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서광(Morgenröte; 아침놀)》(1881) 제50절에서 “혼취감(昏醉感; Rausch; 도취감陶醉感)”의 심대한 부작용을 아래와 같이 야릇하게 경고한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도취”는 “술에 거나하게 취함, 어떤 것에 마음이 쏠려 취하다시피 됨”이라고 풀이되며, “혼취”는 “정신이 없도록 술에 취함”이라고 풀이된다.
혼취감을 믿는 신앙(Der Glaube an den Rausch) ㅡ 드높게 고양되는 황홀감에 혼취하는 순간들을 탐락(耽樂)하는 인간들은, 그러니까 평소에는 완전히 무감하게 시큰둥할뿐더러 신경력(神經力)마저 낭비하므로 늘상 비참하며 불행하다고 자감(自感)하는 인간들은, 이렇게 혼취하는 순간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진정한 자신(selbst)과 “자아(sich; ego)”를 진실로 확인하는 순간들이라고 인지하는 반면에 자신들의 비참과 불행은 “비자아(非自我; Ausser-sich; 비아非我; 자아밖엣것)”들의 소치라고 인지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소속한 환경에, 살아가는 시대에, 존재하는 세계전체에 보복하려는 억하심정을 품는 까닭이다. 그들은 이런 혼취상태가 그들의 진정한 삶이요 진실한 자아라고 인지한다. 그래서 그들을 정령에나 도덕에나 종교에나 예술에 혼취시키잖는 모든 것은 그들의 눈에는 혼취를 반대하는 훼방꾼들로 보인다. 폭음해버릇하는 술고래 같은 이 혼취꾼들은 인류에게 적잖이 해롭다. 왜냐면 그들은 스스로에게도 이웃에게도 불만스러워하는 잡초의 씨앗, 시대와 세계를 혐오하는 잡초의 씨앗, 특히나 세계-피로(世界-疲勞; 세계-탈진; Welt-Müdigkeit)를 조장하는 잡초의 씨앗을 뿌려대는 불평분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들도 이런 씨앗들보다 더 참담하고 장구(長久)한 결과들을 초래하지는 못하리라. 왜냐면 도무지 자제할 줄 몰라서 완전한 망아지경(忘我之境)에 빠져들어야만 자신의 내밀한 쾌감을 체험할 수 있는 무절제하고 기상천외한, 심지어 천재들마저 포함하는, 반미치광이(半狂人)들의 고상하고 미미한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런 씨앗들도 땅을 쪼개고 하늘을 무너뜨릴 만치 위압적이고 지독한 결과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범죄자는 출중한 자제력과 희생정신, 용의주도한 분별력을 꽤나 자주 발휘할뿐더러 그를 무서워하는 타인들에게 그의 이런 자질들을 부단히 인지시킨다. 이런 범죄자 때문에 인생의 하늘은 위험천만하고 암울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하늘의 공기는 언제나 상쾌하고 기운차다. ㅡ 하물며 이 열광적인 혼취꾼들은 혼취야말로 진정한 인생이라고 믿는 신앙을 인류에게 주입하느라 전력투구한다. 그것은 실로 끔찍한 신앙이다! 미개인들이 “화주(火酒; Feuerwasser; 독주毒酒)”에 혼취하여 급속히 타락하고 파멸하듯이, 인류의 대다수도 여태껏 영혼의 화주들에 혼취하는 감정을 탐락하다가, 그리고 그런 혼취감을 갈구하는 욕망을 집요하게 되살리는 자들 때문에, 서서히 철저하게 타락했다. 어쩌면 그런 혼취감이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
☞ 니체의 반그리스도 (안티크리스트) 서문; 기독교를 겨냥한 저주 용기 고독 차라투스트라 음악 진리 양심 경제의지 자기자유 독자의 조건; 펠리샹(펠리시앙) 롭스의 그리스도(크리스트)와 나누는 사랑
아랫그림은 벨기에(Belgie) 화가 펠리시앙(펠리샹) 롭스(Félicien Rops, 1833~1898)의 1882년작 채색석판화 〈씨앗들을 흩뿌리는(파종하는) 사탄(Satan semant des graine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