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 오는 날에 // 조지훈
검정 수목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아 입고
창에 기대면
박넌출 상기 남은
기울은 울타리 위로 장독대 위로
새하얀 눈이
나려 쌓인다
홀로 지니던 값진 보람과
빛나는 자랑을 모조리 불사르고
소솔한 바람 속에
낙엽처럼 무념히 썩어 가면은
이허망한 시공時空 위에
내 외로운 영혼 가까이
꽃다발처럼 꽃다발처럼
하이얀 눈발이
나리 쌓인다
마음 이리 고요한 날은
아련히 들려오는
서라벌 천년의 풀피리 소리
비애로 하여 내 혼이 야위기에는
절망이란 오히려
나리는 눈처럼 포근하고나.
◐ 조지훈 시집 『승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