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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3일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 창세 15,5-12.17-18
제2독서 : 필리 3,17―4,1
복 음 : 루카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머나먼 길, 그러나 예서 말 수는 없는 길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사순 제2주일입니다.
우리가 듣는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신앙인으로서 삶의 길에서 겪게 되는
도전, 부르심에 대한 응답, 결단, 현실에 대한 안주가 아닌
끊임없이 열려 있는 마음, 열고자 하는 자세, 한마디로 순명이 그것일 것입니다.
제1 독서로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길을 떠나는 이야기를 듣고,
제2 독서에서 신앙의 여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에
나와 함께 참여해 달라는 바오로의 디모테오에게 보내는 서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거역할 수 없이 순명해야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삶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으며
그 부르심에 응답해 나가는 우리 인간의 길, 신앙 여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걷게 되는
믿음의 여정에서 출발점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은 그의 삶 깊숙한 곳으로 하느님이 찾아오셨고
그 하느님과 만남으로 그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이 됩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시기와 방법은 다르겠지만,
돌아보면 우리 신앙인의 삶도 아브라함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길은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는 모험의 여정이고
그 여정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때로는 모든 것은 버리고 떠나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그분이십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 깊은 곳에 당신을 향한 그리움,
당신을 추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갈증을 심어놓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갈증이 없는 사람은 다만 그 갈증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지요.
영원한 세계를 갈망하는 인간의 갈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길가메시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경, 문명의 발생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우룩을 다스리던 왕 길가메시의 서사시 일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먼 여행을 한 것은 ‘머나먼 곳’이라고 불리는 당신을 만나려고
세상을 헤매었고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며
바다를 건넜고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오, 아버지, 당신께 삶과 죽음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서사시는 영원한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너무나도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여 마지 않삽나이다.”라는 고백도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길을 떠나는 존재이며
그 종착역은 하느님, 그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람은 무엇을 찾아 고향을 떠난 것입니까?
보다 나은 정착지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떠난 것입니다.
그곳은 실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가득 찬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를 움켜쥐고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인들의 성조’가 된 것입니다.
이 아브람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 공동체에 순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순명은 바로 아브람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앙을 사는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태도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 철저한 ‘예’에 대한 하느님의 보증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아니, 바로 우리 자신들에 이르기까지
이 ‘예’, 바로 순명은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희망하는 태도입니다.
순명은 바로 신뢰와 희망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이 태도에서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삶의 자세인 순명은
근본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순명으로부터 오는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순명은 인간이 어디까지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
또는 자기의 뜻을 희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자유롭게 되고
보다 높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맡길 때
더 큰 자유를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는 교회 안에서 일하고 계신 성령에 대한 완전히 열린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 안에서의 분별, 영에게 열린 마음의 태도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의 이끄심을 알 수 있는가?
한마디로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바로 하느님, 당신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처럼 길을 떠나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그 여정, 때로는 고난의 여정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는 제자들에게
미리, 목적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잠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도 아래 그분이 목적하신 곳을 향해 가는 여정으로 삶을 이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서를 통해 그 여정을 신앙의 언어로 노래했고, 고뇌하고 희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성서를 읽으며 그것을 묵상하고 그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기쁨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시오’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그 고난을 겪어야 하는 제자들에게 미리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때로 그 여정이 힘들게 느껴질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변모 사건을 상기하며 위로를 받읍시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은총이 바로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께서 해와 같이 빛나는
그 모습을 뵙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떤 은총을 체험합니다.
예컨대, 아픈 나의 손을 잡아준 수녀님의 얼굴에서 위로를 느꼈다면,
그 평화의 시간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순간을 스치는 거룩한 변모 사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쁜 강아지, 고양이를 키우는 애견인, 애묘인이 참 많습니다.
동물을 예뻐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모든 사랑을 동물에게 쏟아붓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동물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그래서일까요? 한때 ‘강아지 번역기’라고 해서,
강아지의 짖는 소리를 통해 어떤 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능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지금은 시판되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많이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대화하고 싶고,
사랑하는 자기 마음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런 상품을 구매했겠지요.
그렇다고 자신이 개나 고양이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아닌 그 동물이 되어야 동물의 언어를 할 것이고,
동물의 마음을 알고 자기 마음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사람임을 포기하고 그 동물이 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과 전혀 다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함께 나누고, 사랑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감히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담소를 나누십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고, 엘리야는 예언서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를 죽음으로 완성하면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실 분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 구약시대의 유산이 신약시대에 인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머물면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속 머물겠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구원의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지금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듯(창세 15,18 참조), 우리와도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계약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기”(필리 3,21)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데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계약을 통해 얻은 은총을 온전하게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으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 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을 때나 겟세마니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
때처럼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루카 9,30)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루카 24,4;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 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날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부활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닫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마르 1,12; 마태 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으로, 메시아인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후자는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러니 이는 예수님을 인류 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나는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들은 말씀에 응답하고 있는가?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토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으로 변모되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사순 제2주일: 다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용히 참회와 보속을 하는 시기에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루카 복음은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하도록 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약이 먼 훗날에 이루어지리라는 그 말씀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자신을 변모시켰던 믿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후손들까지 변모시키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도 그렇지만 우리도 사순절의 기다림과
앞당겨진 파스카의 빛으로 신비스럽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매 순간 이 변모의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9,28-36: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끄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기도’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여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기도가 그 영광스러운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루카 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도의 주제가 바로 이 사순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에서는 단순하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카 복음은 두 인물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여기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한 말은 원문으로 ‘exodos: 출애굽, 대탈출이다.
즉 결정적인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출애굽의 모든 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은 출애굽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고달픈 여정이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사도의 졸린 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32절).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34절)고 한다.
이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즉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겠지만,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택한 아들’(35절)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하시지만,
그분은 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빛을 위한 것으로써,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그의 자손들이 은총을 입었듯이 그처럼 변모되어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그 영광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35절) 즉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그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광야와 같은 이 사순절은 어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에 미리 도착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신비를, 영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 진정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다(필립 3,18-19).
갈바리오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파스카의 기쁨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필립 3,20)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가는 삶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춤으로써 신앙 안에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합당하게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 변모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20-21).
나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꿈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꿈은 해몽을 잘해야 합니다.
안 좋은 꿈이라면 행동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하면 됩니다.
좋은 꿈이라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지내면 됩니다.
안 좋은 꿈이라고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꿈이라고 경거망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도 가끔 꿈을 기억할 때가 있습니다.
이가 빠지는 꿈을 꾼 경우도 있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꾼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 이가 빠지는 경우도 없었고, 하늘을 나는 경우도 없었습니다.
앓던 이가 빠진다는 말처럼 이가 빠지는 꿈을 꾸면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면 새로운 만남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꿈은 해몽이 중요합니다.
구약성서에서 꿈과 관련된 인물이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요셉은 꿈을 잘못 해몽하였습니다.
자신이 만든 곡식 단은 우뚝 서 있고, 형들이 만든 곡식 단이
자신이 만든 곡식 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 열한 개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기분이 좋았을지 모르지만, 형들은 동생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습니다.
결국 요셉은 그 꿈 때문에,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의 꿈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꿈 해몽을 잘하였고, 그 덕분에 이집트에서 파라오 다음으로 높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뭄 때문에 굶주리는 형제들을 돌보게 됩니다.
요셉의 배려로 야곱과 가족들은 모두 풍요로운 이집트로 올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도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결국 꿈은 해몽이 중요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꿈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남자를 모르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됩니다.
참된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요셉은 꿈에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꿈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사히 고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꿈은 해몽이 중요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아브람은 70이 넘은 나이었고, 부인 사라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축복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땅은 부유함의의 상징입니다. 땅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정든 땅, 고향 땅인 ‘우르’를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람 당시에 우르는 지금 뉴욕의 맨하탄과 같았습니다.
완벽한 도시였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현대적인 도시였습니다.
안전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정든 땅, 고향 땅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이민족들의 땅이었습니다. 결코 안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 듣고서 낯선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3,500년이 지난 지금 하느님의 축복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자손들은 21억 명이 넘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 예수님이 세운 교회는 가나안을 넘어 온 세상에 퍼져있습니다.
아브람의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늘었고, 땅은 크기를 잴 수 없을 만큼 늘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루어집니다. 아브람의 결단이 있었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꿈은 해몽이 중요하듯이,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상선 바오로 신부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창세 15,18)
어제도 보았듯이 계약에는 당사자가 있고
당사자 간의 쌍방의 의무가 조건으로 제시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브람에게 큰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럼 아브람의 의무는 무엇이었을까요?
명시적으로 언급 안 되고 있지만, 유추해 보건대, 그냥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고 하니까요.
"에이, 설마요..." 하지 않고, "예, 고맙습니다. 그리 믿습니다. 아멘." 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당신 재산의 일부를 상속으로 나누어 주시겠다는데,
"예, 고맙습니다." 하며 감사하면 될 일이지요.
"말로만 그렇게 하시고 나중에 딴소리 하실거죠?" 하거나
"에이, 줄려면 더 많이, 더 좋은 것, 그거 말고 딴 것 주세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렇게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에서
하느님은 부르시고 주도하시며, 아브람은 믿고 따릅니다.
그런데 "할례"와 같이 계약 이행을 위한 인간 편의 의무를 요구하시지 않고(창세 17,9-14)
하느님 편에서만 후손과 땅에 대해 약속하십니다.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기 이전에
당신께서 호의와 자애로 이루어 주실 미래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예' 한다면 계약은 성사되고,
'아니오' 한다면 그 복을 걷어차 버리는 것이 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창세 15,7) 하시는 말씀에 꽂혀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마치 이제 떠나게 될 우리 벗들에게 속삭이시는 말씀, 약속의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벗들을 이곳에서 빼내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더 좋은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자꾸만 들립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시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체험을 하게 해 주실 겁니다. 아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하였으니까요.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기도를 특별히 강조하는 사가입니다.
타볼산의 변모 사건을 다루면서도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높은 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오르신 이유를
분명하게 '기도하시러'(루카 9,28)라고 꼭 집어서 이야기 할뿐 더러,
영광스러운 변모 자체도 '기도하시는 중'(루카 9,29)에 일어났다고 밝혀줍니다.
루카에게 있어 '높은 산'은 바로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가 예언하는 우리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는 것도
'기도' 안에서,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일까요?
여러분은 언제 자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나요?
머리를 새로 하고, 목욕을 깨끗이 하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멋진 새 옷을 장만해 입고 그럴 때가 아름답지요.
그러나 사람이 진짜 아름다울 때는 기도하고 난 후가 아닐까요?
깊이 기도하고 난 후의 수행자의 모습은 맑고 티 없는 순수 영혼의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모든 번뇌와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았으니
맑고 청아한 피부와 눈매, 사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한 마음이 풍겨내는 향기야말로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 멋져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도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변하였답니다.
바로 '기도' 때문이지요. 기도 안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고 하느님을 체험한 까닭입니다.
벗님 여러분은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없나요?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시나요?
그래서 온갖 미용에 좋다는 음식이나 화장품에 관심이 많으시나요?
성형수술이나 보톡스, 백옥 주사에 맘이 가나요?
그런 데에 보다, 기도하는 데에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해 보세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관상하는 이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답니다.
오늘 기도 후 맑은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흐믓해 하시는 기쁨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하늘의 시민'(필리 3,20),
'하느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알아듣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기쁨이요 화관으로 여기는 필리피인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필리 3,18)로 제발 살지 말라고.
왜냐하면 그 길은 반드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요? 어리석게도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필리 3,19)이라고.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하늘의 시민'이 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저 또한 바오로 사도처럼, 벗님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게 될 벗님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벗님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아!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참조)
기도로 얻는 믿음: “괜찮다, 사랑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올라 보면 이 세상이 작아 보이고 별것도 아닌 일에
아웅다웅하며 살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인데 하느님은 에덴동산에 사십니다.
우리가 잠시나마 에덴동산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아의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짐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오르는 방법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율법, 곧 하느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엘리야는 성령, 곧 하느님의 사랑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충분한 사랑을 주면
자녀는 생존 걱정을 내려놓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그러면 집착이 작아지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께 은총과 진리를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괜찮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때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면 주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기도하면 또 엘리야도 보내주십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사랑한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측에 따르면 200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분당보다 넓은 크기의 1조 5천억 원짜리 궁전을 짓고 있고
자동차와 비행기 등은 수천억 원씩 개발비를 투자한 특수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100세까지 대통령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법을 개정하며 계속 대통령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 되고 국방력과 경제가 나아졌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제가 좋아진 기업들의 많은 주식을 엄청나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기와 같이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푸틴이 어렸을 때 ‘생존의 문제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아니면 그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을까요?
지금 생존의 문제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렸을 때
부모님이 그의 생존의 문제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고 빈민 공용주택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며
유도와 같은 운동을 하고 소위 불량배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힘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였는지 당시 강한 권력을 지녔던
소련 정보부 KGB에 들어갑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 곁에서 정치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뇌물수수 등 비리에 말려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옐친 대통령의 오른팔이 되어 결국엔 대통령에 오릅니다.
그러고 나서 법을 개정하며 2036년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인지도가 점차 하락하자 아마도 전쟁을 통해 이미지 전환을 꾀한 것 같습니다.
푸틴은 히틀러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히틀러도 아버지의 엄청난 기대와 그에 미치지 못할 때 행한
무자비한 폭력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위치에 오릅니다.
푸틴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힘과 재산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살아남아야 하는 마음은 대통령을 그리 오래 해도,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푸틴이나 히틀러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랄 때 먹어야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양식은 은총과 진리가 결합한 것입니다. 양식은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양식을 먹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아버지에게 이 양식을 먹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다 책임질 테니 죽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야 남을 해치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먹고 사는 거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 때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타볼산에 데리고 올라가셔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1달러 프로젝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창업한 페이팔을 큰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 돈이면 평생 놀고먹어도 될 양이었습니다.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하루 1달러, 한 달 30달러로 생활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냉동 햄버거를 사서 30일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와 조금 먹을 것만 있으니 행복했습니다.
‘하루 적어도 1달러는 벌겠지!’라는 생각으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푸틴도 최고 부자고 일런 머스크도 최고의 부자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생존이 두려워 모으는 사람과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자해서 부자가 된 사람과는 확실히 달라 보입니다.
일런 머스크는 이번 우크라이나의 전쟁 승리를 위해 인터넷망 시스템을 공급하였습니다.
신기하게 푸틴과 싸우는 편이 된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누구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나라가 가난해질 것이라 해서 산아제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엄청난 낙태가 이뤄졌습니다.
어쩌면 그 이후로 생존에 대한 불안함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어머니께 들었던 것 같은 말이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요즘에 하면 무슨 조선 시대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 지금만큼 풍요로울 때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조선 시대가 지금보다 나라의 믿음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 없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니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각자의 밥그릇은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에는
“괜찮다.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라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코헬렛의 지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와 재화를 베푸시어 그것으로 먹고 자기 몫을 거두며
제 노고로 즐거움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모든 인간.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
정녕 하느님께서 그를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게 하시니
그는 제 인생의 날수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코헬 5,9.14.16.18-19)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이 제 마음의 즐거움에만 몰두하도록
일만 하면 먹고 살 수 있는 몫을 마련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괜찮다, 사랑한다!”라고 하시며 모든 것을 마련해주시니,
나는 죽음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