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덕 蔡相悳 (1862∼1925)】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개척자 "채상덕 선생"
1862년경 황해도에서 태어난 것으로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명은 채상덕(蔡相德, 또는 蔡尙悳), 호로 심호(深湖)를 사용하였다.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3 ・ 1운동 이후 독립군단이 재정비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 동참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소속된 단체 등은 알 수 없다.
남만주지역의 한인사회는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과 1921년의 자유시참변을 겪으며 질서가 붕괴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보민회(保民會)나 민회(民會) 등의 친일어용조직을 파괴하고 1922년경 독립운동기지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양대 참변을 극복하고 재기한 서로군정서 ・ 대한독립단 등의 독립군은 과거의 게릴라전식 투쟁을 청산하고 여러 단체를 합하여 공동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2년 1월경, 당시 서간도지역의 가장 큰 항일투쟁 단체인 한족회(韓族會) 등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결성하였는데, 서간도지역 무장투쟁계의 중추로 인정되어 대표인 총장에 선임되었다. 그외 비서장 고할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군사부장 이천민(李天民), 교육부장 김동삼(金東三),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경무관 전덕원(全德元),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다. 대한통군부 간부들은 대개 서로 군정서와 대한독립단 간부들로 구성되었다. 대한통군부는 군사뿐만 아니라 한인의 자치행정을 담당한 군정부의 성격을 지닌다. 군정부로서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호적 ・ 교통 ・ 학교 ・ 실업 ・ 의무병 ・ 재정 ・ 구휼 등의 사항을 결의, 한인사회 내부 결속을 도모하며 무장투쟁에 대비하였다.
1922년 6월 3일, 대한통군부는 문호를 대개방하고 각 다른 기관과 더불어 무조건으로 통일하되 일체 공결(公決)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천명하며, 통합 단체에의 가입을 권유하였다. 8월 23일, 환런현(桓仁縣) 마권자에 서로군정서 ・ 대한독립단 ・ 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 ・ 대한광복군영 ・ 대한정의군영 ・ 대한광복군총영 ・ 평안북도독판부 등 이른바 8단 9회 대표 71명이 모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통의부의 총장 김동삼(金東三)에 이어 부총장에 선임되었다. 그 외 비서과장 고할신, 민사부장 이웅해,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교섭부장 김승만,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실업부장 변창근, 군사부장 양규열(梁奎烈), 참모부장 이천민, 사령장 김창환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대한통군부에서 대한통의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간부간의 정체 이념과 권력 분배를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발생하였다. 즉, 전덕원 등 복벽계가 중앙부서 간부에서 배제되고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간부 등 공화주의 계열이 다수 간부로 선임된 것이다. 이에 의병계열의 추앙을 받고 있던 전덕원과, 청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던 양기탁의 불화가 표출되었다. 급기야는 1922년 10월 14일, 관덴현(寬甸縣)에 있던 양기탁 일행을 전덕원계 군인들이 습격하여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를 사살하고 양기탁 ・ 고할신 ・ 현정경 등 주요 간부를 포박하여 구타하는 이른바 '서간도사변(西間島事變)'이 일어났다. 이 불상사의 발단은 전덕원이 요직에서 배제된 데 대한 복벽계 군인들의 불만 표출에서 비롯된 것이나, 지도부 상층부간의 이념 대립이 근본적 원인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당사자인 전덕원과 양기탁이 원만한 해결에 노력하였고, 상하이(上海)에서도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남만동지에게 충고하는 편지(忠告南滿同志書)」라는 편지와 전보 등을 보내 양측의 화해를 권유하여 무마하고자 하였다. 당시 총장대리직을 맡고 있었는데, 전덕원계 제1중대장 박일초(朴日楚)가 그에게 양기탁 등 9인의 '범죄사실 심판요구 28개항'을 제출하였다.
'서간도사변'을 전후한 시기, 전덕원 지지자 중 일부가 통의부 의용군에 편성되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하다가 1923년 2월경, 독자 노선을 천명하고 대한통의부로부터 이탈하여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였다. 대한의군부는 박장호를 총재로 하였는데, 채상덕을 부총재에 추대하였으나 이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 박일초, 조대능(趙大能), 성보운(成寶運), 계담(桂聃), 이병규, 한정윤(韓鼎潤), 전덕원, 김유성(金有聲) 등이 간부로 선임되었고, 군무부장 전덕원 휘하에 사령장은 통의부 제5중대장이었던 김명봉(金鳴鳳)이 맡고 있었다. 대한의군부는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충의를 계승함을 천명하고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하는 등 의병의 복벽주의적 민족주의의 전통을 따르고자 하였다. 의군부는 통의부를 적대시하고 대립하였다. 그런데 1924년 현재 일제측 기록에 의하면, 의군부는 통의부에 비해 군사 규모나 무장상태 등에서 절대적 열세였다.
대한의군부의 이탈과 분립 이후, 통의부 의용군은 제1중대장 백광운 등이 나서 임시정부와 협의를 진행하였다. 결과, 1924년 4월 남만주지역 군인 대표 78명이 서명한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들은 선언서에서 '전 민족의 대동 통일적 최고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로 모일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만육군참의부(駐滿陸軍參議府, 이하 참의부로 약칭)가 조직되었다. 결국 대한통의부의 1차 분열로 대한의군부가 이탈하였다면, 2차 분열로 참의부가 이탈하였던 것이다.
제자 이수흥(李壽興)과 함께 대한통의부에서 이탈한 참의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5년 2월 25일,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등 수많은 독립군이 일경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는 이른바 '고마령참변(古馬嶺慘變)'이 발생하였다. 당시 최석순은 부대원을 이끌고 압록강에서 60여리 떨어진 안전한 산악지대인 지안현(輯安縣) 고마령으로 이동하였다. 최석순은 이곳에서 5개 중대의 군사회의를 열었다. 전창희(田昌禧) ・ 최항신(崔恒信) 등 60여 명이 참석하여 5~6일간 회의가 계속되었다. 이때 이 정보를 입수한 조선총독부는 초산수비대 120여명과, 경찰대 65명을 합동 출동시켜 이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자 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월경할 경우 국제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압록강 북안에 대기하였고, 한국인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 등 경찰대가 6개 분대로 나뉘어 2월 24일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25일 새벽 1시경, 회의 장소를 급습하였다. 일본 경찰은 먼저 고마령 골짜기에 있는 참의부 통신기관장 김명준(金明俊)을 체포 ・ 고문하여 회의 장소를 급습하였다. 고마령 정상부에 있는 두집에서 회의를 진행하던 참의부원은 첫 번째 집을 급습당하여 6명의 대원이 전사하였다. 이어 일경은 두 번째 집을 포위 공격하였다. 제2중대장 최석순은 소대장 전창희 ・ 최항신 등과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 경찰 경부보 미즈노와 순사부장 고피득을 상대로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석순을 비롯하여 수 많은 참의부 독립군이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 순국한 참의부 독립군 숫자에 대해 일제는 42명으로, 『독립신문』은 22명으로 기록하였다. '고마령참변'은 참의부는 물론 만주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참사로서, 참의부를 이끌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전사함으로써 전력에 일대 타격을 입었다.
고마령회의장에서 총상을 입은 채 부상당한 동지와 현장을 탈출한 이수흥으로부터 '고마령참변'의 비보를 듣고 눈물과 한숨으로 지냈다. 이수흥이 완쾌되자 '조선인은 단체적 훈련의 부족과 배반자의 속출로 단체적 행동'은 할 수 없는 결함이 있으므로, 안중근처럼 단독으로 거사를 하도록 당부하였다. 또한 이수흥에게 퉁화현(通化縣) 이도구(二道溝) 회당촌(會堂村) 김운용(金雲用)의 집에 자신이 맡겨둔 권총 2정을 찾아 투쟁에 사용하라고 말하였다.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혼자 살 면목이 없다면서 음독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