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의 역사는 고구려와 발해역사의 계승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금지(金志)
(元)宇文懋昭 撰 (원나라때 우문무소가
씀)
●初兴本末
金国本名朱里真,蕃语舌音讹为女真,或曰虑真,避契丹兴宗名,又曰女直。肃慎氏遗种,渤海之别族也。或曰,三韩辰之役拿氏于此地中最微且贱。唐贞观中,靺鞨来中国,始闻女真之名,世居混同江之东,长白山下
금나라는 본명이 주리진이다. 번어설음으로는 여진 혹은 려진이라고 하고 거란흥종의 이름을 피해 여직이라고 하기도 한다. 숙신씨의
후손이며 발해에서 갈라진 부족이다. 혹은 삼한중 진한의 역나씨가 이곳에서 가장 약하고 천하다고 한다. (?)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 有黑水靺鞨、栗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為渤海,稱王,傳十餘世。有文字、禮樂、官府、制度。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黑水靺鞨居肅慎地,東瀕海,南接高麗,亦附於高麗。嘗以兵十五萬眾助高麗拒唐太宗,敗于安市。開元中,來朝,置黑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置長史監之。賜都督姓李氏,名獻誠,領黑水經略使。其後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於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
금사
금의
선조는 말갈씨이다 중략 당나라초기에 흑수말갈,속말말갈,그 오부는 소식을 모른다..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처음에 속해 있었다.성이 대씨라고 한다.
이세적이 고구려를 이기자 속말말갈은 동모산으로 가서 후에 발해라고 했다. 왕을 칭하며 십여대를 전했다. 문자 예악 관부 제도가 있고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
흑수말갈은
숙신의 땅에 거했다. 동으로 바다에 가깝고 남으로 고구려에 접했다. 역시 고구려에 속해있었다. 고구려가 당태종과 싸울때 15만을 내어 도왔으나
안시에서 패했다. 중략 후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흑수말갈이 속하여 병역을 이행했다. (사병이 되었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裏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裏居耶懶。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蓋自謂阿古乃之後。石土門、迪古乃,保活裏之裔也。及太祖敗遼兵於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斡荅刺招諭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始祖至完顏部,居久之,其部人嘗殺它族之人,由是兩族交惡,哄鬥不能解。完顏部人謂始祖曰:「若能為部人解此怨,使兩族不相殺,部有賢女,年六十而未嫁,當以相配,仍為同部。」始祖曰:「諾。」乃自往諭之曰:「殺一人而鬥不解,損傷益多。曷若止誅首亂者一人,部內以物納償汝,可以無鬥,而且獲利焉。」怨家從之。乃為約曰:「凡有殺傷人者,征其家人口一、馬十偶、牸牛十、黃金六兩,與所殺傷之家,即兩解,不得私鬥。」曰:「謹如約。」女直之俗,殺人償馬牛三十,自此始。既備償如約,部眾信服之,謝以青牛一,並許歸六十之婦。始祖乃以青牛為聘禮而納之,並得其貲產。後生二男,長曰烏魯,次曰斡魯,一女曰注思板,遂為完顏部人。天會十四年,追諡景元皇帝,廟號始祖。皇統四年,號其藏曰光陵。五年,增諡始祖懿憲景元皇帝。
금사
금의
시조는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 중략 태조아구타가 요나라병사를 깨뜨리자 야율사십을 포로로 잡고 량복을 사신으로 보내어 알답라에게 발해인을
타일러 부르게 하면서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일가이다라고 했다.
금나라에
대한 원나라의 평가는 금나라황제는 고려출신이며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부족은 본래 발해와 같은 일가이며 발해에서 갈라진 족속이다. 고구려때는
고구려의 일원이었으며 삼한중 진한의 역나씨와 관계있다고 했다. 결국 어느 구절에서도 한족과 관련된 것이 없다. 즉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고구려의 후손이며 발해의 후손이며 왕은 고려사람이었으니 우리 민족 즉 동국의 역사에 넣어야 한다.
뿔달린
고구려의 투구는 발해가 계승하고 이후 금나라도 계승했다.
왜란당시
조선군군복
청나라
팔기군 군복
조선군과 색깔
투구 모양까지 거의 동일하다.
칭기즈칸
군대의 군복
조선군
팔기군과 무엇이 다른가?
투구위로
솟아오른 뾰족한 모습이나 여러가지 색깔별로 군복을 달리한점 모두 조선군 팔기군과 동일하다.
태조
이성계는 합란부 여진족출신이지만 타타르땅에 가까워서 사실 타타르계 여진족이다. 그의 선조의 무덤은 실록에 타타르마을에 있다고 써있다. 즉 태조는
몽골군복을 따라한 것이다. 몽골은 당나라기록에 부여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결국 몽골군복의 기원은 부여에서 찾아야 한다. 고구려가 부여의 계승자임을
천명했으니 역시 고구려도 부여군복의 영향을 조금은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에도 색깔별로 군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붉은색 갑옷을
입은군대가 제일 강력했다고 하니 색깔별로 다양한 몽골군복역시 고구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거란군으로 철갑기병은 고구려와 유사하고 투구는 몽골군과 유사하다. 거란의 후손이 몽골이라는 기록도 있으니 유사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