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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59세에 죽었다. 태어나서 일만 실컷 하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너무 일찍 죽었다고 유가족들이 안타까워 데굴데굴 구른다. 옆을 바라보며 동행자에게 웃어줄 겨를도 없이, 본인과 이웃을 채찍질만 하다 죽었다. 감사도 사랑도 시도해 보거나 경험해 보지 못했다. 힘겹게 가난을 퇴치한 후, 이제 옆 사람에게 농담 좀 한마디 해볼까 하고 맘먹었으나, 암이란 강자가 그의 생각을 밀쳐내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버거운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을 때도 힘들게 죽었다.
정정하던 어떤이는 89세에 갑자기 죽었다. 환한 웃음을 달고 다니던 그는 손자들과 잔디밭에서 쉬기도 하고,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창조주의 솜씨를 구석구석 감상하고 찬양하다가 갔다. 늙은 육체로 살기가 힘드니, 영으로 살라면서 주가 부르시니까, 감사기도를 드리며 편안하게 떠나갔다. 이 세상의 삶보다 더 좋은 삶을 누리려, 더 풍요로운 곳으로 옮겨갔다. 최후까지 아쉬움 한 점 없는 만족한 삶이었다고 모두 부러워한다.
태양 자체가 엄청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학설이 있다. 광속만큼 빠르지는 않더라도 천문학적 속도로 태양이 무한대 속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 경우, 광속으로 달린다면 비행체의 시간이 제로가 되고 질량이 무한대로 되니, 더 복잡한 요인이 끼어들게 된다. 그러니 광속과 비슷하다고만 생각해 본다. 그 달리는 태양 주위를 8개의 행성이 공전하며 이동하고, 또 수많은 위성들은 그 행성들을 따라 돌면서 전진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뿐만 아니라, 수억의 다른 태양계 내지 은하계가 수백억 년 동안 퍼져나가며 달리는 중이다. 우주 밖에서 본다면, 이 광경은 빅뱅의 진행과정 같이 장관일 것이다. 아크용접 불똥을 천문학적 숫자로 확대하고, 그 시간을 고차원적 시간으로 연장해 놓으면 이 모습과 비슷할 성싶다. 이러한 엄청난 움직임을 우리는 신경도 안 쓰면서 살다 죽는다. 인간은 짧은 기간 동안 살다가 죽으니, 태양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고 행성만 도는 것으로 알다 죽는 것이다.
인생 80년을 사는 동안 처음과 나중이 큰 차이가 난다. 볏짚 깔린 초가집의 안방에서 태어난 아기가 늙어 죽을 때는 어떤가? 컴퓨터 화면으로 신체의 각 기관 활동상태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병원의 자동침대에서 죽는다. 환경뿐이 아니다. 사물을 받아들이는 사고에도 큰 차이가 난다. 어서 세상으로 나가 잘 살라고 삼신할머니가 엉덩이를 찰싹 때려서 태어난 아기가, 죽을 땐 인생을 총괄하는 만유의 주 하나님께로 들어간다. 잘 모르겠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하며 쫓아가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자기 손금 보듯 하나님을 확실히 보면서 쫓아간다. 어떻게 쫓아가든 생판 남남이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내 영혼을 송두리째 맡긴다니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어떻게 아담이 930년 동안이나 살 수 있었을까? 수수께끼 같지만 당연한 결과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만 신경 쓰면 됐던 그때 아담은 얼마나 살기 쉬웠으랴? 일할 필요도 없고 거룩한 목청으로 기도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 달콤한 과일!” 하면, 데이트나무가 생기고, “약간 새큼하고도 향긋한 열매요,” 하면 하나님이 금방 빨갛게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를 주신다. 하나님이 원해서 만들어 놓으신 인간이니, 마음껏 어리광 피워도 된다. 약간 버릇없는 응석받이가 되어도 허용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되는대로 강짜를 부려도 용납이 된다. 생전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고, 신나게 뛰놀기만 하면 된다. 입 벌린 사자의 이빨 만지며 놀다가 지루하면, 코뿔소 뿔을 타고 시소놀이하며 놀아도 된다. 못생긴 동물을 ‘쩍벌이’라고 부르기 싫으면 ‘하마’라고 부르면 된다. 자기가 부르는 대로 동물의 이름이 되었으니 얼마나 흥미진진했으랴?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도 전혀 없다. 아무리 마누라를 소홀하게 대해도, 뚜렷이 갈 데가 없었던 이브는 또 다시 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매일매일 신나는 일뿐이고 맛있는 음식투성이니, 아담이 오래 살 수밖에 더 있으랴? 이 세상의 온갖 동식물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땅과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이 내 배경을 튼튼하게 지켜 주시니, 얼마나 살맛났으랴? 이제 세상은 엄청 바뀌었다. 요즘 같이 하나님이 옆집만 축복해 주시고 나는 모르는 척한다면, 몸속에 콜레스테롤이 쌓일 수밖에 없고, 성인병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진화론자가 말하는 유인원은 어땠을까? 초창기 인간은 대부분 기다가 가끔은 일어나 걷기도 하고, 꼬리도 3인치 정도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동물이 털은 홀딱 빠지고 꼬리는 완전 퇴화하여, 나로 변했다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 그만큼 많은 변화가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겠는가?
더욱이 앞으로 삼천 년 후 여섯 번째 밀레니엄 시대에, 인간에게 있을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바라다보면 그 변화는 더 놀랍다.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나 다시 천년수명을 누리게 될 것이 뻔하다. 예수님 시절이나 지금이나 항상 팽배해 왔듯이, ‘말세’라는 말은 그때가 되어도 역시 지금처럼 여러 사람 입을 오르내릴 것이다. 사람이 개인 타임머신을 타고 훌떡 목성에 들렀다가 ‘글리세 1214b 별’에서 저녁 먹고 지구로 되돌아와 아내와 TV를 본다. 우주선이 아니고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왔으니 지구에 남아있던 아내도 늙어죽지 않고 여전히 젊은 그대로다. 25대조 할아버지의 869회 결혼기념일 파티를 성층권에 떠있는 ‘승천쉼터 별장’에서 치른다. 영식이 32대조 할머니의 9th Centennial Birthday (9번째 백주년 생신) 대잔치를 민다나오 바다 밑에 있는 ‘거북 수중공원의 용궁식당’에서 개최한다. 32대를 내려오도록 행렬이 서로 다른 많은 손자들을 둔 영식이 할머니다. 그 할머니는 영식이가 그녀의 친손자인지 친척뻘 되는 손자인지 알지도 못하고, 32대손자인지 29대손자인지도 헷갈린다. 그 할머니는 900살까지 살았는데도,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다고 눈치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내가 낳은 자식들만 해도 백여 명이니 자녀들을 모두 모아놓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수는 없다. 내가 낳은 자식의 이름도 모두 기억을 못하는데, 그들이 어느 국가에 살고 있는지, 지금 어느 별나라를 여행 중인지 어떻게 알고 있으랴? 그러니 손자 이름까지 외우는 할아버지는 ‘별걸 다 기억하는 영감’이 될 것이다. 오래 사는 만큼 인간의 숫자도 늘어날 것이니, 지구에서 모두가 살아갈 수는 없다. 수금지화목토천해의 환경을 개조하여 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은하계로까지 퍼져나가 살아야 됨은 당연하다. 지구와 환경이 비슷하다는 ‘케플러 22b 별’이나 ‘타우 세티 e 별’은 부동산업자들이 땅을 사고팔 때, 값을 비싸게 받을 것이다. 노른자위 땅이라고 부르며 유세부리게 될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앞으로 인간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성 발달하여, 사람이 새처럼 날게 될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너무 엄청나니까 접어 두자. 사람이 지금보다 더 진화하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 많으랴? 남자 앞가슴의 털이나 팔다리의 털까지 몽땅 퇴화하고, 체모라고는 머리칼과 눈썹만 남을 테니 얼마나 어색하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을 두기 위해, 남자의 코밑과 턱에는 수염이 남겠지만, 메기수염처럼 두세 가닥의 털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스러우랴? 더욱이 지금도 기러기 부부가 많은데, 만약 사람이 날개를 갖게 되면, 철새 부부는 또 얼마나 많아지랴?
인류창조의 역사가 10만년이라고 주장해도, 인류의 진화기간이 수백억년이라고 우겨도, 그 역사는 영겁에 가까운 우주시간으로 보면 모두 순간이다. 지구 생성 이전인 태초에서부터, 앞으로 사람이 귀신으로 바뀔 만큼 긴 세월 후까지 합친 기간도, 우주시간으로 보면 역시 똑같이 순간이다. 이런 유한시간들은 모두 무한대의 시간 선상에 있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 인생 80년 동안은 얼마나 짧으며, 우리 평생에 생기는 변화는 얼마나 미세하랴? 우리가 나서 죽을 때까지 느껴지는 거대한 변화는 우리의 보는 눈이 가깝기 때문이다. 좀 떨어져서 인생을 바라보면 그 차이는 구분도 안 될 만큼 작다. 거기에 조금 더 떨어져서 건너다보면 모든 인생은 차이가 전혀 없는 하나의 점이다. 똑 같은 하나의 점에 해당한다면 어떻게 늦음과 이름을 구분하며 생애의 길고 짧음을 견주랴? 또 고생하면서 살았건 얼결에 호화롭게 살았건,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어떤 것이 만족한 삶이며, 어떤 인생이 억울하다고 우열을 따지랴? 똑같은 점 위에서 짧은 순간을 살고 사라지는 우리 인생인데, 차이를 찾으려 드는 것이 더 어리석다. 어차피 한 점 찍고 가는 삶, 멀리서 바라보며 살았으면 좋겠다. 우주 움직임의 한쪽 구석도 파악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인생인데, 인류의 조상처럼 여유를 두고 좀 즐겁게 살고 싶다.
직진하려다가 별안간 왼쪽깜빡이 켜며 선 앞차 운전자를 죽이려고 미워할 것도 없다. 내가 인사할 때 모른척했었던 목사사모를 비웃어 주려고 신경 바짝 쓰며 벼를 필요가 뭐 있으랴? 60살에 죽었다고 “아아 안 됐다” 할 것도 없고, 몇 년 더 살고 90살에 죽었다고 “어어 괜찮은데” 하며 좋아할 것도 없다.
1). 순수문학 소설 당선으로 등단(2006년)
2).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공모 소설당선(2007년)
3). 한국산문 수필공모 당선(2010년)
4). 경희 해외동포 소설 우수상(2010년)
5). 서울 문예창작 소설 금상(2013년)
6). 재외동포 소설 우수상(2014년)
7). Chicago Writers Series에 초청되어 소설 발표 Event 개최(2016년)
8). 국제 PEN 한국 해외작가상(2016년)
9). 해외 한국소설 작가상(2023년)
10). 제 4회 독서대전 독후감 공모 선정 소설(2023)
11). 한국문협 회원, 국제 PEN회원, 한국 소설가 중앙위원
12). 시카고 문인회장 역임.
13). 시카고 문화회관 문창교실 Instructor
14). 현 미주문협 이사
저서: 단편소설집---“발목 잡힌 새는 하늘을 본다” “소자들의 병신춤” “달 속에 박힌 아방궁”
중편소설집---“나비는 단풍잎 밑에서 봄을 부른다”
수필집---“여름 겨울 없이 추운 사나이”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눈물 타임스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