 교실 현장이다.
우리나라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우수하고 똑똑하다. 다만 지향해야 할 ‘교육의 사회적 합의’가 무엇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향해야 할 교육 목표와 바람직한 인간상을 정확히 인지하는 순간, 홍익인간 실현 이상의 사회적 합의를 확실하게 이루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