族譜(족보)가 뭐 길래 ?
족보는 한국 사회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트레이드 마크(Trade Mark)라 생각한다. 우리는 족보 와 가문(家門) 얘기가 나오면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것에 우선 하고, 그 만큼 중요한 만큼 말도 많고 탈 도 많고 가짜도 많고 허구도 많고,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으나 그래도 믿어야 되는, 또 믿고 있는 무엇과 너무 유사 한 점이 많은 점이 일반인의 정서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최근에 남녀평등을 고려한 가족법의 개정으로 족보는 새로운 도전과 또 필요성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중요한 문서로 자리매김 하게 될 것 같다.
향후 족보는
가족법의 개정,
한문을 아는 세대의 퇴장.
사회적인 변화,
그리고 기록 매체의 발전 등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은, 성종 7년(1476년)에 간행되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성화보(成化譜 : 초기 본이 아님), 이 보다 약간 늦은 시점에 외손까지도 기록한 현대의 족보와 유사한 문화 류씨 (文化 柳氏)의 가정보(嘉靖譜). 그리고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기해대보(己亥大譜)라고 기록에는 전한다. 이것으로 우리나라의 족보는 15세기가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설(說)이 많지만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15세기 이전의 국가의 왕력(王歷)이나 역사 등 공적(公的 )성질의 것이 사적(私的)인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 고려 시대에는 족보란 것이 없었을까?
물론 권문세도 가(權門 勢道 家)등 특수 계층은 공사적(公私的)으로 기록은 있었을 것으로 두꺼운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다. 학자들이 주장이나 사료(史料)에는 삼국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조 말 또는 일제시대까지 국민들 중, 성(姓)과 이름이 없는 계층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도 성 없이 이름만 나오는 인물들이 많은 점이 이를 말해준다. 이것은 그 시대에는 성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 필요성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해방 또는 6.25 전쟁 후
족보의 분실 등에 따른 재편집 때,
특히 소위 명문 계층의 족보에
하층민(下層民)의 위장 전입이 많았다 한다.
이 족보 때문에
지금도 문중(門中) 에서는 심심치 않는 일들이 벌어진다.
족보의 기록이 잘못 되었다느니, 주로 동생이 벼슬을 하고 출세했다 하여 못난 형을 제치고 종손(宗孫)으로 등재되거나, 한 파(派)가 몰락하게 되었을 때 성공한 다른 파(派)가 낙향(落鄕)한 못난이 파 보다 몇 대의 대(代)를 올리거나 아니면 상대를 인위적으로 낮추어 기록했다는 그런 것과, 옛날엔 제사 때 처마 아래에서나 서던 서자들이 출세하여 상석(上席 )에 앉아 어엿한 제주(祭主)가 되었다는 가십성 이야기도 주변에서 가끔 보인다.
사실 우리 집도(몰락한 파) 이런 경우에 휘말려 편찬된 족보의 종류에 따라 대(代)가 바뀐 경우가 있어서 여간 혼돈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한국족보연구소와 대학에서 상대(上代)에 논쟁이 되는 가문의 족보 및 사실을 확인하려는 후손들이 의뢰하여 3년여에 걸쳐서 700 page 에 달하는 연구서를 발간하였다.
한 가문의 체계를 정리한 것이라기보다는 고려 초기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종합 연구서라 할 만큼 정사(正史)에서부터 문집 그리고 혼인 관계에 있는 상대편의 족보에 이르기까지 인용 자료도 방대하였다. 솔직히 이것을 읽기 전에는 족보에 대해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모든 족보의 조상의 시조가 삼국시대나 고려 초가 많고 기록은 훨씬 후대인 15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는 사실(史實)적이나 후대로 갈수록 조상의 미화(美化)등 그 신뢰도가 떨어진다 한다
한국 성씨 중에 고려 초에 시조(始祖)가 많은 것은, 태조 왕건(王建)이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호족들을 회유, 분산하기 위하여 賜姓(사성 : 임금이 성을 하사함)을 주어 한 가문을 이루게 하여 명예를 주거나 또 힘센 중앙 귀족은 지방으로 내려 보내는 명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족보에 얽힌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것은 많은 부분이 논 픽션( Non-Fiction) 이고, 편의상 일인칭(一人稱)을 쓰겠다. 내가 중학교(1965)에 다닐 때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한국일보의 신문 사회면 톱(Top)기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서울역 앞에서 지게꾼으로 변신한 가까운 친척 형님의 사진과 이야기 이었다.
그는 대단히 총명했고, 한학(漢學)에 조예가 있었다. 6.25 전쟁 후 부역 때문에 구속되어 오랫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 때는 낮이면 국군과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자유세계이고, 밤이면 빨치산이 설치는 좌익의 세상으로 바뀌는 그 틈바구니에 끼인 수많은 민초(民草)들은, 강압에 못 이겨 좌우를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째 던 내가 어릴 때의 일이라서 정확한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른다.
그는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고 모범수로써 늦은 나이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가 세상에 나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울 역에서 지게 꾼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이르고 결혼과 실패 가족의 사망 등 불행의 연속이 이었다.
모범수로서 옥중에서의 작시(作詩) 능력을 지켜본 어떤 사람의 권고에 따라 "내 인생 내 지게를 지고" 란 제목으로 수기를 써서 출판도 했고 , "생명은 불꽃처럼 " 이란 영화로도 제작되었었다. 이 무렵이 내가 신문 사회면에 기사를 본 시점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불치의 병에 걸려서 투병 생활을 깊은 산중에 오래 동안 하기도 하였다는 것과, 덕분에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것이 이었다. 나도 생활에 바빠 잊어버릴 때쯤 집으로 그 분 한 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집으로 오라는 요청도 거절 한 채, 묵고 있는 여관에서 한번 만나자는 것이다. 그 곳엘 갔더니, 집에 가면 자기의 병이 혹시 전염 될 까봐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만큼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 이었다.
몇 마디의 인사가 끝난 후, 그 분은 갖고 온 손가방을 열며 자료를 내게 보이면서 설명하는 것이 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규장각으로 대학(大學)도서관으로 다니면서 XX "모" 씨의 족보가 맏집과 동생의 순위가 뒤 바 뀐 잘못된 점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의 복사본 들이 였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까, 그래도 소위 대학을 나온 나는 그것을 이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게 보여 주러 온 것이었다. 얼마 후 그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 하셨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그 불치((不治)의 병을 앓고 있으면서, 정말로 가난한 생활 속에서 왜 그가 족보의 사실 규명(糾明)을 위해 그토록 노력을 하였을까? 과연 족보란 그렇게 값있는 것일까? 젊음을 감옥에서 보낸 긴 세월이 아깝고 억울해서라도 다른 뜻있는 것은 없었을까? 라는 아쉬움과. 아니면 사회에 적응을 못 하신 것인지, 그 때 그 자료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 궁금하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것은, 서울 어느 곳에 살고 있을 곧게 자란 단 하나의 아들과 어머니가 잘 되길 고대한다.
현재 한국성씨는 약 270여 가지가 조금 넘는다 한다.
과거 족보의 시작은 귀족주의 배타주의 적인 측면도 있었다면, 오늘날의 족보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혈통주의와 귀족주의를 표방하여 배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다만 한국전통을 지키며 선조나 조상님들의 훌륭한 언행을 본받아 부끄러운 후손이 되어서는안 된다는 사표(師表)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族譜(족보)가 뭐 길래?
[출처] 族譜(족보)가 뭐 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