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여행(13.2.7)
그동안 중국을 2번 갔으니 정작 수도인 북경은 가본적이 없었다. 북경으로 가는 아시아나 비행기가 아마도 아침 8시 30분경에 출발하므로 6시 30분까지 일행이 집결해야 한다고 했는데 전철로 아무리 빨리가도 7시경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여 면세점 이용할 것도 없어 비행기에는 제시간에 탔으나 어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에 쌓인 눈을 제거하고 가야한다고 해서 1시간이 지체되어 비행기는 이륙하였다.
비행기 창가로 확인해 보니 비행항로는 랴오뚱반도를 거쳐 북경의 외항인 천진항을 거쳐 북경으로 가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보는 천진항과 북경은 도시가 우리의 서울과 인천처럼 거의 붙어 있었다. 이 곳이 중국 북부지방의 가장 중심지일 것이다.
예정보다 1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여 먼저 방문한 곳은 역사가 오래된 기와집이 많은 곳을 지나 지하철 북해북역 부근에 도착했는데 부근인 십찰해에서 자전거 인력거 투어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 인력거 투어 후에는 우리 돈 1천원의 팁을 주면 된다는 것이다.
보통 2명을 태우고 한바퀴 돌아 오는데 이 분들 월급도 상당하다고 한다. 십찰해는 인공호수라는데 겨울이 되니 이곳에서 사람들이 스케이트, 썰매 등을 타고 있었다.
다음에 간 곳은 왕부정거리인데 왕부정 거리는 원래 중국 왕가의 우물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먹거리와 기념품, 공예품 거리로 유명하다고 한다. 왕부정 거리 끝에는 사람이 걸어다니는 큰 거리가 있었는데 여기는 우리 명동같은 명품거리같은 느낌이 들었다.
왕부정거리 구경을 끝내고 간 곳은 천단공원이었다. 천단공원은 우리나라 환구단과 같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기년전까지 입구에서 걸어가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는데 정말 향나무를 많이 심어 있었고 구경 온 사람들도 많았다.
어느 정도 기년전까지 가다 보니 행각이 이어졌는데 이 곳에서 노인들이 카드 놀이 등 놀이도 하고 공예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옆의 공터에서는 운동도 하고 있었다.
기년전과 양쪽 건물에 있는 유물과 역사 자료를 구경하고 돌아오다 보니 중국사람들이 재기차기를 하는데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천단 공원에도 찻집이 있었는데 고풍스러운 건물에 상당히 운치가 있게 보였다.
천단공원 방문후에는 금면왕조 공연을 보러 갔다.
금면왕조란?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극화한 것으로 옛날옛적에 여자들만 사는 금면왕국이 있엇는데 이 왕국의 여왕은 금빛가면을 쓰고
'금면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들만 살고 있는 이웃왕국인 '남면왕국'의 침략을 받지만, 금면왕조는 치열하게 금면왕국을 지켜낸다.
전쟁에서 패한 남면왕국의 남면왕조는 금면왕국에 포로로 잡혀오게 되는데, 금면왕조의 착한마음으로 새사람이 되고 남면왕조와 금면왕조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을 질투한 신은 큰 홍수를 내리고 금면왕조는 백성들을 지키고자 자신이 산제물이 된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금면왕조는 태양조가 되어 금면왕국을 끝까지 지킨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쟁, 상전, 단조, 경전, 월하, 홍수, 제천, 환화의 8막으로 나누어 멋지게 구성하였다.
금면왕조를 본 후 저녁은 중국음식으로 해결했는데 나름대로 먹을만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북경 야경을 보았는데 야경일 볼만하다는 말이 실감이 났고 우리나라 신세계백화점도 북경에 진출한 것이 반가웠다.
우리 숙소는 북경역 부근에 있는 매리어트 호텔이었다.
오늘은 기관방문을 하는 날이다. 우리가 방문하는 기관은 중관촌에 있는 기관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는 걸린 것같았다.
중관촌에서 점심은 시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먹고 시장 구경을 하였다. 중관촌 오후 방문을 마치고 석양이 질 무렵 올림픽주경기장을 보기로 했다.
이곳에도 구경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저녁은 삼원정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은 것으로 기억된다.
만리장성을 가기로 했는데 스모그현상이 있어 걱정을 많이 했으나 막상 만리장성쪽으로 가면서는 스모그현상이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리장성에 가까이 갈수록 그동안 평원이었던 지형에 산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초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만리장성을 오를 계획이었으나 춘절을 맞아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걸어서 오르는 코스를 택하였다.
2번째 망루까지만 가고 돌아왔는데 놀랜 것은 성벽위의 길이 너무 가파르다는 것이다. 옆에 있는 난간기둥을 잡지 않고는 오르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성을 쌓으면 전투를 벌였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음 행선지는 명 13릉중에서 정릉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명13릉은 북경 창평구의 천수산 기슭이라는데 보통의 눈으로 보아도 좌청룡, 우백호가 보이는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좌청룡에 해당되는 용산에는 탑도 쌓았는데 아마도 우백호의 산과 균형을 맞출려고 쌓은 듯했다.
명황제들은 재위시절에 릉을 쌓았다는데 이 정릉도 18년이 걸려 쌓았다는 것이다.
13릉중 유일하게 정릉만 발굴을 하였다는데 정릉에 들어가 보니 그 규모가 어마 어마하고 공사한 사람들도 엄청나게 고생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는 길에 명13릉 박물관이 있어 구경하고 왔다.
돌아오면서 보니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동상이라고 한다.
점심은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중국식당에서 중국식으로 하고 식사후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품 구경도 했다.
점심식사후에는 서태후의 이화원을 보러갔다. 인수문을 지나서 인수전이 있었는데 서태후가 정사를 보던 곳이라고 한다.
인수전 앞에는 기린과 봉황 그리고 용의 조각이 있었다. 적당히 구경하고 인공호수인 곤명호를 보러 갔는데 겨울이라서 얼음위에 눈이 쌓여있었다.
곤명호는 인공호수로 여기서 흙을 파내서 쌓아놓은 것이 불향각이 있는 인공산인 만수산이 되었다고 한다.
호수가 너무 컸는데 우악스럽게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이화원을 재건하느라고 돈을 너무 많이 썼다고 하더니 다른 조경도 곁들였으면 좋았을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음위로 연꽃대가 올라와 말라 비틀어 졌는데 여름에 오면 연꽃이 이쁠 것같았다.
곤명호 주변으로 걸어갔는데 낙수당이 있었는데 그 앞에 청지수라는 엄첨난 크기의 수석이 있었다.
긴 회랑인 장랑은 요월문에서 시작하는데 길이가 728미터 273개 칸이라고 한다. 대들보와 평방·창방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 특색이 있었다.
장랑쪽으로 쭉 가다 보니 배운문이 나오는데 그 위쪽에 불향각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입장료도 있고 시간 관계상 불향각으로 가는 것은 생략했다.
배운문까지 왔다가 장랑 옆 호수가 길로 해서 되돌아 갔다. 호수가 길로 해서 가다 보니 장랑에도 중간 중간에 전각이 있어 쉬어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저녁은 양고치구이를 먹었는데 먹다보니 양이 성이 안찬다고 양다리를 시켜 먹었는데 양 조절을 잘 못해서 고기가 많이 남았고 차라리 양고치구이를 계속 먹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날 먼저 간 곳은 천안문 광장이었다. 천안문 광장 주변에는 인민대회당, 중국국가박물관 등이 있다고 한다.
천안문 광장을 구경하고 자금성쪽으로 갔는데 자금성 앞에는 돌기둥이 보였다. 천안문을 지나자 단문이라고 나타났는데 단문도 자금성을 들어가기 위한 통과문으로 생각된다.
자금성(紫禁城)은 동서 750m, 남북 960m, 도합 72ha의 넓이의 명, 청대 황궁으로.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위해 10m 높이의 담과 50m 너비의 인공 하천을 축조한 환호성(環濠城)이다.자금성에는 여러 궁전 주변에 9,999개의 방과 원래 규격에서 1/2이 되는 방 한칸이 있는데, 중국의 황제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만(萬) 개의 방을 갖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만 개의 방을 가지는 것이 옥황상제에게 결례가 된다고 하여 반 칸을 줄인 9999와 1/2 개의 방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자금성의 주요 건축물은 크게 외조(外朝),내정(內庭)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고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던 곳이다. 내정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고 거주하던 곳이다. 자금성은 현재 중국에 보전되어 있는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황궁 건축물로 중국 고대 건축예술의 전통과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자금성(紫禁城)으로 더욱 친숙한 고궁(故宮)은 명(明, 1368 ~ 1644), 청(淸, 1644 ~ 1911) 양 대의 황궁이다. 자금성은 고궁의 옛 이름으로 황제의 별자리인 자미성(紫微星)과 금지(禁地)란 의미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자(紫)색은 동양에서 가장 길(吉)한 색으로 부처님의 몸이 자색이라고 한다. 인간은 일생에 한번 가장 기쁠 때 얼굴이 잠시 자색을 띤다고 하는데 자금성은 이런 자색으로 건축되었다. 자금성은 명 영락(永樂)18년(1420년) 3년의 공정을 거쳐 완성되었으며 1421년 베이징 천도와 함께 정식 황궁이 되었다.
북경성(北京城)의 남북 중앙선상에 위치하였으며 황가금원(皇家禁苑)의 1/3을 차지하였다. 자금성의 모든 건축물은 중앙 축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었으며 좌우대칭관계와 주종관계가 뚜렷하여 질서정연한 황궁을 이루었다. 자금성의 궁정구(宮廷區)에는 전(殿), 당(堂), 관(館), 사(舍)의 명칭을 가진 건축이 9,999칸(소위 칸이라는 단위는 間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둥 네 개가 지탱하는 넓이를 말한다)반이나 있었으며 건축면적이 15만 평방미터, 대지가 72만 평방미터에 달했다.
물론 지금은 9,000여 칸으로 그 규모가 축소되었으나 “성중의 성” 자금성의 모습은 여전히 대단한 것이다. 자금성의 건축은 크게 전조(前朝)와 내정(內廷)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조는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세 대전으로 구성되는데 이곳에서는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는 한편 각종 중요행사가 거행되었다.
내정(內廷)은 전조의 뒤에 위치한 소궁(小宮)으로 황제가 일상생활과 함께 정무(政務)를 보았던 곳이다. 이밖에 여자들의 거처였던 동서육궁(東西六宮)과 태상황(太上皇)을 위한 외동궁(外東宮)이 있다.
자금성은 단문(端門), 오문(午門), 금수교(金水橋), 태화문(太和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건청문(乾淸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곤녕문, 어화원(御花園), 신무문(神武門) 순으로 답사한다.
자금성의 출입문은 오문이라고 해야 할 것같다. 단문이 지나면 오문이 있는데 이 오문에서 군의 출정이나 개선 등 군사적 의례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자금성의 대문으로 자오(子午 : 남과 북)방향으로 건설되었다하여 오문(午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대(城臺)에는 다섯 개의 높은 누각이 있어 오봉루(五鳳樓)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명, 청 시대 대장군의 출정이나 개선, 전쟁포로를 종묘에 바치는 의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오문의 다섯 개 출입문 중 중앙의 것이 황제 전용문이다. 황제 외에는 결혼식을 위해 입궁하는 황후나 당시의 최고시험인 전시(殿試)의 장원, 방안(榜眼 : 차석) 그리고 탐화(探花 : 3등)만이 딱 한 번씩 사용할 수 있었다. 좌우의 문은 문무대신과 황족들이 출입하였으며 양끝의 두 문은 전시를 치르는 수험생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오문을 지나서 마주친 것은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의 입구인 태화문이 있었다. 이 태화문 앞에 우리의 금천교와 같은 금수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 또한 신격화된 황제와 백성들의 세계를 잇는 다리일 것이다.
태화문을 지나면 태화전이 나타나는데 이 태화전이 자금성의 정전이다. 자금성을 신선이 사는 세계로 생각했다고 하지만 청나라의 국교가 라마교이므로 여기 자는 부처님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태화문은 전조(前朝) 삼대전의 정문으로 자금성 내 최대의 궁문(宮門)이다. 명대 황제는 때때로 이곳에 보좌를 두고 신하들의 상소를 경청하는 등 정무에 충실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태화문에는 9행 9열의 도금 문정(門釘 : 대문의 장식용 돌기)이 있다. 9는 ‘극양수(가장 큰 홀수)’라는 길한 숫자로 황실의 건축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문정들은 복과 장수를 상징하여 만지면 복을 받는다는 설이 있는데 이 때문에 태화문의 문정들은 매년 칠을 다시 해야 하는 형편이다.
태화전(太和殿)은 1420년 건축된 중국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금란전(金?殿)으로도 불렸으며 명, 청 양대 이곳에서는 황제의 즉위식이나 생일, 황후의 책립, 원단(元旦 : 음력 설)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강희(康熙)황제(1695년)때의 모습이며 황제와 황후가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으로 보존하였다.
전 내 중앙에는 높이 2m의 지평대(地平臺)가 있으며 지평대 위에는 금을 칠하고 용을 깍은 보좌(寶座)가 놓여있다. 황제가 보좌에 오르면 북이 일제히 울렸으며 문무대신들은 품(品)에 따라 단폐(丹陛 : 한백옥으로 만든 삼층의 단)에 서거나 광장을 가득 매웠다. 문무대신들은 삼고구배(三叩九拜 : 3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고 9번 절하는 것)와 숭호(嵩呼 : 천자의 장수를 빌면서 외치는 “만세, 만세, 만만세”)로 황제의 절대 권력에 경의를 표했다. 명, 청 시대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보위에 올랐다.
이 태화전이 자금성에서 가장 지체 높은 전각인 것이 처마의 수척수(垂脊獸) 숫자가 11개로 최고이다.
문수(吻獸)라고 하는 지붕의 조형물 중 비첨(飛? : 끝이 올라간 처마)에 있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이 같은 상징물들은 2,100년 이전부터 건축에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화재방지와 건물의 서열표시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만들어 졌다.
가장 뒤 쪽의 조형물은 치문(?吻)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용왕의 아들로 바닷물에 회오리를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어 졌다. 따라서 치문을 수척(지붕의 척추)에 두면 화제를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치문과 함께 다른 수척수들을 배열하게 되었다.
가장 앞에 위치하는 것은 기봉선인(騎鳳仙人 : 봉황을 탄 신선)이며 뒤를 이어, 용, 봉황, 사자, 천마, 해마, 산예(?猊), 압어(押魚), 해태(??), 투우(鬪牛)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들 수척수는 그 크기와 개수에 따라 건축물의 서열을 뜻하였는데 고궁 최고 건축물인 태화전(太和殿)에는 10존, 건청궁(乾淸宮)에는 9존, 교태전(交泰殿)에는 7존이 있으며 동서육궁(東西六宮)에는 각 5존씩 두어 건물의 등급과 서열을 표시하였다. 고궁 내 사람들 사이에 복잡하면서도 엄격한 질서가 있었듯이 건축물 사이에도 서열을 표시한 봉건시대의 상징물이라 하겠다.
태화전의 문살은 우리와 같은 소슬빗살문양인데 이것은 불교의 금강저를 상징했을 것이다.
청나라도 불교국가이니 불교의 이념을 채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단청은 우리의 연화머리초가 아닌 용을 문양을 쓰고 있었다.
황제의 보좌에 닫집이 없는 것은 우리와 달랐고 지붕이 다포식에 겹처마인 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같은데 우리가 중국을 모방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화전의 내부는 2377㎡로 금룡보좌(金龍寶座)로 이르는 통로에는 용의 그림, 중앙에는 금칠을 한 용조각 보좌와 병풍이 놓여 있고, 그 양측에 6개의 금칠을 한 기둥 있다. 천정 가운데는 구슬을 갖고 있는 금용(金龍)이 장식되어 있고, 천정판에는 옥새 채색화가 그려져 있으며. 건극수우(建極綏猷)라는(나라를 새워 편안함을 꾀한다.)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태화전 우측에는 방화수용기가 있었는데 우리 궁궐의 드므와 용도가 비슷한 것으로 방화수 겸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할 것이다.
방화수용기(防火水用器:우리나라 궁궐의 드므)는 중국에서는 동철항(銅鐵缸) 또는 태평항(太平缸), 태평수항(太平水缸)으로 부르고 우리나라 궁궐에 비취된 "드므"와 유사하다.
우리나라의 "드므"는 청동기로 제작하고 단순한 반면 이곳 중국의 동철항(銅鐵缸)은 금(金)을 칠했으며 태화전, 보화전, 건청전 등에 18개가 있다고 하며, 화재시 소방용수로 활용하기 위해서 안치하고 동절기에는 동결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에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지피게 만들었다.
철항의 바탕에 있는 금귀면상(金鬼面像)을 만지면 악귀를 ?아내고 행운이 온다고하여 많은 사람들이 만지고 있었다.
태화전 뒤에는 사모지붕의 중화전이 있었다.
중화전(中和殿)은 "극단을 멀리하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으면 조화를 가져온다"라는 뜻으로 가로 세로 각각16m인 정방형의 궁전이며 황칠로 된 정병통이 있다. 외조의 3대 전각 중 하나로, 황제가 태화전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 휴식을 취하거나, 대신과 사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때나, 천단, 지단, 선농단 등으로 제사를 떠나기 전 먼저 의식을 치루던 곳으로 쓰였던 곳이다.
청나라 말기, 개혁운동에 실패한 광서제가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덕수궁에 있는 정전(正殿)이 중화전(中和殿:보물 제819호)으로 자금성에서 모방하였을 것이다.
용좌(龍座)위의 편액(扁額)의 글은 사서삼경중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인 윤집궐중(允執厥中)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 다스린다"라는 뜻이다.
중화전 뒤에는 보화전이 있는데 보화전의 잡상은 10개로 태화전보다는 늦은 전각이었다.
보화전(保和殿)은 중화전(中和殿) 뒤편에 있으며. 1420년에 지어졌다. 최초 명칭은 근신전(?身殿)이었으나 가정제(嘉靖帝) 시기에 화재로 소실되고 중건된 후 건극전(??殿)으로 변경하였다가 청(淸)의 순치제 때 보화전(保和殿)으로 개칭하였다.
건축면적은 1240㎡이며 높이는 29.50m이다. 명(明)과 청(淸) 양 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명대에는 큰 의식을 치르기 전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청대에는 섣달 그믐, 정월 15일, 귀족과 12품 대신을 위한 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던 곳이다.
보화전은 황제가 집무를 보던 곳으로, 용좌(龍座)위의 편액(扁額)의 글은 황건유극(皇建有極) "황제가 먼저 그 다스리는 볍을 세워야한다."는 뜻으로 사서삼경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이다.
보화전에는 우리는 답도라고 하는 단폐(丹陛)의 거대한 대리석으로 된 운룡대석조가 있는데 길이가 17미터에 약250톤이 된다고 한다.
보화전을 지나면 내정의 구역이 시작되는데 건청문을 지나 건청궁이 나온다.
1420년에 건축된 내정 최고의 건축물이다. 쌍용(雙龍)과 옥새(玉璽)도안을 장식으로 사용하여 황제의 건물임을 표시하였다. 높이가 24m, 폭이 9칸으로 명, 청 시대 황제의 침궁이었으며 황제 사후, 시체를 잠시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보좌 위에는 “正大光明”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있어 이 뒤에 건저갑(建儲匣)을 숨겨두었다. 이 건저갑에는 황권계승의 행방을 기록한 조서(詔書)를 넣어 두었는데 황제가 죽으면 이를 개봉하여 차기 황제를 세상에 알렸다. 이것은 황자들의 황권다툼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옹정(雍正)황제 때부터 시행되었다.
건천궁의 내부에는 청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643년 ~ 1661년)인 순치제의 글씨인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扁額)이 금룡보좌(金龍寶座) 위에 걸려있는데 "바른 것을 밝힌다."는 뜻으로 통치의 기본은 바른데서 출발한다는 뜻 일 것이다.
청나라 다섯번째 황제인 옹정제는 그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후계자를 지명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뒤를 이을 황태자의 이름을 문서에 적은 뒤, 봉인한 상자 속에 넣어 <정대광명> 편액(扁額) 뒤에 감춰 두었다.
황제가 사망했을 때 편액(扁額) 뒤 상자의 봉인을 뜯고 이름을 후게자를 확인한 뒤, 새로운 천자를 공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황제의 만년에도 차기 황태자가 누가 될지 모르므로 왕자들은 모두 황제가 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제의 환심을 사러 눈치를 보아 레임덕(lame duck)현상으로 인한 권력누수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후계 황제에게 계속 이어져 청나라의 독특한 황위계승 방법이 되었다.
건청궁 뒤에는 교태전이 있었는데 사모지붕이었다. 교태전(交泰殿)은 내전의 가장 큰 궁궐인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의 작은 전각으로 현재의 건물은 1798년 청 왕조의 제7대 황제(재위 1796년 ~ 1820년)였던 가경제(嘉慶帝) 때 건축한 건물이다.
명나라 때는 황후의 침실로 사용 되었고, 청대에서는 옥새의 보관과 황후의 공식 업무를 거행하는 곳으로 용도가 바뀐 곳으로. 당시 이곳은 황후 자신 뿐 아니라 황귀비, 귀비, 비 등 황제의 여자들의 생일이나 길일에 행사를 벌이던 곳이다. 건물 꼭대기에는 동으로 도금된 동그란 절병통이 있고 칠보 장식의 기와가 처마 4곳을 바치고 있으며 들보에는 용과 봉황과 함께 옥새 무늬가 새겨져 있다.
내부의 보좌(寶座) 뒤편 벽면에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 강희제가 "무위(無爲)라고 쓴 편액이 있는데 무위란 도가에서 나온 말로"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치에 맡겨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라는 말이다.
교태전 뒤에는 곤녕궁이 있었는데 침대도 전시되어 있었다.
네이팅[?廷]의 후삼궁(后三?) 중 하나로 자오타이뎬[交泰殿] 뒤편에 있다. 1420년에 축조되었고,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1655년에 선양[沈?] 선경청녕궁(盛京???)을 모방하여 다시 지었다. 남향의 건물로 명대(明代)에는 황제의 침궁(??)으로 사용되었다. 청(淸)의 순치(順治) 12년에 개축 후, 이곳은 샤머니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주요 장소였다.
곤녕궁 구경을 마치고 곤녕문을 지나 뒤에 있는 어화원으로 갔다. 원래 이름은 궁후원(宮後苑)으로 후삼궁(后三宮)뒤에 있다. 자금성 내부의 정원이며 고궁관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명소이기도 하다. 중심건물은 흠안전(欽安殿)으로 자금성 내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명(明)대 건물이라고 한다.
흠안전은 여관(女官)들의 거쳐였던 우방정휘각(右方廷暉閣)과 마주서 있으며 만춘정(萬春殿), 천추정(千秋亭), 어경정(御景亭) 등이 어화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어화원은 황궁의 정원답게 곳곳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었는데, 정원의 바닥은 화석자로(花石字路)라고 하는 아름다운 길로 장식해두기도 하였다.
어화원에는 수많은 향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수석들도 있었으며 퇴수산이라는 돌로된 동산도 있었다.
그리고는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금성의 북문이다. 황제와 황후가 성 밖으로 행차하는 통로였으며 비빈(妃嬪)들이 잠단(蠶壇)으로 친잠(親蠶)행사를 나서는 출입구이기도 하였다. 원래는 종과 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매 시각마다 종과 북을 쳐 시각을 알렸다.
1644년에는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설자리를 잃은 숭정(崇禎)황제가 이 문으로 도망쳐 자살하기도 하였다. 대 문학가 곽말약 선생의 친필인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편액이 걸려있다.
신무문에서 나오면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것이 경산공원이고 그 위에 정자가 만춘정이라고 한다.
자금성도 우리의 동십자각처럼 각루와 해자인 금수하가 있었다. 금수하는 통자하(筒子河)라고도 하며 황성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 강이다. 중국 고성들은 대게 성 주변으로 해자(垓字 : 땅을 파고 물을 채운 방어시설)를 팠는데 고궁은 황성답게 강줄기를 끌어 온 것이다.
성 밖의 것은 외금수하(外金水河), 오문(午門)안쪽의 것은 내금수하(內金水河)라고 하며, 외금수하의 강폭은 52m이며 수심은 2m, 길이는 3.8km에 달하고 있다. 각루는 성벽 네 귀퉁이에 세워진 망루다. 독특한 구조로 특히 유명하며 28개의 처마와 72개의 용마루로 구성되었다. 국경절(중국건국기념일, 10월 1일)에는 각루의 전등을 모두 켜는데 조명이 비추는 각루와 금수하에 비친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의 마지막 일정은 라마교 사찰인 옹화궁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가 1693년에 왕자들을 위한 별궁으로 지었다. 넷째 아들 옹친왕(윤진)에게 하사하면서 옹화궁이라 불리게 됐다. 훗날 옹친왕이 옹정제가 되자 황제를 배출시킨 곳임을 드러내고자 붉은색 담과 황금색 유리 기와로 저택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 건물을 한층 격상시켰다.
평소 소수민족 통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옹정제는 그 노력의 하나로 티베트 불교를 믿었다. 옹정제 사후에 티베트 불교식으로 예불을 드린 것을 계기로 옹화궁은 1744년 정식 티베트 불교 사원이 됐다. 이후 불교에 심취했던 건륭제의 명령으로 확장하여 여러 불교 건축양식이 혼합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만복각(완푸거:万福?)'에 있는 미륵불은 전체 높이가 26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목 불상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베이징 둥청구(?城?, 동성구) 한족지구(?族地?) 내의 라마교인 장전불교(藏?佛?) 최대 사원의 하나로 1961년 청대 고건축으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1983년 한족지구전국중점사원(?族地?全?重点寺院)의 하나로 등록되었다.
옹화궁은 강희(康熙) 33년(1694) 강희제가 내성(?城)의 동북지역에 넷째 아들인 윤진(胤?)을 위해 지었으며 초기에는 사야부(四?府)로 칭하였다. 윤진이 친왕(?王)으로 봉해진 후 옹왕부(雍王府)로 바뀌었고 이곳 여의실(如意室)에서 1711년 홍력(弘?)이 태어났다. 1723년 윤진이 제위를 계승하여 옹정제(雍正帝)가 되어 쯔진청(紫禁城)으로 들어가며 옹정 3년(1725) 옹왕부(雍王府)는 행궁으로 승격되어 옹화궁으로 칭해졌다. 옹정 13년(1735) 옹정제의 사망으로 궁내에 옹정제의 시신이 안치되었으며 이로 인해 주요 전각이 황금색 유리 기와로 바뀌었다.
옹정제 재위시기에는 옹화궁의 중로(中路)와 서로(西路)가 장전불교의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건륭제(乾隆帝) 즉위 후 건륭 9년(1744) 옹화궁 중로(中路)와 서로(西路)가 정식 장전불교의 사원으로 바뀌고 주요 전각은 불전(佛殿)으로 바뀌었으며 동로행궁(?路行?)은 계속 황실에서 사용하였으나 실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궁내 주요 건물로는 패루(牌?), 소태문(昭泰?), 옹왕부의 정문이었으나 불전으로 바뀐 천왕전(天王殿), 정전(正殿), 옹왕부의 내문(??)이었던 영우전(永佑殿), 침전이었던 법륜전(法?殿), 만복각(万福?) 등이 있다.
옹화궁도 들어가는 입구에는 패루가 있었고, 표를 사서 들어가는 입구에도 패루가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잎은 떨구었지만 은행나무가 길 양쪽으로 심어져 있었다.
먼저 마주친 문은 소태문이었고 옹화궁도 별궁으로 사용했다고 수척수가 4개가 있었다. 소태문을 들어가자 당간지주도 보이고 전각들이 옆에 보이는데 앞에 옹화문이 있었다. 옹화문에도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는데 어떤 분인지는 확인이 어려웠다.
옹화문은 사천왕문에 해당되는데 사천왕이 지키고 있었다.
옹화문을 지나면 동정로라는 청동향로가 있고 그 뒤에 비가 모셔져 있는 비각으로 보이는 전각이 보이고 정면에는 옹화궁이 보인다.
옹화궁 오른쪽에는 밀종전이 있는데 밀종전 안에는 다양한 보살들이 보였다. 옹화궁 왼쪽 귀퉁이에는 마니차가 있었고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옹화궁 앞에는 동탑이 있었는데 유리관으로 덮어 놓았다. 옹화궁 안에는 삼존불이 있었다는데 밖에서 보니 석가모니불만 보였다.
옹화궁 뒤에 법륜전이라고 생각했는데 편액은 영우전이다.
영우전 뒤에 있는 것이 법륜전인 모양이고 여기는 수척수가 6개이다. 법륜전의 부처님을 보았는데 티벳 불교의 창시자라고 한다.
옹화궁 법륜전에는 겔룩파로 알려진 티베트 불교 종파를 창시한 라마 총카파(宗喀巴. 1357~1419)의 불상이 있다.
총카파는 청해성 황중현(湟中縣) 아무드 지방의 총카부락에서 태어나서 출생지에서 그의 이름을 따왔다. 7세 때 출가하여 16세 때 티베트로 가서 현교에 관해 연구하였으며 다시 밀교에 오의(奧義)를 깨닫기 위해 타포산(山)에 들어가 수행한 끝에 겔룩파라는 독자적인 밀교 종파를 창시한다.
총카파는 독신생활을 주장하여 승가의 계율을 회복하고 노란 승복을 입도록 하여 이전의 홍모파(紅帽派)와 구별하여 황모파(黃帽派)로 불린다. 황모파는 몽골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몽골인들의 도움으로 1642년 이래 총카파의 후계자들이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가진 티베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옹화궁에 있는 총카파상 중에 가장 후대인 1924년에 법륜전에 안치된 총카파상이 높이 610cm이며 옹화궁 대라마 백보인(白甫仁:몽골족)이 수집된 기부금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얼굴은 고귀하고 자상한 표현을 하고 있으며 거대한 후광은 불꽃 형상으로 찬란하게 조각되어 있다. 황금날개를 가진 금시조와 구름 속에 있는 천녀상이 총카파상의 생기를 주고 있다.
법륜전 뒤로 돌아가니 만복각이 있었다. 만복각 안에는 목조미륵대불상이 있는데 백단나무 하나로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26미터로 세계 최고이며 26미터중 18미터는 지상으로 나와있고 8미터는 땅에 묻혀 있다고 한다.
만복각은 공중에 양쪽의 영강각과 연수각을 연결하는 비랑이 있어 눈요기를 주고 있었다. 여기도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고 주변에 전각들도 많이 있었다.
이것으로 간략하게 북경여행을 했지만 북경은 상당한 시간을 두고 찬찬히 구경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자금성은 자금성 구경만 하루를 잡아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코리안타운의 자하문이란 음식점에서 먹었다.
중국은 과거 낙후된 나라가 아니고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수도 북경은 건물도 현대화되어 우리나라 서울에 손색이 없는 도시가 된 것같다.
중국을 보면 우리가 더욱 분발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여행이었다.
중국 북경여행(13.2.7)
중국의 대표적인 사진은 자금성의 태화전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중국을 2번 갔으니 정작 수도인 북경은 가본적이 없었다. 북경으로 가는 아시아나 비행기가 아마도 아침 8시 30분경에 출발하므로 6시 30분까지 일행이 집결해야 한다고 했는데 전철로 아무리 빨리가도 7시경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여 면세점 이용할 것도 없어 비행기에는 제시간에 탔으나 어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행기에 쌓인 눈을 제거하고 가야한다고 해서 1시간이 지체되어 비행기는 이륙하였다.
비행기 창가로 확인해 보니 비행항로는 랴오뚱반도를 거쳐 북경의 외항인 천진항을 거쳐 북경으로 가는 것이다. 라오뚱반도의 풍경이다.
천진항의 모습이다.
비행기에서 보는 천진항과 북경은 도시가 우리의 서울과 인천처럼 거의 붙어 있었다. 이 곳이 중국 북부지방의 가장 중심지일 것이다.
예정보다 1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여 먼저 방문한 곳은 역사가 오래된 기와집이 많은 곳을 지나 지하철 북해북역 부근에 도착했는데 부근인 십찰해에서 자전거 인력거 투어를 한다는 것이다.
북경공항의 모습이다.
자전거 인력거 투어 후에는 우리 돈 1천원의 팁을 주면 된다는 것이다.
보통 2명을 태우고 한바퀴 돌아 오는데 이 분들 월급도 상당하다고 한다. 십찰해는 인공호수라는데 겨울이 되니 이곳에서 사람들이 스케이트, 썰매 등을 타고 있었다.
자전거 인력거가 대기중이다.
겨울이라서 십찰해 전해가 얼었다.
여기는 십찰해 후해의 모습이다.
십찰해 후통거리의 모습이다.
다음에 간 곳은 왕부정거리인데 왕부정 거리는 원래 중국 왕가의 우물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먹거리와 기념품, 공예품 거리로 유명하다고 한다. 왕부정 거리 끝에는 사람이 걸어다니는 큰 거리가 있었는데 여기는 우리 명동같은 명품거리같은 느낌이 들었다.
왕부정거리 입구에 있는 패루의 모습이다.
전갈, 뻔데기, 불가사리 구이를 파는 모습이다.
왕부정 거리 시장의 모습이다.
뭔 말인지는 몰라도 왕부정거리의 유래가 된 왕가의 우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예전 왕부정 거리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같다.
왕부정 거리 끝나는 지점에 우리로 말하면 명동거리같은 것이 조성되어 있다.
왕부정거리 구경을 끝내고 간 곳은 천단공원이었다. 천단공원은 우리나라 환구단과 같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기년전까지 입구에서 걸어가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는데 정말 향나무를 많이 심어 있었고 구경 온 사람들도 많았다.
기년전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향나무이다.
어느 정도 기년전까지 가다 보니 행각이 이어졌는데 이 곳에서 노인들이 카드 놀이 등 놀이도 하고 공예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옆의 공터에서는 운동도 하고 있었다.
기년전의 모습이다.
기년전 내부의 모습이다.
기년전과 양쪽 건물에 있는 유물과 역사 자료를 구경하고 돌아오다 보니 중국사람들이 재기차기를 하는데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이고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재기를 차는 사람들이다.
천단 공원에도 찻집이 있었는데 고풍스러운 건물에 상당히 운치가 있게 보였다.
천단공원 방문후에는 금면왕조 공연을 보러 갔다.
금면왕조란?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극화한 것으로 옛날옛적에 여자들만 사는 금면왕국이 있엇는데 이 왕국의 여왕은 금빛가면을 쓰고
'금면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들만 살고 있는 이웃왕국인 '남면왕국'의 침략을 받지만, 금면왕조는 치열하게 금면왕국을 지켜낸다.
전쟁에서 패한 남면왕국의 남면왕조는 금면왕국에 포로로 잡혀오게 되는데, 금면왕조의 착한마음으로 새사람이 되고 남면왕조와 금면왕조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사람을 질투한 신은 큰 홍수를 내리고 금면왕조는 백성들을 지키고자 자신이 산제물이 된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금면왕조는 태양조가 되어 금면왕국을 끝까지 지킨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쟁, 상전, 단조, 경전, 월하, 홍수, 제천, 환화의 8막으로 나누어 멋지게 구성하였다.
금면왕조를 공연하는 별도 공연장이 있었다.
금면왕조의 장면들이다.
금면왕조를 본 후 저녁은 중국음식으로 해결했는데 나름대로 먹을만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북경 야경을 보았는데 야경일 볼만하다는 말이 실감이 났고 우리나라 신세계백화점도 북경에 진출한 것이 반가웠다.
우리 숙소는 북경역 부근에 있는 매리어트 호텔이었다.
오늘은 기관방문을 하는 날이다. 우리가 방문하는 기관은 중관촌에 있는 기관이었는데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는 걸린 것같았다.
중관촌에서 점심은 시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먹고 시장 구경을 하였다.
중관촌 오후 방문을 마치고 석양이 질 무렵 올림픽주경기장을 보기로 했다.
이곳에도 구경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저녁은 삼원정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은 것으로 기억된다.
세번째날은 만리장성을 가기로 했는데 스모그현상이 있어 걱정을 많이 했으나 막상 만리장성쪽으로 가면서는 스모그현상이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리장성에 가까이 갈수록 그동안 평원이었던 지형에 산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초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만리장성을 오를 계획이었으나 춘절을 맞아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걸어서 오르는 코스를 택하였다.
2번째 망루까지만 가고 돌아왔는데 놀랜 것은 성벽위의 길이 너무 가파르다는 것이다.
옆에 있는 난간기둥을 잡지 않고는 오르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성을 쌓으면 전투를 벌였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음 행선지는 명 13릉중에서 정릉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명13릉은 북경 창평구의 천수산 기슭이라는데 보통의 눈으로 보아도 좌청룡, 우백호가 보이는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좌청룡에 해당되는 용산에는 탑도 쌓았는데 아마도 우백호의 산과 균형을 맞출려고 쌓은 듯했다.
명황제들은 재위시절에 릉을 쌓았다는데 이 정릉도 18년이 걸려 쌓았다는 것이다.
13릉중 유일하게 정릉만 발굴을 하였다는데 정릉에 들어가 보니 그 규모가 어마 어마하고 공사한 사람들도 엄청나게 고생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는 길에 명13릉 박물관이 있어 구경하고 왔다.
돌아오면서 보니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동상이라고 한다.
점심은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중국식당에서 중국식으로 하고 식사후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품 구경도 했다.
점심식사후에는 서태후의 이화원을 보러갔다.
인수문을 지나서 인수전이 있었는데 서태후가 정사를 보던 곳이라고 한다.
인수전 앞에는 기린과 봉황 그리고 용의 조각이 있었다.
적당히 구경하고 인공호수인 곤명호를 보러 갔는데 겨울이라서 얼음위에 눈이 쌓여있었다.
곤명호는 인공호수로 여기서 흙을 파내서 쌓아놓은 것이 불향각이 있는 인공산인 만수산이 되었다고 한다.
호수가 너무 컸는데 우악스럽게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이화원을 재건하느라고 돈을 너무 많이 썼다고 하더니 다른 조경도 곁들였으면 좋았을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음위로 연꽃대가 올라와 말라 비틀어 졌는데 여름에 오면 연꽃이 이쁠 것같았다.
곤명호 주변으로 걸어갔는데 낙수당이 있었는데 그 앞에 청지수라는 엄첨난 크기의 수석이 있었다.
긴 회랑인 장랑은 요월문에서 시작하는데 길이가 728미터 273개 칸이라고 한다.
대들보와 평방·창방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 특색이 있었다.
장랑쪽으로 쭉 가다 보니 배운문이 나오는데 그 위쪽에 불향각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입장료도 있고 시간 관계상 불향각으로 가는 것은 생략했다.
배운문까지 왔다가 장랑 옆 호수가 길로 해서 되돌아 갔다.
호수가 길로 해서 가다 보니 장랑에도 중간 중간에 전각이 있어 쉬어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저녁은 양고치구이를 먹었는데 먹다보니 양이 성이 안찬다고 양다리를 시켜 먹었는데 양 조절을 잘 못해서 고기가 많이 남았고 차라리 양고치구이를 계속 먹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날 먼저 간 곳은 천안문 광장이었다. 천안문 광장 주변에는 인민대회당, 중국국가박물관 등이 있다고 한다.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전루이다.
모주석기념관이다.
중국철도박물관이다.
정양문이다.
중국국가박물관이다.
인민대회당이다.
인민영웅기념비이다.
국기게양대와 천안문이다.
보초서는 병사 고생한다.
천안문을 옆에서 본다.
천안문 광장을 구경하고 자금성쪽으로 갔는데 자금성 앞에는 돌기둥이 보였다.
천안문을 지나자 단문이라고 나타났는데 단문도 자금성을 들어가기 위한 통과문으로 생각된다.
자금성(紫禁城)은 동서 750m, 남북 960m, 도합 72ha의 넓이의 명, 청대 황궁으로.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위해 10m 높이의 담과 50m 너비의 인공 하천을 축조한 환호성(環濠城)이다.자금성에는 여러 궁전 주변에 9,999개의 방과 원래 규격에서 1/2이 되는 방 한칸이 있는데, 중국의 황제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만(萬) 개의 방을 갖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만 개의 방을 가지는 것이 옥황상제에게 결례가 된다고 하여 반 칸을 줄인 9999와 1/2 개의 방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자금성의 주요 건축물은 크게 외조(外朝),내정(內庭)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고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던 곳이다. 내정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고 거주하던 곳이다. 자금성은 현재 중국에 보전되어 있는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황궁 건축물로 중국 고대 건축예술의 전통과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자금성(紫禁城)으로 더욱 친숙한 고궁(故宮)은 명(明, 1368 ~ 1644), 청(淸, 1644 ~ 1911) 양 대의 황궁이다. 자금성은 고궁의 옛 이름으로 황제의 별자리인 자미성(紫微星)과 금지(禁地)란 의미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자(紫)색은 동양에서 가장 길(吉)한 색으로 부처님의 몸이 자색이라고 한다. 인간은 일생에 한번 가장 기쁠 때 얼굴이 잠시 자색을 띤다고 하는데 자금성은 이런 자색으로 건축되었다. 자금성은 명 영락(永樂)18년(1420년) 3년의 공정을 거쳐 완성되었으며 1421년 베이징 천도와 함께 정식 황궁이 되었다.
북경성(北京城)의 남북 중앙선상에 위치하였으며 황가금원(皇家禁苑)의 1/3을 차지하였다. 자금성의 모든 건축물은 중앙 축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었으며 좌우대칭관계와 주종관계가 뚜렷하여 질서정연한 황궁을 이루었다. 자금성의 궁정구(宮廷區)에는 전(殿), 당(堂), 관(館), 사(舍)의 명칭을 가진 건축이 9,999칸(소위 칸이라는 단위는 間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둥 네 개가 지탱하는 넓이를 말한다)반이나 있었으며 건축면적이 15만 평방미터, 대지가 72만 평방미터에 달했다.
물론 지금은 9,000여 칸으로 그 규모가 축소되었으나 “성중의 성” 자금성의 모습은 여전히 대단한 것이다. 자금성의 건축은 크게 전조(前朝)와 내정(內廷)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조는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세 대전으로 구성되는데 이곳에서는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는 한편 각종 중요행사가 거행되었다.
내정(內廷)은 전조의 뒤에 위치한 소궁(小宮)으로 황제가 일상생활과 함께 정무(政務)를 보았던 곳이다. 이밖에 여자들의 거처였던 동서육궁(東西六宮)과 태상황(太上皇)을 위한 외동궁(外東宮)이 있다.
자금성은 단문(端門), 오문(午門), 금수교(金水橋), 태화문(太和門),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건청문(乾淸門),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곤녕문, 어화원(御花園), 신무문(神武門) 순으로 답사한다.
자금성의 출입문은 오문이라고 해야 할 것같다. 단문이 지나면 오문이 있는데 이 오문에서 군의 출정이나 개선 등 군사적 의례가 이루어 졌다고 한다. 오문에 양쪽에 치루가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군사적 고려와 권위를 상징하는 것같다.
자금성의 대문으로 자오(子午 : 남과 북)방향으로 건설되었다하여 오문(午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대(城臺)에는 다섯 개의 높은 누각이 있어 오봉루(五鳳樓)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명, 청 시대 대장군의 출정이나 개선, 전쟁포로를 종묘에 바치는 의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오문의 다섯 개 출입문 중 중앙의 것이 황제 전용문이다. 황제 외에는 결혼식을 위해 입궁하는 황후나 당시의 최고시험인 전시(殿試)의 장원, 방안(榜眼 : 차석) 그리고 탐화(探花 : 3등)만이 딱 한 번씩 사용할 수 있었다. 좌우의 문은 문무대신과 황족들이 출입하였으며 양끝의 두 문은 전시를 치르는 수험생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오문을 지나서 마주친 것은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의 입구인 태화문이 있었다.
이 태화문 앞에 우리의 금천교와 같은 금수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 또한 신격화된 황제와 백성들의 세계를 잇는 다리일 것이다.
태화문을 지나면 태화전이 나타나는데 이 태화전이 자금성의 정전이다.
자금성을 신선이 사는 세계로 생각했다고 하지만 청나라의 국교가 라마교이므로 여기서 자는 부처님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태화문은 전조(前朝) 삼대전의 정문으로 자금성 내 최대의 궁문(宮門)이다. 명대 황제는 때때로 이곳에 보좌를 두고 신하들의 상소를 경청하는 등 정무에 충실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태화문에는 9행 9열의 도금 문정(門釘 : 대문의 장식용 돌기)이 있다. 9는 ‘극양수(가장 큰 홀수)’라는 길한 숫자로 황실의 건축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문정들은 복과 장수를 상징하여 만지면 복을 받는다는 설이 있는데 이 때문에 태화문의 문정들은 매년 칠을 다시 해야 하는 형편이다.
태화전(太和殿)은 1420년 건축된 중국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금란전(金?殿)으로도 불렸으며 명, 청 양대 이곳에서는 황제의 즉위식이나 생일, 황후의 책립, 원단(元旦 : 음력 설)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강희(康熙)황제(1695년)때의 모습이며 황제와 황후가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으로 보존하였다.
전 내 중앙에는 높이 2m의 지평대(地平臺)가 있으며 지평대 위에는 금을 칠하고 용을 깍은 보좌(寶座)가 놓여있다. 황제가 보좌에 오르면 북이 일제히 울렸으며 문무대신들은 품(品)에 따라 단폐(丹陛 : 한백옥으로 만든 삼층의 단)에 서거나 광장을 가득 매웠다. 문무대신들은 삼고구배(三叩九拜 : 3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고 9번 절하는 것)와 숭호(嵩呼 : 천자의 장수를 빌면서 외치는 “만세, 만세, 만만세”)로 황제의 절대 권력에 경의를 표했다. 명, 청 시대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보위에 올랐다.
이 태화전이 자금성에서 가장 지체 높은 전각인 것이 처마의 수척수(垂脊獸) 숫자가 11개로 최고이다.
수척수는 문수(吻獸)라고 하는 지붕의 조형물 중 비첨(飛? : 끝이 올라간 처마)에 있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이 같은 상징물들은 2,100년 이전부터 건축에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화재방지와 건물의 서열표시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만들어 졌다.
가장 뒤 쪽의 조형물은 치문(?吻)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용왕의 아들로 바닷물에 회오리를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어 졌다. 따라서 치문을 수척(지붕의 척추)에 두면 화제를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치문과 함께 다른 수척수들을 배열하게 되었다.
가장 앞에 위치하는 것은 기봉선인(騎鳳仙人 : 봉황을 탄 신선)이며 뒤를 이어, 용, 봉황, 사자, 천마, 해마, 산예(?猊), 압어(押魚), 해태(??), 투우(鬪牛)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들 수척수는 그 크기와 개수에 따라 건축물의 서열을 뜻하였는데 고궁 최고 건축물인 태화전(太和殿)에는 10존, 건청궁(乾淸宮)에는 9존, 교태전(交泰殿)에는 7존이 있으며 동서육궁(東西六宮)에는 각 5존씩 두어 건물의 등급과 서열을 표시하였다. 고궁 내 사람들 사이에 복잡하면서도 엄격한 질서가 있었듯이 건축물 사이에도 서열을 표시한 봉건시대의 상징물이라 하겠다.
태화전의 문살은 우리와 같은 소슬빗살문양인데 이것은 불교의 금강저를 상징했을 것이다.
청나라도 불교국가이니 불교의 이념을 채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단청은 우리의 연화머리초가 아닌 용을 문양을 쓰고 있었다.
황제의 보좌에 닫집이 없는 것은 우리와 달랐고 지붕이 다포식에 겹처마인 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같은데 우리가 중국을 모방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화전의 내부는 2377㎡로 금룡보좌(金龍寶座)로 이르는 통로에는 용의 그림, 중앙에는 금칠을 한 용조각 보좌와 병풍이 놓여 있고, 그 양측에 6개의 금칠을 한 기둥 있다. 천정 가운데는 구슬을 갖고 있는 금용(金龍)이 장식되어 있고, 천정판에는 옥새 채색화가 그려져 있으며. 건극수우(建極綏猷)라는(나라를 새워 편안함을 꾀한다.)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태화전 우측에는 방화수용기가 있었는데 우리 궁궐의 드므와 용도가 비슷한 것으로 방화수 겸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할 것이다.
방화수용기(防火水用器:우리나라 궁궐의 드므)는 중국에서는 동철항(銅鐵缸) 또는 태평항(太平缸), 태평수항(太平水缸)으로 부르고 우리나라 궁궐에 비취된 "드므"와 유사하다.
우리나라의 "드므"는 청동기로 제작하고 단순한 반면 이곳 중국의 동철항(銅鐵缸)은 금(金)을 칠했으며 태화전, 보화전, 건청전 등에 18개가 있다고 하며, 화재시 소방용수로 활용하기 위해서 안치하고 동절기에는 동결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에 아궁이를 만들어 불을 지피게 만들었다.
철항의 바탕에 있는 금귀면상(金鬼面像)을 만지면 악귀를 ?아내고 행운이 온다고하여 많은 사람들이 만지고 있었다.
태화전 뒤에는 사모지붕의 중화전이 있었다.
중화전(中和殿)은 "극단을 멀리하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으면 조화를 가져온다"라는 뜻으로 가로 세로 각각16m인 정방형의 궁전이며 황칠로 된 정병통이 있다. 외조의 3대 전각 중 하나로, 황제가 태화전에서 의식을 거행하기 전 휴식을 취하거나, 대신과 사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때나, 천단, 지단, 선농단 등으로 제사를 떠나기 전 먼저 의식을 치루던 곳으로 쓰였던 곳이다.
청나라 말기, 개혁운동에 실패한 광서제가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덕수궁에 있는 정전(正殿)이 중화전(中和殿:보물 제819호)으로 자금성에서 모방하였을 것이다.
용좌(龍座)위의 편액(扁額)의 글은 사서삼경중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인 윤집궐중(允執厥中)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 다스린다"라는 뜻이다.
중화전 뒤에는 보화전이 있는데 보화전의 잡상은 10개로 태화전보다는 늦은 전각이었다.
보화전(保和殿)은 중화전(中和殿) 뒤편에 있으며. 1420년에 지어졌다. 최초 명칭은 근신전(?身殿)이었으나 가정제(嘉靖帝) 시기에 화재로 소실되고 중건된 후 건극전(??殿)으로 변경하였다가 청(淸)의 순치제 때 보화전(保和殿)으로 개칭하였다.
건축면적은 1240㎡이며 높이는 29.50m이다. 명(明)과 청(淸) 양 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명대에는 큰 의식을 치르기 전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청대에는 섣달 그믐, 정월 15일, 귀족과 12품 대신을 위한 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였던 곳이다.
보화전은 황제가 집무를 보던 곳으로, 용좌(龍座)위의 편액(扁額)의 글은 황건유극(皇建有極) "황제가 먼저 그 다스리는 볍을 세워야한다."는 뜻으로 사서삼경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이다.
보화전에는 우리는 답도라고 하는 단폐(丹陛)의 거대한 대리석으로 된 운룡대석조가 있는데 길이가 17미터에 약250톤이 된다고 한다.
보화전을 지나면 내정의 구역이 시작되는데 건청문을 지나 건청궁이 나온다.
건청문의 모습이다.
건청문에는 이렇게 암, 수 황금사자가 지키고 있다.
건청궁의 모습이다.
1420년에 건축된 내정 최고의 건축물이다. 쌍용(雙龍)과 옥새(玉璽)도안을 장식으로 사용하여 황제의 건물임을 표시하였다. 높이가 24m, 폭이 9칸으로 명, 청 시대 황제의 침궁이었으며 황제 사후, 시체를 잠시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보좌 위에는 “正大光明”이라고 쓰여진 편액이 있어 이 뒤에 건저갑(建儲匣)을 숨겨두었다. 이 건저갑에는 황권계승의 행방을 기록한 조서(詔書)를 넣어 두었는데 황제가 죽으면 이를 개봉하여 차기 황제를 세상에 알렸다. 이것은 황자들의 황권다툼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옹정(雍正)황제 때부터 시행되었다.
건천궁의 내부에는 청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643년 ~ 1661년)인 순치제의 글씨인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扁額)이 금룡보좌(金龍寶座) 위에 걸려있는데 "바른 것을 밝힌다."는 뜻으로 통치의 기본은 바른데서 출발한다는 뜻 일 것이다.
청나라 다섯번째 황제인 옹정제는 그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후계자를 지명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뒤를 이을 황태자의 이름을 문서에 적은 뒤, 봉인한 상자 속에 넣어 <정대광명> 편액(扁額) 뒤에 감춰 두었다.
황제가 사망했을 때 편액(扁額) 뒤 상자의 봉인을 뜯고 이름을 후게자를 확인한 뒤, 새로운 천자를 공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황제의 만년에도 차기 황태자가 누가 될지 모르므로 왕자들은 모두 황제가 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제의 환심을 사러 눈치를 보아 레임덕(lame duck)현상으로 인한 권력누수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방법은 후계 황제에게 계속 이어져 청나라의 독특한 황위계승 방법이 되었다.
건청궁 뒤에는 교태전이 있었는데 사모지붕이었다.
교태전(交泰殿)은 내전의 가장 큰 궁궐인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의 작은 전각으로 현재의 건물은 1798년 청 왕조의 제7대 황제(재위 1796년 ~ 1820년)였던 가경제(嘉慶帝) 때 건축한 건물이다.
명나라 때는 황후의 침실로 사용 되었고, 청대에서는 옥새의 보관과 황후의 공식 업무를 거행하는 곳으로 용도가 바뀐 곳으로. 당시 이곳은 황후 자신 뿐 아니라 황귀비, 귀비, 비 등 황제의 여자들의 생일이나 길일에 행사를 벌이던 곳이다. 건물 꼭대기에는 동으로 도금된 동그란 절병통이 있고 칠보 장식의 기와가 처마 4곳을 바치고 있으며 들보에는 용과 봉황과 함께 옥새 무늬가 새겨져 있다.
내부의 보좌(寶座) 뒤편 벽면에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 강희제가 "무위(無爲)라고 쓴 편액이 있는데 무위란 도가에서 나온 말로"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치에 맡겨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라는 말이다.
교태전 뒤에는 곤녕궁이 있었는데 침대도 전시되어 있었다.
네이팅[?廷]의 후삼궁(后三?) 중 하나로 자오타이뎬[交泰殿] 뒤편에 있다. 1420년에 축조되었고,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1655년에 선양[沈?] 선경청녕궁(盛京???)을 모방하여 다시 지었다. 남향의 건물로 명대(明代)에는 황제의 침궁(??)으로 사용되었다. 청(淸)의 순치(順治) 12년에 개축 후, 이곳은 샤머니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주요 장소였다.
곤녕궁 구경을 마치고 곤녕문을 지나 뒤에 있는 어화원으로 갔다.
곤녕문이다.
어화원의 전경이다.
원래 이름은 궁후원(宮後苑)으로 후삼궁(后三宮)뒤에 있다. 자금성 내부의 정원이며 고궁관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명소이기도 하다. 중심건물은 흠안전(欽安殿)으로 자금성 내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명(明)대 건물이라고 한다.
흠안전은 여관(女官)들의 거쳐였던 우방정휘각(右方廷暉閣)과 마주서 있으며 만춘정(萬春殿), 천추정(千秋亭), 어경정(御景亭) 등이 어화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어화원은 황궁의 정원답게 곳곳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되었는데, 정원의 바닥은 화석자로(花石字路)라고 하는 아름다운 길로 장식해두기도 하였다.
어화원에는 수많은 향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수석들도 있었으며 퇴수산이라는 돌로된 동산도 있었다.
그리고는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금성의 북문이다. 황제와 황후가 성 밖으로 행차하는 통로였으며 비빈(妃嬪)들이 잠단(蠶壇)으로 친잠(親蠶)행사를 나서는 출입구이기도 하였다. 원래는 종과 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매 시각마다 종과 북을 쳐 시각을 알렸다.
1644년에는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설자리를 잃은 숭정(崇禎)황제가 이 문으로 도망쳐 자살하기도 하였다. 대 문학가 곽말약 선생의 친필인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편액이 걸려있다.
신무문에서 나오면 나지막한 언덕이 있는데 이것이 경산공원이고 그 위에 정자가 만춘정이라고 한다.
자금성도 우리의 동십자각처럼 각루와 해자인 금수하가 있었다.
금수하는 통자하(筒子河)라고도 하며 황성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 강이다. 중국 고성들은 대게 성 주변으로 해자(垓字 : 땅을 파고 물을 채운 방어시설)를 팠는데 고궁은 황성답게 강줄기를 끌어 온 것이다.
성 밖의 것은 외금수하(外金水河), 오문(午門)안쪽의 것은 내금수하(內金水河)라고 하며, 외금수하의 강폭은 52m이며 수심은 2m, 길이는 3.8km에 달하고 있다. 각루는 성벽 네 귀퉁이에 세워진 망루다. 독특한 구조로 특히 유명하며 28개의 처마와 72개의 용마루로 구성되었다. 국경절(중국건국기념일, 10월 1일)에는 각루의 전등을 모두 켜는데 조명이 비추는 각루와 금수하에 비친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의 마지막 일정은 라마교 사찰인 옹화궁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옹화궁 입구이다.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가 1693년에 왕자들을 위한 별궁으로 지었다. 넷째 아들 옹친왕(윤진)에게 하사하면서 옹화궁이라 불리게 됐다. 훗날 옹친왕이 옹정제가 되자 황제를 배출시킨 곳임을 드러내고자 붉은색 담과 황금색 유리 기와로 저택 전체를 화려하게 꾸며 건물을 한층 격상시켰다.
평소 소수민족 통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옹정제는 그 노력의 하나로 티베트 불교를 믿었다. 옹정제 사후에 티베트 불교식으로 예불을 드린 것을 계기로 옹화궁은 1744년 정식 티베트 불교 사원이 됐다. 이후 불교에 심취했던 건륭제의 명령으로 확장하여 여러 불교 건축양식이 혼합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만복각(완푸거:万福?)'에 있는 미륵불은 전체 높이가 26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목 불상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베이징 둥청구(?城?, 동성구) 한족지구(?族地?) 내의 라마교인 장전불교(藏?佛?) 최대 사원의 하나로 1961년 청대 고건축으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1983년 한족지구전국중점사원(?族地?全?重点寺院)의 하나로 등록되었다.
옹화궁은 강희(康熙) 33년(1694) 강희제가 내성(?城)의 동북지역에 넷째 아들인 윤진(胤?)을 위해 지었으며 초기에는 사야부(四?府)로 칭하였다. 윤진이 친왕(?王)으로 봉해진 후 옹왕부(雍王府)로 바뀌었고 이곳 여의실(如意室)에서 1711년 홍력(弘?)이 태어났다. 1723년 윤진이 제위를 계승하여 옹정제(雍正帝)가 되어 쯔진청(紫禁城)으로 들어가며 옹정 3년(1725) 옹왕부(雍王府)는 행궁으로 승격되어 옹화궁으로 칭해졌다. 옹정 13년(1735) 옹정제의 사망으로 궁내에 옹정제의 시신이 안치되었으며 이로 인해 주요 전각이 황금색 유리 기와로 바뀌었다.
옹정제 재위시기에는 옹화궁의 중로(中路)와 서로(西路)가 장전불교의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건륭제(乾隆帝) 즉위 후 건륭 9년(1744) 옹화궁 중로(中路)와 서로(西路)가 정식 장전불교의 사원으로 바뀌고 주요 전각은 불전(佛殿)으로 바뀌었으며 동로행궁(?路行?)은 계속 황실에서 사용하였으나 실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궁내 주요 건물로는 패루(牌?), 소태문(昭泰?), 옹왕부의 정문이었으나 불전으로 바뀐 천왕전(天王殿), 정전(正殿), 옹왕부의 내문(??)이었던 영우전(永佑殿), 침전이었던 법륜전(法?殿), 만복각(万福?) 등이 있다.
옹화궁도 들어가는 입구에는 패루가 있었고, 표를 사서 들어가는 입구에도 패루가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잎은 떨구었지만 은행나무가 길 양쪽으로 심어져 있었다.
먼저 마주친 문은 소태문이었고 옹화궁도 별궁으로 사용했다고 수척수가 4개가 있었다.
소태문을 들어가자 당간지주도 보이고 전각들이 옆에 보이는데 앞에 옹화문이 있었다.
옹화문에도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는데 어떤 분인지는 확인이 어려웠다.
옹화문은 사천왕문에 해당되는데 사천왕이 지키고 있었다.
옹화문을 지나면 동정로라는 청동향로가 있고 그 뒤에 비가 모셔져 있는 비각으로 보이는 전각이 보이고 정면에는 옹화궁이 보인다.
옹화궁 오른쪽에는 밀종전이 있는데 밀종전 안에는 다양한 보살들이 보였다.
옹화궁 왼쪽 귀퉁이에는 마니차가 있었고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옹화궁 앞에는 동탑이 있었는데 유리관으로 덮어 놓았다.
옹화궁 안에는 삼존불이 있었다는데 밖에서 보니 석가모니불만 보였다.
옹화궁 뒤에 법륜전이라고 생각했는데 편액은 영우전이다.
영우전 뒤에 있는 것이 법륜전인 모양이고 여기는 수척수가 6개이다.
법륜전의 부처님을 보았는데 티벳 불교의 창시자라고 한다.
옹화궁 법륜전에는 겔룩파로 알려진 티베트 불교 종파를 창시한 라마 총카파(宗喀巴. 1357~1419)의 불상이 있다.
총카파는 청해성 황중현(湟中縣) 아무드 지방의 총카부락에서 태어나서 출생지에서 그의 이름을 따왔다. 7세 때 출가하여 16세 때 티베트로 가서 현교에 관해 연구하였으며 다시 밀교에 오의(奧義)를 깨닫기 위해 타포산(山)에 들어가 수행한 끝에 겔룩파라는 독자적인 밀교 종파를 창시한다.
총카파는 독신생활을 주장하여 승가의 계율을 회복하고 노란 승복을 입도록 하여 이전의 홍모파(紅帽派)와 구별하여 황모파(黃帽派)로 불린다. 황모파는 몽골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몽골인들의 도움으로 1642년 이래 총카파의 후계자들이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가진 티베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옹화궁에 있는 총카파상 중에 가장 후대인 1924년에 법륜전에 안치된 총카파상이 높이 610cm이며 옹화궁 대라마 백보인(白甫仁:몽골족)이 수집된 기부금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얼굴은 고귀하고 자상한 표현을 하고 있으며 거대한 후광은 불꽃 형상으로 찬란하게 조각되어 있다. 황금날개를 가진 금시조와 구름 속에 있는 천녀상이 총카파상의 생기를 주고 있다.
법륜전 뒤로 돌아가니 만복각이 있었다.
만복각 안에는 목조미륵대불상이 있는데 백단나무 하나로 만들어졌으며 크기는 26미터로 세계 최고이며 26미터중 18미터는 지상으로 나와있고 8미터는 땅에 묻혀 있다고 한다.
만복각은 공중에 양쪽의 영강각과 연수각을 연결하는 비랑이 있어 눈요기를 주고 있었다.
여기도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고 주변에 전각들도 많이 있었다.
이것으로 간략하게 북경여행을 했지만 북경은 상당한 시간을 두고 찬찬히 구경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자금성은 자금성 구경만 하루를 잡아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코리안타운의 자하문이란 음식점에서 먹었다.
중국은 과거 낙후된 나라가 아니고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수도 북경은 건물도 현대화되어 우리나라 서울에 손색이 없는 도시가 된 것같다.
중국을 보면 우리가 더욱 분발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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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수강산 원문보기 글쓴이: 숲길(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