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리더십 탐구- 정몽구회장(1)"
구본무 LG 회장과 현대차 사장들이 화장실 앞에서 맞절한 사연
주룽지 총리를 코너로 몰아붙여 베이징현대 공장 인가 따내다
#1.
2002년 3월 베이징 한·중 경제포럼 행사장
한국 재계 대표단이 주룽지(朱鏞基) 총리를 만날 때였다.
재계 총수들이 주 총리에게 간단한 질문이나 인삿말 하는 시간.
갑자기 정몽구 회장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모여 생활하는 극도의 보안 지역인
중난하이(中南海) 내 쯔광거(紫光閣)에서 이루어진 만남.
외국 민간 기업인을 거의 만나주지 않는 주 총리가 주재하는 자리라,
한·중 정부 양쪽 모두 극히 조심스러운 자리였다.
모든 시선이 정 회장 입에 쏠렸다.
정 회장은 주 총리에게 인사말을 전한 뒤
“지난번 드린 에쿠스를 타보시니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순간 사람들은 속으로 경악했다.
“어, 저런 말 해도 되나?” 주 총리가 외국 기업으로부터 ‘선물’ 받은 사실을,
그것도 선물을 한 기업 총수가 공개해버린 것이었다.
주 총리는 당황한 낯빛으로 “집사람이 타고 다니기 때문에
나는 잘 모른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핵심은 정 회장의 다음 발언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베이징에 생산 공장을 짓기 위해 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총리께서 빨리 승인이 나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당시는 현대차 외에 수많은 외국 메이커들이 중국 수도 베이징에
공장 건설 허가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던 때였다.
현대가 진출하면 외국 메이커로는 첫 진출이었다.
주 총리는 정 회장 부탁에 “알겠다. 잘 될 것이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정부는 현대차의 베이징 공장 설립을 승인했다.
사후에 나온 평들이지만 당시 정 회장은 주 총리에게 에쿠스를 선물한 것을 언급해
그를 불편한 상황에 몰아넣은 뒤 자신의 청탁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고단수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승부사적 기질이 대단하다는 감탄들이 뒤따랐다.
#2.
2006년 10월 미국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시
기아자동차의 첫 미국공장 착공식에 한국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착공식에 참석한 정몽구 회장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좀처럼 얘기할 기회를 주지 않아 기자들의 원성이 높아갈 무렵.
갑자기 정 회장이 기자들 쪽으로 오더니,
딱 3분간 얘기를 하고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터뷰라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자들이 묻는 말에
그는 딱 5개의 질문에 포인트만 짚어 답했다.
이후 기자들의 불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짧은 시간에 기사에 쓸만한 얘기만 골라서 정연하게 얘기해줬기 때문이다.
이후 기자들끼리 나온 얘기.
“(정몽구 회장 말하는게) 어눌하다더니, 이게 뭐지?”
#3.
2007년 10월
고(故)노무현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
노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등이
미니 버스 한 대에 웅크리고 앉아 이동했다는 게 화제가 됐던 그 때 얘기다.
빠듯한 공식일정을 마치고, 정몽구 회장과 구본무 회장 일행이
모스크바 시내의 한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됐다.
구 회장이 화장실에 갔다 나오다가, 화장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현대차그룹 사장 몇 명과 마주치게 됐다.
사장들이 구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명함을 주자,
구 회장도 사장들에게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
이 광경을 보던 정몽구 회장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야 이놈들아, 어디서 명함질이야! 당장 회장님한테 절해!”
정 회장의 불호령에 사장들이 식당 화장실 앞에서 구 회장에게 절을 했고,
당황한 구 회장도 현대차 사장들에게 맞절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힘들고 어색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가벼워졌고,
구 회장은 당황하면서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이후 LG에서는 2008년 1월에 나온 초대(初代) 제네시스를 법인차량으로 많이 구매했다.
또 LG화학과 현대차의 하이브리드카 개발 협력 등 양쪽 그룹간의 많은 협력이 시작됐는데,
이날 구회장과 정회장의 만남에서 벌어진 ’해프닝’이
협력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게 업계 관측이다.
위의 3가지 일화는 전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특히 정 회장은 말이 어눌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요.
이 부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현대차그룹의 시무식 같은 행사를 외부인이 보면 깜짝 놀랍니다.
정몽구 회장이 양재동 본사 대강당에 임직원을 모아놓고 신년사를 하는데,
자기회사 연간 판매대수를 600만대라고 하지 않고 6000만대라고 한다거나,
어떤 주어를 써서 말을 시작했는데 목적어, 보어,
서술어가 각기 따로 노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측근들에 따르면, 이게 상황에 따라 아주 달라진다는 겁니다.
일단 보여지는 말이 어눌하다는 것과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딴판이라는 것은 측근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또 저녁에 고위임원들과 술자리를 많이 하는데, 이때 좌중을 압도하며
우스갯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보면 정신이 빠져들 정도라는 겁니다.
‘보이기는 미련한 곰같지만, 머리 속은 천년 묵은 여우’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긴 이건희 회장이나 기획재정부 장관, KDB금융그룹 회장 등을 지낸
강만수씨도 만나본 이들에 따르면 말이 어눌하다는 평가가 있으니까요.
정몽구 회장을 눈 앞에서 오래 지켜봤던 측근들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이 강력한 것은 그가 정말 집과 일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24시간 1주일 내내 현대자동차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또 한번 마음 먹은 것에 대한 집념은 어떤 사람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입니다.
본인이 워낙 열심히 하니까, 지시사항에 대해
강력한 설득력이 생기는 것이겠지요.”(김덕모 전 현대차 부사장)
“2003년 7월이었습니다.
당시 베이징에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베이징의 현대차공장을 방문하기로 돼 있었는데요.
정몽구 회장은 1주일 전에 베이징 공장에 와서 노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일정에 대해
실제로 리허설을 해가며 직접 모든 것을 꼼꼼히 챙기고,
베이징 고위관리들을 만나 사전조율하는 등 만전을 기했습니다.
사스가 베이징에서 크게 창궐하고 있을 때였는데, 현대차그룹 오너가
베이징에 직접 와서 공장을 다니며 발로 뛴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현대차의 직원들, 중국인 관리들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노재만 전 현대차 중국법인 사장)
그러면 왜 어눌해보이는 언어습관을 갖게 됐을까요?
그리고 승부의 순간에 살아나는 그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정몽구 리더십 형성의 중요한 부분에는 아버지 정주영 회장에 대한
존경심과 트라우마가 혼재하고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방치됐다고 볼 수도 있거든요.
그게 아버지 정주영의 교육방식이었을 수 있지만,
정주영은 건설 조선 자동차 등 각종 사업에 몰두하느라
1960년대 말까지 아들 정몽구를 어떤 식으로든 경영교육에
참여시키겠다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정몽구는 30세가 되도록 그룹 내에서 일자리조차 찾지 못한 채
어떻게든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절치부심했죠.
그러나 당시 정주영 가문의 특성상, 아들 정몽구가 아버지 정주영에게
일을 맡겨달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정몽구의 어머니 고(故)변중석 여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정몽구 어머니는 남편인 정주영에게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참다 못해 당시 현대자동차 중역을 찾아가 아들 정몽구의 취직을 부탁합니다.
그 중역이 갑자기 찾아온 정주영 아내의 부탁에 놀랐음은 물론입니다.
다시 말해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경영수업을 받은 게 아니라,
방치된 상태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몽구는 2000년 현대그룹의 경영권 승계구도와 관련한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어떻게든 아버지에게 경영능력을 보여줘 인정받아야 했지요.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아버지 측근들 틈바구니에서
‘튀지 않으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을 체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눌하게 보이는 모습과 순간포착의 승부사 기질이 혼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말 저녁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2세대 제네시스 신차발표회에서
정몽구 회장의 모습은 마치 과거 승부수를 던질 때의 표정 같아 보였습니다.
이번 방향은 현대자동차의 연구개발 부분입니다.
필사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의 현대차 연구개발 부분이 절체절명의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와 정몽구 회장의 이번 승부가 지금까지의 승부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는 이유는 다음 편에 풀어 보겠습니다.
--조선일보 최원석 기자---
[오지(奧地)의 우편배달 30년… 강원 양구 방산우체국 김옥만 집배원]
"내 별명이 '걸어다니는 가계부'..세금내고 등.초본 떼주는 심부름 다 밑아"
"편지를 쓰던 시절에는 제가 가면 몹시 반가워해
지금은 돈 내라는 고지서뿐… 반가워하는 주민들이 없어"
"한번은 마당에서 혼자서 머리 염색하는 할머니 보고
우편물 가방을 내려놓고 대신 염색해준 적도 있어"
찬바람이 생생 불면 아무리 헬멧을 쓰고 목도리를 둘러도 소용이 없어요.
작년에는 4월 말까지 불었어요. 해안면과 펀치볼 구역을 맡았는데
집배원 생활 처음으로 귀가 터 갈라져 피가 났어요."
김옥만(52)씨는 화제의 인물이나 뉴스 메이커도 아니었다.
다만 우정사업본부에 오지(奧地)에서 오래 근무한 집배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그중의 한 명으로 끼여 있었다. 그는 강원도 양구군에서 30년간 집배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내가 읍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의 구역인 방산면에서 배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산면까지 가는 길은 급경사와 굴곡이 심했다.
커브를 돌 때마다 산이 앞을 막아서는 기분이 들었다.
간간이 군용 지프와 트럭만이 오갔다.
방산우체국 앞에서 만난 그는 보안경이 달린 헬멧에 목도리를 감고 있었다.
―읍내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도 만만찮더군요.
"방산우체국까지는 봉고 트럭에 우편물을 싣고 와요.
아침 9시 30분쯤 양구우체국을 출발합니다.
옛날에는 우편물을 담은 행낭을 이쪽으로 오는 버스에 실어 보냈어요.
겨울에 눈이 오면 여기까지 버스가 못 왔어요.
언덕배기 아래에 버스가 서는 곳까지 나가 있다가 행낭을 찾아 메고 왔죠."
―요즘에는 눈이 와도 통행이 괜찮나요?
"제설차가 밀어주지요. 하지만 봉고 트럭은 차체가 가벼워 쉽게 미끄러져요.
그래서 무게를 잡아주기 위해 차 안에 40kg 쇳덩이 두 개를 싣고 다닙니다.
여기에 도착해 오토바이로 갈아타고 배달하지요."
당초 그의 오토바이를 따라갈 요량이었다.
내가 차 속도를 줄이면 110cc 오토바이 뒤에 바싹 붙어갈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오토바이가 산모퉁이를 돌았다.
햇볕이 들지 않는 경사길은 눈이 얼어붙어 빙판이 돼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기듯이 올라갔다.
오토바이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그를 놓친 것이다.
산봉우리를 넘어 파로호(破虜湖) 근처로 내려오자 휴대폰 벨이 울렸다.
"어디 계세요? 우리가 아까 점심을 먹었던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느새 그는 산중(山中) 배달을 마치고 되돌아간 뒤였다.
숨바꼭질도 아니고….
나는 빙판 산길을 이번에는 엉금엉금 내려왔다.
저 앞에 오토바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빙판길에는 요령이 있어요.
미끄러질 것 같으면 브레이크 대신 발로 바닥을 짚어 제동을 걸지요.
그래도 겨울에는 한두 번은 꼭 넘어져요.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미끄러우면 재간이 없어요.
동료 중에는 인대가 끊어져 절룩거리는 분도 있어요.
올해는 아직까지 눈이 덜 온 편입니다. 작년에는 꽤 많이 왔는데…."
―악천후에는 배달을 일시 중단합니까?
"눈비가 올 때 가장 힘들지만, 배달 업무는 계속 되죠.
다만 한 시간 걸릴 배달이 두세 시간씩 소요되지요.
전량을 다 배달 못 해도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요.
폭설로 정 들어갈 수 없고 급한 우편이면 '내일 배달해드리겠다'고 전화를 합니다."
―배달 순서가 있나요?
"처음 집배원이 됐을 때 사흘 동안 선배의 자전거 뒤를 따라다니며 배달 코스를 익혔어요.
직접 배달하면서 자신에게 맞게 코스를 바꾸기도 하지요."
―하루 주파 거리는?
"저는 75~100km쯤 돼요. 규정상 매일매일 그걸 기록합니다."
―집배원에게 가장 큰 애로 사항은요?
"우편물을 전달할 집을 찾고 사람을 찾는 거죠."
―양구에서만 30년 했으면 모든 게 손바닥 안일 텐데요.
"거의 다 알지만, 아직 모르는 데가 있어요.
새로 이사해 오는 집이 생기니까요. 펜션을 하거나 농사짓는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외지인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집을 몇 곳 배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마을 전체에 배달하는 시간과 맞먹어요.
또 옛날에는 부모님 이름만 알면 됐는데, 지금은 자녀들 이름까지 알아야 해요.
자녀들이 쓰는 휴대폰 고지서 등이 날아오니까요."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더 헷갈린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우리도 '불편하다' '시기상조'라며 말들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 편했어요.
과거에는 같은 번지에 서너 가구가 사는 경우가 있었어요.
하지만 도로명 주소는 한 가구마다 붙어 있으니까. 도로명 주소로 배달해 보니 빨라졌어요."
―30년간 우편물을 배달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사람 사는 게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죠.
젊었을 때는 힘이 들어 그만둬야겠다고 사표를 쓴 적도 있지만,
그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세월이 흘렀어요."
―나이 오십 넘어 찬 바람 맞고 다니면 회의가 들 법도 한데요.
"눈비를 맞아 홀딱 젖었을 때 궁상맞은 느낌도 있지만요,
그렇다고 사무실에서 내근하라고 하면 좀이 쑤셔 못할 거예요."
―당초 어떤 계기로 이 직업을 택했죠?
"양구종합고를 다녔는데 3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대학 진학이 물거품이 됐지요. 마음속으로 풀이 죽어 있었어요.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나가 보일러 일을 했어요.
어느 날 고향 선배가 '우체국에서 일할 생각이 없나?' 하고 전화했어요.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어요.
제가 외아들이어서 그 길로 내려와 주저앉게 됐지요. 그때 우리 나이로 스물두 살이었어요."
―채용 시험을 본 것은 아니고?
"방산우체국장님이 면접을 보고 채용했어요.
제게는 아버님 같던 분이었는데 바로 얼마 전 돌아가셨어요.
방산우체국에서 별정직 10급으로 시작했어요. 현재는 7급입니다."
―첫 봉급은?
"그걸 잊을 수 있겠어요?
13만4000원, 그 당시 쌀 두 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었죠."
―그때는 '빨간 자전거'를 타고 배달했지요?
"그렇죠. 삼천리표 빨간 자전거였죠.
누런 가죽 가방을 메고서요.
자전거 타는 걸 우습게 봤는데, 처음 일주일 동안 다리에 알이 배여 혼이 났어요.
일이 그렇게 고될 줄 몰랐어요.
포장이 안 된 언덕길에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걸어갔지요.
산 중턱 7부 능선에 있는 한 집에는 걸어서 30분이 걸리기도 했어요.
그 뒤 오토바이가 지급됐지요.
그때는 자동차 운전면허증으로 오토바이를 몰 수가 있었어요."
―요즘은 오지라도 길이 거의 다 포장이 됐지요?
"전두환 대통령 시절 '평화의 댐'이 건설되면서 도로포장이 됐어요.
그쪽 마을의 이름이 '천미리' '오미리'인데,
도로포장으로 발전이 천년 앞당겨지고 오백년 앞당겨졌다고들 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욕해도 여기 방산면 주민들은 욕을 안 했어요."
―옛날과 비교하면 근무 환경이 좋아진 건가요?
"오토바이가 보급되면서 훨씬 수월해졌죠.
하지만 과거에는 4명이 방산면 지역을 담당했어요.
700가구가 넘거든요. 지금은 1.5명이 맡고 있어요.
인력은 감축되고 배달 물량이 늘어나니까 늘 시간에 쫓기죠.
우편함에 편지 넣고 가기에도 바쁩니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논두렁에서 참을 먹을 때 '막걸리 한잔 마시고 가라'고 불렀어요.
그런 인정이 있었지요. 이제는 근무시간에 막걸리를 마셔도 안 되지만,
무엇보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주민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어진 거죠. 그게 참 안타까워요."
―만화나 영화에는 여전히 집배원과 주민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옛날에는 그랬죠. 한번은 마당에서 혼자서 머리 염색하고 있는 여든 넘은 할머니를 보고,
우편물 가방을 내려놓고는 제가 대신 염색해준 적도 있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개 사료를 사다줘' '장을 좀 봐줘' 부탁하면,
면 소재지에 나가 그런 심부름을 해줬어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가는 길이니까 해줬을 뿐이에요.
한 달에 한 번 세금 고지서가 나오면 주민들이 으레 저를 기다렸어요.
제가 대신 세금을 다 내줬으니까요. 등·초본을 떼고 은행에서 돈을 찾아주고,
예금도 대신 해주고…. 그때 제 별명이 '걸어 다니는 가계부'였어요."
―요즘은 인터넷으로 공과금을 내는 시절이니까, 그런 부탁도 자연히 없어졌지요?
"산골이고 연세가 많은 분들이 계시니까 인터넷을 잘 못 해요.
아직도 20여 가구는 제게 부탁해요.
재작년에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제가 가면 꼭 붙잡아요.
글을 모르니 읽어주고 배달된 고지서에 대해 설명해줘야 해요.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면 제 직업에 보람을 느끼죠.
시간에 쫓기면서 그런 정을 베푸는 게 어려워졌어요."
―하루 배달하는 우편 물량이 얼마나 되지요?
"대략 600~700통쯤 돼요. 대부분 공과금 고지서지요.
내일은 지역구 국회의원의 의정보고서를
집집마다 발송해야 하니 평소보다 두 배가 돼요.
그날그날 배달해야 할 물량이 있으니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어요.
점심 먹는 데도 20분을 안 넘겨요."
―고지서 배달이 대부분이니 주민들이 집배원을 크게 반가워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렇죠. 다 돈 내라는 고지서이니까.
편지를 쓰던 시절에는 저희가 가면 몹시 반가워했어요.
지금은 뭘 갖다줘도 반가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오늘 우편물 중에서 수기(手記)로 쓴 편지는 얼마나 되죠?
"열 통쯤 되려나, 이제는 전보(電報)도 거의 없어졌어요."
―토요일에도 근무합니까?
"격주로 근무해요. 저희는 명절이 꼭 반갑지만은 않아요.
명절이 다가오면 배달 물량이 쏟아져요.
31일이 설날이지만, 저희는 연휴인 30일까지 근무해요.
우편 물량이 늘어나 순전히 배달하는 데만 대여섯 시간 걸리죠.
겨울에는 날이 일찍 어두워져 가급적 서둘러야 해요. 늦어지면 배달이 힘들어져요"
그렇다. 산골에는 해가 아직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으슬으슬 추웠다.
대도시에서는 별로 느낄 수 없는, 뼛속을 스며드는 한기였다.
그의 오토바이는 산간 마을의 골목을 따라 곡예 하듯 달리면서
대문이나 담벼락의 우편함에 빠르게 우편물을 꽂았다.
나는 번번이 놓쳤고, 결국 몇 시간 만에 그를 따라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집배원 생활을 하면서 딸 셋을 모두 대학에 보냈다.
현재 전국에는 계약직을 포함해 1만7000명의 집배원이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