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지도가 뭐냐 하면, [한국고대사국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년 11월에 출간된 책에 45-46쪽에 수록된 지도다.
이 지도는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을 표시한 것으로, 482년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 책은 김태식, 양기석, 강종훈, 이동희,조효식, 송기호, 이근우 공저인데,
김태식 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전체 연구의 대표로 "한국고대 사국의 국경선 -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양기석은 "475년 위례성 함락 직후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 강종훈은 "5세기 후반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
이동희는 "5세기 후반 백제와 가야의 국경선", 조효식은 "5세기 말 가야와 신라의 국경선"
송기호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북방 경계선", 이근우는 "일본 역사교과서의 고대 역사지도 왜곡 현황"
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고, 공동 연구로 지도를 그렸던 것이다.
이 연구는 2008년 1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동북아 역사지도를 편찬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시작된 것인데,
비용이 많이 소모되어, 2008년 5월에 동북아역사지도편찬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지도 만들기 작업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이때 연구했던 성과들 가운데 동의한 연구자들이 논문을 모아 이 책을 만든 것이다.
이 책에서 굳이 482년을 기준으로 한 지도를 작성한 것은 고구려가 가장 강대했을 당시의 역사지도 시안을 그려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태식 교수가 먼저 지적하듯이, 지도를 만드는데는 매우 어려움이 많고, 논란도 많다. 논란도 많다.
그런데 단 한가지, 고구려가 가장 강대했을 때라면, 왜 굳이 482년일까? 중원고구려비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려의 북방 경계이다. 이 연구를 수행한 송기호 선생은 좀 이상한 것이, 460년대에는 길림시 일대가 고구려의 영역이었지만, 470년에는 물길에게 빼앗겼다고 추정하지만, 물길이 길림시 일대를 취했다는 분명한 견해도 없기 때문에, 길림시 지역은 논란이 있으나 우선은 포함시켰다고 했다. 반면 농안, 장춘 일대를 고구려의 영역에 넣지 않은 것은 494년까지 부여가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뺐다고 했다. 그럼 고구려가 가장 강대했을 때의 지도는 아닌 셈임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482년을 택한 것은 479년에 고구려가 지두우의 분할을 논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연대를 택한 것이라고 한다.
송기호 선생은 고구려 북쪽 경계는 [위서] <물길전>에 등장하는 물길 사신 을력지가 북위에 간 통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그려진 것이다. 을력지가 통과한 물길을 북류 송화강으로 보고, 고구려 10부락을 길림시 일대로 본 것이다.
반면 임기환 선생은 을력지의 주장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라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고, 고구려 10부락을 길림시 일대의 광역으로 볼 필요도 없고, 479년 지두우 분할을 논할 정도로 막강했던 고구려가 길림시 일대를 물길에게 빼앗겼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당시 부여는 이미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였으므로, 부여 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포함시켜 보자고 하였다.
이런 반발 때문에 이 지도에 부여를 별도로 표시한 셈이다.
하지만 송기호 선생의 주장은 1987년에 천관우 선생이 쓴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 책에 그려진 광개토태왕 시기 고구려 북방 경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통전]의 고구려가 동서 6천리에 이른다는 것보다 [수서], [구당서]의 경우만을 택하였다. 고구려가 광개토태왕 시기 동서 2천리였다가, 구당서에 3100리에 늘어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통전의 기록이 그렇게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너무 쉽게 부정한다.
그리고 학계에서 지두우 지역을 분할했다는 것을 계획에 그치고 점령하지 않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고구려의 영역을 요하 북서쪽으로 확대하지 않았고, 또 최근에 발견된 요서지역에 고구려가 적극 진출했다는 연구 (예: 윤병모 - 고구려의 전쟁과 요서진출연구. 2009년)도 반영되지 않고, 박경철 선생과 같이 북방 민족을 통솔한 것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을 결여하는 등 많은 점에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또 송기호 선생의 견해가 우리나라 학계 모두를 대변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이 지도를 올린 것은, 현재 학계를 대표하는 서울대학파의 고대사 인식의 틀이 어떠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필자가 고구려 지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이미 글을 써둔 바 있고, 그 논문도 자료실에 등록해두어 볼 수 있게 해두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논평은 하지 않겠다.
다만 미리 언급해둘 것은, 이 글을 읽는 분들, 특히 영토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는 분들에게 당부를 드린다.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무조건 비판하지 말기 바란다. 비판은 대안을 제시할 때 빛이 나는 법이다.
한국고대의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괜한 논란을 일어날까 우려된다.
맹목적으로 비난을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차라리 침묵하고 먼저 공부하라.
첫댓글 이 책은 저도 선배가 구입했길래, 보다가 사서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 한장만으로도 얼마나 고고자료가 잘못 반영되어 있나 알 수 있습니다. 가야가 전라도 일대까지 저렇게 깊숙하게(482년에) 진출했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신라도 서쪽으로 무리하게 진출해 있고요...482년에 백제는 충남 일대와 전라도 해안가만 차지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한장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많은 학자가....딴지 같지만...그런데..왜 실선으로 표시했는지..점선으로 그리고..많은 학자가 참여 했으니..영향력..영역등 좀더 심층적으로 그렸으면 하는 바램이 드네요..그나 저나..482년에 신라와 가야가..??..또한 영산강유역은 무녕왕과 성왕이전인데...백제영역이라니.....
비판하고 다시 공부할께요..
백제 영역이 교과서보다 조금 축소된 느낌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문구가 생각나네요.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성립된 이후로 중도주의는 항상 배척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라이벌이었던 조봉암 선생님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며 극좌극우를 배제한 중도정치를 내세웠지만 빨갱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법살인 되셨다는 내용입니다. 역사에서 만큼은 한쪽으로 치우친 잣대를 버리고, 종합적인 분석으로 사실에 접근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인은 한국사를 통해 아직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죠. 당쟁, 좌우익간의 대립, 보수진보논쟁............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자신의 논리는 상대방에게 관철시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것입니다.
관용과 토론? 실종되었습니다. 역사를 통해 그러한 투쟁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조국과 민족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는지를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것입니다.
저도 최근 카페에서 주로 논의되는 과거 한국의 영토문제에 대한 토론은 이제 지겹다 못해 신물납니다.
부디 저 지도 한장을 끝으로 논쟁의 마침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이런 문제에선 항상 전문가들이 입을 맞추는 게 서쪽과 남쪽으론 경계를 분명히 할 수 있으나, 문제는 북쪽과 동북쪽이라고.
직접 통치구역과 지배 구역, 고구려 백성의 거주 유무 등을 모두 합산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로 북쪽과 동북쪽은 흑수 말갈을 비롯해 말갈인이 거주하던 지역인데, 그것을 직접 통치하면서 고구려 백성이 살던 지역으로 정의할 것인지, 아니면 말갈이 다수이긴 했으나, 어쨌건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지역이었는지..
동북방 쪽은 유목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던 곳이기도 하여 고구려인보단 말갈인이 다수 분포했다고 하는데, 앞으로 지도에서 직접 통치, 간접 지배, 고구려인 정착 유무 또한 가려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