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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 4,1-10
사랑하는 여러분,
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5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9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장 큰 사람'에 대한 가르침 사이에 위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나아가 ‘진정한 첫째’는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된다는 것’과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이요,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종’이 되되,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도 되라고 하십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일입니다.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 실현을 내려놓은 자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하는 일이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곧 어린이처럼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무력한 어린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게'(마르 9,31) 될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곧 그렇게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마르 9,37 참조)이고, 바로 그렇게 하는 이가 ‘첫째’가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는 세속정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다스리는 ‘섬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곧 ‘섬김’은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 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까지 치고 올라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야고 4,10)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ㄴ)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의 사람과 겸손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되기 더 어려울까?
그러면서 탁 든 생각은 겸손의 사람이 더 되기 힘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영적으로는 둘 다, 우리가 되고 싶은 겁니다.
겸손한데다가 사랑하기까지 한다면 그것이 최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은 인간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이지만, 겸손 특히 낮은 것은 인간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과 작음과 낮음은 인간적으로는 싫은 것을, 완덕의 이유와 영적인 이유로 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다.
완덕과 영적인 이유라면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가 되려는 것인데,
제 생각에 하느님 앞에서가 아니라면 겸손하고 작고 낮은 자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 누구가 인간에게 자기를 굽히고 낮추겠습니까?
같은 인간인데 누가 누구에게 굽히고 싶겠습니까?
밸이 꼴리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억지로 자신을 굽히는 것이지, 할 수만 있다면 남 위에 군림하고 싶고 적어도 밑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서고 싶어서 낮추는 것이고,
하느님 앞에 설 때 낮출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첫째가 되려면’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첫째란 하느님 앞에서 첫째지, 인간들 가운데서 첫째가 아닐 것이고,
첫째가 되기 위해 꼴찌가 되라는 말씀도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려면 사람들 가운데서는 꼴찌가 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에게 말합니다.
"레오나르도야, 이왕 오르려거든 고작 이 세상에서 사람들 위에 있으려 하지 말고, 오르고 오르다 하늘까지 치고 올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어라!"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권고한 것을 되생각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 너머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옹다옹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 9,34)
이 물음은 창세기 3장 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을 살펴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섬기고 봉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는 문제로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내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 퍼 주고도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운만큼 주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면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참된 봉사의 삶에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진정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는다>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이자 동물보호법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유태인을 학살한 사람입니다.
이 두 개의 아이러니한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히틀러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악한 사람이었을까요?
악한 사람이 어떻게 동물을 보호하는 법까지 만들었을까요?
그렇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짐승이나 물건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들에 자신의 처지를 투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사람은 커서 물건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구 쌓아놓습니다.
금쪽 상담소에 ‘김창훈’ 씨가 나왔습니다.
저장 강박증이 있고 아이를 지나치게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5남매를 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김창훈 씨를 바빠서 보호해 줄 수가 없어서 4년을 맞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호를 못 해줄 거라면 낳지를 말지!”
결국 물건이나 동물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같아서, 자기 연민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동물이 진정으로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사랑의 정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같은 인간 중에 보잘것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영화 ‘베테랑’에서 보면 재벌 2세가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자신과 경쟁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다면 아직 그는 부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부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재벌 2세 조태오는 밀린 임금 420만 원 때문에 1인 시위를 하는 아버지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올린 다음 아버지가 구타당하는 모습을 자식이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회사 이미지를 위해서는 환자들에게 잘 대해주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수천억 자산가인 김승호 씨는 우리나라 사업가 중 어떤 사람들은 식당에 갔을 때 종업원들을 막 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상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 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겐 아직도 식당 종업원이 자신의 지위를 올리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돈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서로 높아지려는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면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아기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힘 입는다면 자신처럼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아이들을 낳은 부모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을 사랑하려면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시각이 바뀝니다.
애벌레일 때는 나보다 못한 이들을 괄시하고 무시합니다.
자신보다 나은 애벌레가 있다면 그와 결탁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비가 되면 자비의 눈으로 애벌레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애벌레들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눈이 사라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 사이에 여러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욕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욕정이 욕심이 되고 그 욕심이 경쟁하게 하고 다투게 합니다.
따라서 아직 애벌레의 욕정이 남아있다면 그 사람은 나비가 되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적이 됩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이렇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교만한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거지를 만나 자비심을 느끼며 그 삶이 그들을 무시하며 살 때보다 더 행복함을 알고 그들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를 무시한 게 마음에 걸려 그에게 가진 돈을 다 주었는데 참 평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는 이제 작은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작은 사람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마르 9,31)
당신 입으로 직접 수난과 죽음을 예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예견되는 끔찍한 상황이 눈앞에 떠올라 마음이 엄청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두려우셨습니다.
이런 스승님의 마음과는 달리 제자단의 반응은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그간 자신들이 꿈꿔왔고 상상해왔던 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일부러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왕국과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이고있는 극단적 미성숙과 스승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카파르나움에 위치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하였느냐?”
앞서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뒤따라오던 제자단의 분위기를 눈치채셨던 것입니다.
계속 티격태격하며 뒤따라오던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 당신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길에서 한바탕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노상에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교회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봉사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매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매일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마음과 정성이 없기에, 그저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있기에, 가장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돌아봐야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스승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허깨비같은 몸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을 전혀 따라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였던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진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승님이 걸어가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 함께 진지하고 숙고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제자라면 스승님이 겪고 계신 고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기 위해 노력할 텐데, 그래서 스승님을 따뜻한 말로라도 위로해드리고자 노력할 텐데,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9,35)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는데(마르 9,30-32), 제자들은 그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시에 제자들의 주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마르 10,37), 그들은 그냥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 또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욕이 더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보통 사람들’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되지만, 예수님 수난 전에는 그런 문제로 자주 다투고 논쟁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라는 말은 사도들도 자기들의 논쟁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명예욕과 자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스스로 낮추라는 예수님 말씀은 높아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아니고, 높임을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 18,3-4)
하느님 나라는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나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나라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똑같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는 “하늘나라에는 높은 자리도 없고, 높은 사람도 없다. 그 나라에는 사람들 사이에 서열 같은 것이 없다. 그러니 그런 문제로 다투지 마라.” 라는 뜻도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끼리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하고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3)
‘꼴찌, 종, 어린이’ 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을 알아야만 낮춤과 겸손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 단어의 뜻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것이 싫어서 실천을 안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아예 모른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런 지식으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생활입니다(마태 7,21).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을 알아야만 할 정도로 주님의 가르침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4)
뒤의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낮춤’과 ‘섬김’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42-45)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입니다.
세속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직책의 높고 낮은 차이가 있고, 누군가는 높은 직책을 맡아야 합니다.
그러나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월감을 가져도 안 되고, 교만해져도 안 됩니다.
만일에 직책을 내세우면서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낮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거나 비굴해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원하는 직책을 얻지 못하거나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일이 생기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해도 속으로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은 실제로는 참 많이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자존심 하나만 제대로 다스려도 성덕을 쌓는 일에 큰 진보를 이룰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을 추구하라 - 겸손은 모든 덕행의 스승이다>
겸손하면 생각나는 '자귀나무꽃'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그윽한 향기맡고 한참 만에 찾아내는 꽃입니다.
“향기맡고
찾아내는 꽃
한참가다
향기맡고 뒤돌아 보는 꽃
자귀나무꽃
그윽하고 은은한 향기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
이런 향기의 사람이 되고 싶다”
-2013.6.19
오늘 새벽 성무일도 시 코헬렛 독서 중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내용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바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을 아는 지혜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 눈에 들어온 겸손과 관련된 말씀이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친구란 나란히 서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다.
저보다 나은 사람만 사귀려는 것은 받기만을 바라는 욕심이다.”
<다산>
참으로 겸손할 때 좋은 우정의 친구도 가능함을 봅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시카고 로욜라 대학의 교수진에게 주신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부지런히 꿈꾸는 사람들이, 희망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부지런히 꿈꾸는 희망의 사람들,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겸손의 스승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존재의 향기는 바로 겸손의 향기입니다.
엊그제 주일에는 올해 60세가 된, 47년 전 13세, 신림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 둘이 와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 줬습니다.
벌써 10년째 매해 방문하는 제자들입니다.
수사님들 잡수라고 추어탕과 게장도 선물했습니다.
이 제자들은 매해 추석 때는 쌀 수십 부대를 수도원에 선물합니다.
스승의 은혜 노래는 늘 들어도 감격입니다.
저는 ‘스승’대신 ‘주님’을 넣어서 가끔 불러보곤 합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스승의 은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절로 노래를 들으면서 자각하게 되는 감사와 더불어 겸손입니다.
평생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겸손과 온유요, 평생 배워도 초보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제 대구가대 1회 동기생 중 들꽃마을을 일구어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최영배 비오 신부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대구가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대구백화점에 가서 베레모를 사준 동기 신부인데 병환으로 향년 69세로 선종한 것입니다.
죽음 또한 겸손의 참 좋은 스승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늘 죽음을 환히 두고 살라 조언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죽음을 생각할 때 환상이나 허영, 교만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겸손을 살게 합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인간(homo)이요 겸손(humilitas)입니다.
흙을 닮은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생래적으로 흙을 찾는 인간 같습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도 겸손에 대한 주옥과 같은 설명이 많았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스승이요, 천상선물의 가장 확고한 기초이다.”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모든 덕을 능가합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도 구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때 모든 좋은 것이 주어집니다.”
“겸손한 마음가짐은 황금사슬과도 같습니다.”
“거룩해진 영혼의 장신구는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사막의 수도승, 마카리우스 압바에게 패퇴한 악마의 고백입니다.
“나도 네가 하는 모든 것을 한다.
너는 단식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너는 철야를 하지만 나는 전혀 잠을 자지 않는다.
오직 한가지 점에서만 네가 나를 능가한다.”
마카리우스 압바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악마는 대답합니다.
“너의 겸손이다.
그것 때문에 내가 너에게 맞서 싸울 수 없다.”
어느 사막교부는 겸손한 자만이 온갖 악마의 덫에 걸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테오도라 압바는 금욕수행이나 철야 또는 어떤 노고로도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참된 겸손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요, 겸손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모세를 위시한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 또한 겸손입니다.
겸손의 대가, 겸손의 달인인 겸손한 성인들입니다.
영성의 진위를 식별하는 잣대가 겸손입니다.
겸손을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니 부단히 겸손을 추구하라 말씀하시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정결히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악마와의 영적전쟁에서 겸손보다 더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인자무적(仁者無敵)에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철부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2차 수난예고에도 그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 예수님 부재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겸손을 배웠다면, 길 위에서 이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불필요한 논쟁은 없었을 것이며,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만 충실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열두제자를 불러 겸손한, 참된 종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은 같습니다.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드러나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 역시 훈련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비워가는 평생 겸손의 훈련장이 수도공동체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겸손을 추구하라는 말씀도 참 강렬합니다.
“그대가 윗자리와 최고 영예를 사랑한다면 이제는 끝자리에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십시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가장 낮은 것, 가장 작은 것을 추구하고,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 뒤에 세우십시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주님처럼 환대합니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주님의 제자들이자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요 이들의 환대를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찌보면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인간 일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하나 깊이 들여다보면 한없이 약하고 가련한 인간 존재요, 그 배경에는 예수님이,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은 겸손한 사람은 차별함이 없이 주님을 맞이하듯 모든 사람을 맞이할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 겸손과 온유의 예수성심을 닮아가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인체의 호르몬 중에 ‘도파민’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즐거움과 쾌락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새로운 여행과 모험을 떠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게임을 하고, 스포츠를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도박과 마약도 즐거움입니다.
연애도 즐거움입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조금 고상하게 맹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일 없이 건강한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고, 땅을 내려 보아 남에게 창피하지 않게 사는 인생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천하의 똑똑한 영재들을 모아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는 인간을 ‘Homo Ludens(즐거움을 찾는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즐거움을 찾으면서 발전했습니다.
문학, 미술, 음악, 예술은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체의 호르몬 중에 ‘세로토닌’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안정과 평화를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줄임말입니다.
세상을 피해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선교회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아프리카 수단의 이태석 신부님,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 요셉 의원의 선우경식 선생님은 평생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안정과 평화 그리고 헌신과 나눔을 추구하기에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도파민이 가속 페달이라면 세로토닌은 멈춤 페달입니다.
가속 페달이 없는 차는 움직이지 않지만, 멈춤 페달이 없는 차는 사고가 납니다.
둘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파민이 이끄는 삶과 세로토닌이 이끄는 삶의 균형을 도모해야 합니다.
본당의 사목도 이런 균형을 유지하면 좋습니다.
교우들의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서 체육대회, 본당의 날, 음식 나눔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습니다.
적당한 유머와 놀이는 집의 창문과 같아서 활력을 줍니다.
본당에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이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가하면 성경공부와 피정, 봉사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영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신앙의 자긍심을 얻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복음의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재미와 의미라는 두 날개로 본당이 균형을 이룬다면 활력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직책이나 우리의 업적을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았던 우리들의 삶을 보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직책이나 자리를 가지고 다투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편한 것을 참을 수 있다면,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경쟁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이기기 이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도록 강요합니다.
나눔, 사랑, 겸손, 봉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으며,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였고, 그 의미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재미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오늘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뜻과 다르다고>
한 인터넷 방송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18세 이하의 청소년 절반이 경제적 능력만 된다면 성형수술을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청소년이 자기 신체 대한 불만족 그리고 여기서 오는 불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설문조사였습니다.
사실 성형수술로 얼굴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웃지 않는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꾸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물론 얼굴 뼈 수술을 하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웃고는 있는 것 같은데 부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웃는 얼굴은 인공적인 성형이 아닌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웃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너그럽지 못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분위기가 전달되어서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분위기를 보입니다.
그 상대방을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입니다.
고스란히 나에게 다시 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내가 먼저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상대방의 얼굴을 통해 웃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주 간단한 진리인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자기는 원래 그렇다면서 스스로 철벽을 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에는 많이 웃었습니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계속 웃었습니다.
아주 썰렁한 농담에도 폭소를 터뜨립니다.
사랑하면 세상의 밝은 모습만 보게 되어서 웃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두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떤 사람일까요?
성당에 다니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이 성당 다니지 않는다고 무조건 반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서 인상 쓰고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전혀 없다는 생각으로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나의 뜻과 다르다고,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거리를 두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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