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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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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도 덧붙이고 싶은 과거사가 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근무를 할 때이다. 야간 당직을 하는데 부산역 광장 근처에 있는 안내소(자세한 명칭은 오래되어 알 수가 없음)로부터 부랑아를 수용해 달라는 전화가 왔었다. 나로서는 공식적인 요청이라 거절을 할 수가 없어 운전기사와 짚차를 가지고 현장으로 갔었다.
그곳에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시골에서 갓 올라왔거나, 아니면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사람으로 보였었다. 그런데 안내소의 여자 상담원은 다짜고짜로 그 사내를 수용소(형제복지원)에다 수용해 달라는 것이었었다.
당시 나의 육안으로는 그렇게 그 사내가 배우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인상은 풍겨도 그렇게 불량스럽게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근무자더러 그냥 잘 타이르고 가게하면 어떻겠느냐? 고 하였더니 한마디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그들의 근무수칙에 의하여 움직여야 하고 한편으론 그것도 실적이라면 실적일 텐데 내 기분대로 공무를 처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사내를 수용하고 안하고는 오로지 그녀가 속한 기관의 책임이고 나로서는 그들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내를 태우고 형제복지원을 향했다. 사내는 순순히 차에 올라 그곳을 향하여 가면서 나더러 자신을 놓아주면 안 되겠느냐? 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경험은 없다 하더라도 악명 높은 형제복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느껴졌었다. 그러나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에게 의뢰한 기관에서 기록을 가지고 수용여부를 확인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내를 벗어나 조금은 한적한 곳에 이르러 철길을 건넜다. 사실 나도 먼발치에서만 그곳을 보아왔지 실제로 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간의 비탈진 좁은 도로를 올라가니 마치 교도소와 같은 높은 울타리에 둘러싸인 건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정문은 건장한 두 명의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우리를 태운 차가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정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지 건장한 사내 서너 명이 달려 나와 나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우리가 데려간 그 사내를 양팔을 움켜잡고 총총히 안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에게 끌려 들어가며 나를 돌아보는 사내의 슬픈 눈초리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아팠었다. 마치 영화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 단두대의 칼날아래 자신의 목을 맡긴 알랑들롱의 슬픈 눈초리와도 같아 보였었다. 누구를 원망하는건지,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곳의 야간 근무책임자에게 신상을 인계하면서 가족사항을 파악하여 빠른 시일 내에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라고 부탁을 하고 그곳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동안 형제복지원에 대한 일을 잊고 살아왔다. 그러나 1987년엔가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나는 과거에 내가 관여 하였던 일이어서 또 한번 마음이 아픔을 격어야 했다.
그외에도 내가 겪은 유사한 사건이 있었고, 젊은 시절 내가 인생의 진로를 바꾸려고 두어번 결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솔직히 내가 직장생활에서 의욕을 잃고 있는 것도 우리사회가 그러한 약자에 대한 배려에 너무나 인색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있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카페지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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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00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 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1987년에 형제복지원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복지 시설을 운영하는 개인의 비리 행위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그 옛날 내 기억에서도 그랬다. 형사법을 전공한 학자로 대학 강단에 선 이후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하여 '법령에 근거한 적법한 감금'이라고 했던 1988년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학생들에게 언급하는 대목에서 과거의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곤 했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은 과거의 인권 침해 사건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현재적 문제로 조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이미 앞서 게재된 여러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1975년에 제정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가 당시 부랑인 단속과 강제 수용의 유일한 근거였다.
전두환 정권은 그 훈령을 폐지하고 부랑인 수용 시설의 관리를 보건사회부로 이관하면서 '부랑인 선도 시설 운영 규정'이라는 새로운 훈령을 만들었지만, 부랑인 강제 수용 정책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70~1980년대에 부랑인, 걸인, 앵벌이를 비롯하여 거리에서 노점 행상을 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사회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단속은 시설 수용으로 이어졌다. 이름은 복지 시설이었지만, 실상은 부랑인 등을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 내지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고 그들을 강제로 구금하는 수용소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강제 수용소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는 앞서 연재된 글에서 충분히 드러났기에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윤 창출을 위한 규율 통치자본주의 국가의 규율 통치는 언제나 자본의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일정 부류의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관리·배제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을 가동한다.
범죄 통제는 그 대표적인 시스템인데, 배제와 감시의 전략은 범죄 통제의 영역을 넘어서서 여러 가지 다른 이름, 특히 복지 정책의 이름으로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정신 질환자를 강제 수용하는 정신병원 등의 시설, 부랑인과 노숙자 등을 수용하는 시설, 장애인 수용 시설 등은 서로 다른 법적 근거를 가지고 각기 다른 영역에서 작동한다.
그렇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반사회적 위험성을 지닌 집단'을 감시하고 거리에서 추방하는 것이다.이런 규율 통치 전략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반인권적으로 자행되는지는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미국 등의 역사에서 볼 때, 지배 권력의 정치경제적 정당성이 취약할수록 극단적인 강제 수용 정책이 등장하였다.
형제복지원과 같은 강제 수용 정책뿐만 아니라 삼청교육대도 같은 맥락이었다. 1980년 5월 비상계엄 직후인 1980년 8월 4일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계엄포고령 13호, 19호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사회악 일소 특별 조치"로 "삼청 5호 계획"을 진행하였다.
삼청교육대는 사회 정화라는 기치 아래 전과자와 폭력배를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실시되었다. 당시에 영장도 없이 군경에 검거되어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시민은 6만 명을 넘었고, 1988년 국회의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에 의하면 삼청교육대 현장 사망자가 52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 2678명이었다고 한다. 1981년 1월 비상계엄이 해제되었지만 이들 중 7478명은 당시 새로 제정된 사회보호법에 따라 보호 감호소에 계속 수용되었다.
전과가 없어도 불심검문에서 단지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곤 하였다.이런 적나라한 인권 침해 사건은 분명 국가 범죄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분명 청산되어야 하지만 아직 청산되지 못했고, 그 진실을 규명해야 할 과제가 지금도 유효한, 그런 국가 범죄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박정희와 전두환이 사회 정화의 기치를 내걸고 사회악 일소라는 명분하에 부랑인, 걸인 등을 강제 수용하였던 정책은 단지 과거의 정책이 아니다. 약간 세련되고 순화된 모습이긴 하지만, 부랑인 단속과 시설 수용 정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국가 통치 전략을 이루고 있다.
구걸 행위 처벌 조항과 길들이기 전략경범죄처벌법으로 눈을 돌려보자. 2012년 3월 21일 경범죄처벌법이 개정되면서 구걸 행위 처벌 조항이 신설되었다. 일제시대의 '경찰범처벌규칙'에는 구걸 행위의 처벌 조항이 있었지만, 1954년 경범죄처벌법 제정 당시에 이 규정은 도입되지 않았다.
당시에 "걸인의 생계를 도모해주지 않고 구걸하는 사람을 취체(取締, 단속)의 대상에 넣는다는 것은 인권 옹호에 모순"이라는 이유로 삭제되었던 구걸 행위 처벌 규정이 60년 만에 부활한 것이다.물론 법 규정을 보면, "공공장소에서 구걸을 하여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구걸 행위 자체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 듯 보인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검토보고서에 의하면, 단순 구걸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적이거나 무례한 방법에 의한 구걸 행위나 집요한 구걸 행위만이 처벌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그러나 '통행 방해'라든가 '귀찮게 한다.'는 규정의 모호함으로 인하여 실제로는 구걸 행위 자체가 단속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도로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에도 '통행 방해'라는 이유로 무차별적인 단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2012년 경범죄처벌법 개정에서는 역이나 열차 내에서 이뤄지는 질서 위반 행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철도특별사법경찰대장'에게도 경범죄 단속 권한을 부여하였다. 결국 구걸 행위 처벌 규정은 부랑인, 노숙자 등을 범죄화하는 정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경범죄처벌법은 '기초 질서 확립', '사회악 일소'라는 지배 권력의 명분을 실천하는 가장 밑바탕을 구성하는 법이다. 그래서 경범죄 단속은 언제나 정권 출범 초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져왔다. 김영삼 정부 첫해인 1993년과 이듬해인 1994년에 범칙금 통고 처분 건수는 각각 334만 건, 368만 건을 기록했다.
1992년에 48만 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단속 수치이다. 2006년과 2007년에 10만 건 미만이었던 단속 건수가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2008년에는 30여만 건으로 급증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소위 '법질서 정책'을 매우 강력하게 표방한 바 있다. 그는 "경제를 살려 일류 국가로 나가겠습니다."라는 슬로건으로 경제 성장, 서민 생활 안정, 국민 세금 절감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천 방안으로 특히 '법이 지배하는 일류 국가 건설'을 강하게 언급하였다.
그동안 공공질서 파괴 행위에 대한 엄정한 대처가 없어 불법 시위로 인한 연간 사회 비용이 12조3190억 원(GDP의 1.53%)에 달하고, 교통사고(9조1220억 원, GDP의 1.1%), 산업 재해 비용(15조1288억 원, GDP의 1.8%) 등 사회 무질서로 인한 사회 비용이 매년 증가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실정법을 무시하고 소위 '떼법', '정서법'이 우선시되어 이해관계의 갈등을 대화가 아닌 물리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팽배하여 있다고 진단하면서 기초 질서 확립을 중요한 국정 과제로 강조하였다.(생략)
(기사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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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인간이 만든 지옥, 형제복지원
만약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채, 낯선 곳으로 끌려가서 감금된다고 생각해보라. 거기에 수천 명의 사람이 당신처럼 끌려와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면 어떻겠는가? 날마다 구타와 폭행, 심지어 강간과 살인까지 일상이 돼버린 곳이라면 당신은 그곳을 뭐라고 부르겠는가?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병이 들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결정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절대 없다면? 탈출하다 잡히면 죽을 때까지 맞다가 결국 죽어야 하는 곳이라면? 그렇다. 당신은 아마 그런 곳을 '지옥'이라고 부를 것이다.
가장 끔찍한 지옥은 신이 마련하지 않고 인간이 만든다. 인간의 악마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 지옥의 이름은 '형제복지원'이다. 얼마나 긍휼한 이름인가. 오갈 곳 없는 이들, 몸과 마음이 불편한 이들을 형제처럼 여기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곳. 그러나 실상은 이 이름과 너무나 달랐다.
지옥에서 생환한 자의 목소리
전00이 기획하고, 한00·전00·박00이 나눠 쓴 <살아남은 아이>는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에서 생환한 한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한00이다. 1975년생인 그는 1984년 늦은 밤, 작은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간다. 놀랍게도 9살짜리 아이를 그 생지옥에 인계한 것은 동네 파출소의 경찰이었고, 그를 파출소에 데려간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생계가 어려운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자의로 형제복지원에 입소시켰다.
그의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이 생지옥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장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듯이 그렇게 형제복지원에 아이를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00의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에 수용된다. 결과적으로 한00의 가족은 형제복지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198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한00과 그의 어린 누이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 감금되었고, 구타와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나마 한00은 이렇게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쓸 만큼 멀쩡한 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의 누이와 아버지는 다섯 살짜리 지능의 정신병자가 되어 또다시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고 있다.
3년의 세월 동안 한 가족이 풍비박산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도 그들은 천형처럼 형제복지원의 그늘에서 인생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건을 너무 축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는 한00과 그의 가족뿐만이 아니니까.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수용되어 있었고, 5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그 안에서 죽었다. 이 수백 명은 맞아 죽었고, 치료를 못 받아 죽었고, 영양실조로 죽었으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피해자의 고통은 영원한데 가해자는 잘살고 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만약 당신이 이런 끔찍한 사건을 겪었는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겠는가?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고, 불구로 만들고, 성폭력을 휘두르고, 횡령을 일삼은 겉은 인면수심의 범죄 수괴가 고작 2년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와서 다시 사회복지계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면? 한00과 그의 가족은 아무런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고,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을 설계하고 운영한 박00은 짧은 징역을 살고 나와 부산에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고 수백 년 전의 사건도 아니다. 피해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고 가해자가 복지재벌로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한00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 때 너무나 억울해서 국회 앞에서 무작정 1인 시위를 했다. 그러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이자 문화연구자인 전규찬 교수를 만났다. 전00 교수는 한00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고, 한00은 무작정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1인 시위 대신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전00 교수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목소리를 내고, 그만의 언어를 찾는 것을 도왔다. 거기에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다른 복지원들의 사례를 첨부하고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글을 더해 <살아남은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실은 수용소인 복지시설에 관한 문화연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권유린에 대한 역사적 이해로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 모두 형제복지원과 그것이 상징하는 야만성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를 함께 치유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또 하나. 솜방망이 처벌 끝에 다시 사회에 나와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면서 제 욕심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복지재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져야 한다.
또 다른 지옥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할 일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00은 이제 서른아홉 살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또 어떤 복지원에서 이런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지 않을까 걱정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여전히 찬물로 샤워를 못하고, 밤에 불을 끄면 잠을 자지 못한다. 모두 복지원에서 당한 일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물고문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을 일삼은 자들은 어딘가에서 편하게 잘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은가.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한00의 증언을 듣는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그 외면하고 싶은 지옥을 먼저 똑똑히 보자. 그다음에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형제복지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거기에 수용된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형제복지원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인간이 만든 지옥을 한번 보라. 그 지옥을 만드는 데 침묵하는 방관자들도 한 몫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부제는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이다.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