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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만에 젤렌스키 정권이 붕괴한다’는 러시아의 지나치게 경솔한 시나리오 뒤흔든 우크라이나의 ‘보이지 않는 힘’ / 5/22(금) / 다이아몬드 온라인
2022년, 러시아는 사이버 공격과 지상 침공을 결합한 급진적인 작전으로 우크라이나를 단기간에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 구상은 전쟁 직후 무너지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전제로 그려진 승산은 어디에서 현실과 어긋났는가.
※본고는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 부교수 코이즈미 유우의 『현대전쟁론 ――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생각하는 세계의 행방』(치쿠마서방) 중 일부를 발췌·편집한 것입니다.
● 아침에 눈을 뜨면 소련 전차가 줄지어 있었다
2025년 7월,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 참석했을 때 인상 깊은 일이 있었다.
세션이 끝난 뒤, 연령이 높은 체코인 연구자와 잡담을 나누고 있던 때의 일이다. 러시아 군사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한 저자에게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러시아군이야! 아침에 눈을 떠보니 우리 앞 거리엔 소련 전차가 줄지어 있었던 게 기억나.”
알렉산더 두프체크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체코 공화국 공산당 행동계획’을 발표하고, 비소련형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방향성을 제시한 것은 1968년 2월이다. 소위 말하는 ‘프라하의 봄’이다.
1956년 헝가리 동란에 이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련권에서 탈퇴를 시도한 전후 두 번째 사례였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국가들은 이 움직임을 억제하려 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탈퇴가 동유럽 사회주의권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설득이 무산되자 8월에 워르샤와 조약 기구 국가들은 마침내 군사 개입에 나섰다.
‘도나우 작전’이라 명명된 이 침공 작전은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8월 20일 새벽 0시, 수도 프라하 인근의 루즈니에 국제공항을 소련군과 국가보안위원회(KGB) 특수부대가 갑자기 점거했다.
소련군은 해당 공항을 거점으로 수송기를 이용해 후속 부대를 차례로 파견하고, 수도 프라하의 정치 중심부와 라디오국을 하룻밤 사이에 장악했다. 두프체크는 체포되었고, 동시에 25만 명의 워르샤와 조약기구 군 주력이 국경을 넘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몰려들었다.
이처럼 프라하 점령 자체는 작전 시작 다음 날 아침에 이미 완료되었다. 체코인 연구자가 말하듯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소련군이 시내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 시민들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체코 전역을 점령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지만, 소요된 시간은 며칠에 불과했다. 사실상 항복 문서인 모스크바 협정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서명한 것은, 침공 작전이 시작된 지 겨우 일주일 뒤인 8월 27일이었다.
● 짧은 기간에 젤렌스키 정권을 붕괴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소련과 러시아가 과거에 수행한 침공 작전이 공항 점거 없이는 절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과 러시아군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군, 1979년 아프가니스탄 국군, 2014년 우크라이나군에 대해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자랑했기 때문에,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지 않았다면 기습적인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비슷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1956년 소련군이 수행한 헝가리 침공은 공항 점거 없이 성공했다. 따라서 공항 점거는 승리 자체의 조건이라기보다, 급작스러운 승리의 조건이라고 보는 편이 좋다.
제2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편집부 주/2022년에 시작돼 현재도 계속되는 전쟁을 의미)의 NPV(편집부 주/전쟁 초기 단계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기간)에서 러시아가 호스트메리 공항을 가장 먼저 노린 것은 바로 이러한 급작스러운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68년 프라하와 마찬가지로, 키예프 시민들이 눈을 뜨면 집 앞 거리 전체가 러시아 군 전차 부대에 파묻힌 모습을 러시아는 원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으로부터 압수한 작전 명령서 등을 근거로 작성된 영국 왕립 방위 안보 연구소(RUSI)의 보고서가 말하듯, 러시아군의 작전 구상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속도였으며, 전쟁 발발 후 10일 이내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승리를 확정적인 것으로 삼아 점령 지역의 안정화 작전으로 전환할 것이 예상되었다.
전쟁 발발 당일, 푸틴 대통령이 ‘전쟁’이 아니라 ‘특별 군사 작전’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작전 구상이 염두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즉, 군대가 출동하지만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지 않아 짧은 기간 안에 젤렌스키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아니다’라는 변명이 성립한다고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의도한 전격 작전은 곧 속도를 잃었다. 호스트메리 공항에 배치돼 있던 우크라이나 군 방위대가 강력한 저항을 보여 공항 점령이 지연됐고, 후속 부대를 키예프 시내에 신속히 파견하지 못했다.
이 결과, 젤렌스키 정권을 배제한 전격적인 승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지상에서 침공해 온 러시아군 주력군도 키예프를 포위하려 했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고, 결국 한 달 만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장기적인 소모전쟁의 길이 열렸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러시아군은 NPV에서 파괴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지 못했다.
● 무력으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으면 러시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단기간에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국토 면적으로 보면, 우크라이나는 약 60만 평방킬로미터로 러시아의 1/28에 해당한다.
인구는 7분의 1에 불과했으며, 병력은 전쟁 발발 전 러시아군 약 90만 명에 비해 우크라이나군은 20만 명에 못 미쳐 약 9분의 1 수준이었다. 그 외에도 경제력부터 군수산업 능력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모든 지표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60만 평방킬로미터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는 일본의 1.7배에 달하는 넓이이며, 어느 EU 회원국보다도 크다.
또한, 러시아가 초기 침공 작전에 투입한 약 15~19만 명의 병력에 비해 우크라이나군은 평시부터 약 2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제1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편집부 주/2014년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개입과 그에 따른 일련의 분쟁)에서 실전 경험을 가진 국가보위군 6만 명과 국경경비대 4만 명이 추가된다.
전쟁 발발 전에는 예비역 동원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침공해 온 러시아군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 병력은 상당히 규모가 컸다.
우크라이나가 NPV에서 패배를 피할 수 있었던 큰 요인 중 하나는 이 전략의 수직적 깊이와 병력 규모의 크기에 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대국은 아닐지라도, 유럽을 대표하는 지역 강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량적 지표를 러시아 측(특히 최소한 러시아 군이) 사전에 인식하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면적은 위키피디아에도 실려 있고, 우크라이나 군은 매년 국방백서를 발행하고 있으며, 전쟁 발발 전까지는 자국의 상비 병력과 동원 예비 병력을 공개하고 있었다(참고로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NATO 비가입국 중에서 국방백서를 매년 발행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또한, 이 전쟁이 시작될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방공망과 항공 작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크라이나군이 소련식의 매우 대규모이면서 다양한 지상 배치형 방공 시스템(GBAD)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쟁 직전 이들을 평시 배치 지점에서 이동시켜 교묘하게 분산시킨 점이 지적된다.
그렇긴 하지만, 같은 소련군의 후손이며 2014년 이전에 합동 훈련까지 진행했던 러시아군이 이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우크라이나가 전력을 다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섰다면, 정면 전투(알렉산드르 스베친[편집부 주/전전 소련의 뛰어난 군사 이론가]가 말하는 무력 전선)에서 러시아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 우크라이나의 저항력은 숫자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스베친이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 작전을 직접 목격했다면, 그 부실함에 격분했을 것이라고 미 육군의 조나단 크루그는 말한다.
문제는 그런 부실함의 원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격렬한 저항을 예측하지 못했(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예상되는 적이 ‘한 방’에 굴복할 수 있는 상대인지, 즉 파괴 전략에 취약한 ‘소국’인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스베친은 말한다.
예를 들어 영토가 넓은 국가(지리적 대국)는 NPV에서 영토 상실에 견딜 여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전쟁에서 지지 않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한 국가 위기 속에서도 국민의 저항 의지를 유지하고, 무리하게 공격에 나서 전력을 소모하지 않도록 군을 억제하기 위한 ‘단호한 정부와 견고한 국내 상황’, 즉 정치 전선의 강인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저항력은 병력이나 국토 면적처럼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적의 정치 전선이 우리 쪽의 한 번의 찌르기로 무너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파괴 전략을 펼칠 때 가장 불확실성이 컸던 점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즉,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정치 전선 강인함에 대해 희망적인 전망을 품은 결과, 무력 전선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여기서부터 떠오른다.
코이즈미 유우
「数日でゼレンスキー政権は崩壊する」ロシアの甘すぎるシナリオを狂わせた、ウクライナの“見えない力”
「数日でゼレンスキー政権は崩壊する」ロシアの甘すぎるシナリオを狂わせた、ウクライナの“見えない力” / 5/22(金) / 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2022年、ロシアはサイバー攻撃と地上侵攻を組み合わせた電撃的な作戦で、ウクライナを短期間で制圧できると見込んでいた。だが、その構想は開戦直後に崩れ、戦争は長期化する。圧倒的な戦力差を前提に描かれた勝算は、どこで現実と食い違ったのか。※本稿は、東京大学先端科学技術研究センター准教授の小泉 悠『現代戦争論――ロシア・ウクライナから考える世界の行方』(筑摩書房)の一部を抜粋・編集し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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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目を覚ましたら ソ連の戦車が並んでいた
2025年7月、ギリシャのテッサロニキで開催された国際学会に参加した際、印象深い出来事があった。
セッションが終わった後、年配のチェコ人研究者と雑談を交わしていたときのことだ。ロシア軍事の研究をしていると言う筆者に、彼はこう口にした。
「ロシア軍ね!朝、目を覚ましてみたら、うちの前の通りにソ連の戦車が並んでいたのを覚えてるよ」
アレクサンデル・ドゥプチェク率いるチェコ・スロヴァキア共産党が「チェコ共和国共産党行動計画」を発表し、非ソ連型社会主義を目指す方向性を打ち出したのは、1968年2月のことである。いわゆる「プラハの春」だ。
1956年のハンガリー動乱に続き、東欧社会主義国がソ連圏からの離脱を図った戦後2つ目の事例であった。ワルシャワ条約機構諸国は、この動きを抑え込もうとした。
チェコ・スロヴァキアの離脱が東欧社会主義圏全体の崩壊に繋がりかねないと懸念されたからである。政治的説得が不発に終わると、8月、ワルシャワ条約機構諸国はついに軍事介入に踏み切った。
「ドナウ作戦」と名付けられたこの侵攻作戦は、奇襲で始まった。8月20日午前0時、首都プラハ近郊のルズィニエ国際空港をソ連軍と国家保安委員会(KGB)の特殊部隊が突如として占拠したのである。
ソ連軍は同空港を拠点として輸送機で後続部隊を次々と送り込み、首都プラハの政治中枢やラジオ局を一夜のうちに手中に収めた。ドゥプチェクは逮捕され、これと同時に25万人のワルシャワ条約機構軍主力が国境を越えてチェコ・スロヴァキア領内に雪崩れ込んだ。
このように、プラハの占領自体は作戦開始の翌朝には完了していた。件のチェコ人研究者が言うように、「朝、起きてみたら」ソ連軍が市内にいた、というのが一般市民の感覚であっただろう。
チェコ全土の占領にはもう少し時間がかかったが、要した時間は数日に過ぎない。事実上の降伏文書であるモスクワ協定にチェコ・スロヴァキアが署名したのは、侵攻作戦が開始されてからわずか1週間後の8月27日のことであった。
● 短期間でゼレンシキー政権を 崩壊させる目算だった
だが、ソ連やロシアが過去に行った侵攻作戦は空港占拠なくしては絶対に不可能であったというわけではない。
ワルシャワ条約機構軍やロシア軍は、1968年のチェコ・スロヴァキア軍、1979年のアフガニスタン国軍、2014年のウクライナ軍に対して圧倒的な戦力上の優位を誇っていたから、多少の損害を顧みないのであれば、奇襲的な方法を取らずとも最終的には同じような目標を達成できていただろう。
実際に1956年にソ連軍が行ったハンガリー侵攻は、空港占拠なしで成功している。したがって、空港占拠は勝利そのものの条件というよりも、電撃的な勝利の条件であると考えたほうがよい。
第二次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編集部注/2022年に始まり現在も続いている戦争を指す)のNPV(編集部注/戦争の最初期段階において、目的を達成するための基盤を作る期間)において、ロシアがホストメリ空港を真っ先に狙ったのは、まさにこうした電撃的勝利を目指してのことであったと思われる。
1968年のプラハと同様、キーウの市民が目を覚ましてみると、家の前の通りをロシア軍の戦車部隊が埋め尽くしているような状況をロシアは欲していたのだろう。
ウクライナ軍がロシア軍から押収した作戦命令書などに基づいて作成された英王立防衛安全保障研究所(RUSI)のレポートが述べるように、ロシア軍の作戦構想において何よりも重視されていたのはスピードであり、開戦から10日以内にはウクライナに対する勝利を決定的なものとして占領地域の安定化作戦に移行することが想定されていた。
開戦当日、プーチン大統領が「戦争」ではなく「特別軍事作戦」という言葉を使ったのは、こうした作戦構想が念頭にあったからではないだろうか。
つまり、軍隊は出動するものの激しい戦闘とはならず、ごく短期間のうちにゼレンシキー政権を崩壊させてしまえるという見込みがあったからこそ、「戦争ではない」という言い訳が立つと考えられていたのだと思われる。
しかし、ロシア軍が意図した電撃作戦はすぐに失速した。ホストメリ空港に配置されていたウクライナ軍守備隊が頑強な抵抗を示したために空港の占拠は遅れ、後続部隊をキーウ市内に迅速に送り込む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この結果、ゼレンシキー政権の排除による電撃的勝利は実現しなかった。
また、地上から侵攻してきたロシア軍主力もキーウを包囲するにはしたが、陥落させるには至らず、結局は1カ月で撤退せざるを得なくなっている。長期に及ぶ消耗戦争への道が開かれたのは、この期間においてであったと言ってよいだろう。ロシア軍はNPVにおける破壊戦略的勝利の達成に失敗したのである。
● 武力で圧倒的に優位ではないと ロシアは初めから知っていた
ロシアがウクライナを短期で屈服させられると考えたことは、わからないではない。国土面積で見ると、ウクライナのそれは約60万平方キロメートルとロシアのわずか28分の1である。
人口については7分の1であり、兵力は開戦前のロシア軍約90万人に対してウクライナ軍20万人弱と、およそ9分の1であった。その他、経済力から軍需産業能力に至るまで、ロシアはあらゆる指標で圧倒的な優位に立っていた。
しかし、ウクライナの国土が60万平方キロメートル「しかない」と言っても、これは日本の1.7倍にも及ぶ広さであり、どのEU加盟国よりも大きい。
また、ロシアが初期の侵攻作戦に投入した約15〜19万人という兵力に対し、ウクライナ軍は平時から20万人弱の兵力を有し、ここにはさらに第一次ロシア・ウクライナ戦争(編集部注/2014年から始まったロシアによるウクライナへの軍事介入と、それに伴う一連の紛争)での実戦経験を持つ国家親衛軍6万人及び国境警備隊4万人が加わる。
開戦前には予備役動員も行われていたから侵攻してきたロシア軍に対するウクライナ側の兵力はかなり大きなものであった。
ウクライナがNPVにおいて敗北を避けられた大きな要因の1つは、この戦略縦深と兵力規模の大きさに求められよう。
ウクライナは世界的大国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が、欧州有数の地域大国ではあった。
だが、こうした定量的指標をロシア側が(少なくともロシア軍が)事前に認識していなかったとは考えにくい。
ウクライナの国土面積はWikipediaにだって載っているし、ウクライナ軍は国防白書を毎年発行しており、開戦前までは自国の常備兵力や動員予備兵力を公開していた(なお、ウクライナは旧ソ連のNATO非加盟国の中で国防白書を毎年発行している唯一の国である)。
また、この戦争が始まった当初、ロシアはウクライナの防空網や航空作戦を完全に制圧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その理由としてはウクライナ軍がソ連式の非常に大規模かつ多様な地上配備型防空システム(GBAD)を保有し、なおかつ開戦直前にこれらを平時の配備地点から移動させる巧みな分散を行ったことが指摘される。
それはそうなのだが、同じソ連軍の末裔であり、2014年以前には合同演習まで行っていたロシア軍がこのことを知らなかったとは考えにくい。
つまり、ウクライナが総力を挙げてロシアの侵略に対抗してきた場合、正面切った戦闘(アレクサンドル・スヴェーチン〔編集部注/戦前のソ連における傑出した軍事理論家〕のいう武力戦線)においてロシアが圧倒的優位を獲得できないことは、最初からわかっていたはずである。
● ウクライナの抵抗力は 数字だけでは計れない
それゆえに、スヴェーチンがロシア軍によるウクライナ侵攻作戦を目の当たりにしたなら、その杜撰さに激怒しただろうと米陸軍のジョナサン・クルーグは述べる。
問題は、そのような杜撰さの原因である。ロシアがウクライナの激しい抵抗を予想できなかった(していなかった)のはなぜなのだろうか?
想定される敵が「一撃」で屈服する相手であるのかどうか、つまり破壊戦略に対して脆弱な「小国」であるのかどうかを見積もるのは非常に難しいとスヴェーチンは述べている。
例えば領土の広い国(地理的大国)はNPVにおける領土の喪失に耐える余地を持っているが、それだけで戦争に負けないことが保障されるわけではない。
そのような国難の中にあっても国民の抵抗意志を維持し、徒に攻勢に出て戦力を消耗しないように軍を抑えておくための「断固たる政府と強固な国内情勢」、つまり政治戦線の強靭さが求められるからである。
だが、こうした政治的抵抗力は、兵力や国土面積のように定量的に見積もることができない。敵の政治戦線は我が方の一突きによって瓦解してしまうのかもしれないし、そうでないかもしれない。ロシアがウクライナに対して破壊戦略を仕掛けるにあたり、最も不確実性が大きかったのもこの点であろう。
つまり、ロシアはウクライナの政治戦線の強靭さに関して希望的観測を抱いた結果、武力戦線でも勝利を収められ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見方がここからは浮上してくる。
小泉 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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