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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간 팔송 윤공 묘갈명 병서(大司諫八松尹公墓碣銘 幷序)
숭정(崇禎) 12년 모 갑자에 통정대부 이조 참의 윤공(尹公)이 이산(尼山) 고을 집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고, 그해 모월 모일에 그 고을 선산에 장사 지냈다. 그 이듬해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에 공의 아들 순거(舜擧)씨가 아우 세 사람과 함께 공의 행장과 공의 소차(疏箚) 한 권을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주어 나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묘갈명을 부탁하기를,
“선친께서 곧은 지조와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눈치 보지 않고 용맹스럽게 나아가 조정에서 진언한 것은 대부분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고 남들이 기휘(忌諱)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흘겨보는 자들이 당세에 담처럼 늘어서서 기회를 타고 틈을 노려 억지로 작은 허물을 들추어내어 진실을 어지럽혔습니다. 저는 선친의 덕이 후세에 믿음을 받지 못할까 오직 두렵기에 그대의 한 마디 말씀을 얻어 묘도에 표석(表石)을 세우고자 하니, 이는 그대가 아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본래 공의 일생을 평소 공경해 왔던 터라,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손을 씻고서 공의 소차를 펼쳐 엄숙하게 읽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 1월에는 심양(瀋陽) 오랑캐의 침략에 공이 사간(司諫)의 신분으로 올린,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고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의 처벌을 청한 계사가 하나, 인대(引對)할 때에 성상께 도성을 사수할 마음을 굳게 정하도록 청한 계사가 하나, 역대 임금의 능침이 모두 임진강(臨津江) 이남에 있기에 임진강을 수비할 것을 청한 계사가 하나가 있다.
2월에는 어가를 따라 강화도에 들어가 성상 앞에서 나라를 그르친 묘당의 죄를 통렬히 탄핵한 계사가 하나, 오랑캐 사신 유해(劉海)가 와서 임금과 대등한 예를 요구하자 공이 집의 엄성(嚴惺)과 함께 입대하여,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욕되게 한 한두 훈귀(勳貴)들의 죄를 낱낱이 열거하고, 또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을 참수(斬首)하도록 청한 계사가 둘, 국사를 그르친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한 계사가 하나, 화친에 대해 논핵한 상소가 하나 있다.
무진년(戊辰年, 1628, 인조 6) 5월에는 의정부 사인으로서 명을 받아 평안도(平安道)를 살피고 돌아와 올린, 도내의 폐단을 진술한 만 자에 가까운 장계가 하나 있고, 8월에는 사간에 제수되어 올린, 당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기에 조세를 감면해 줄 것을 청한 상소가 하나 있다.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 2월에는 대사간에 제수되어 올린, 재이(災異)로 인해 아뢴 수천 마디나 되는 상소가 하나 있고, 3월에는 이조 참의에 제수되어 올린, 내실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기를 청한 상소가 하나 있다. 8월에는 대사간에 제수되어 올린,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군수에 보탤 것을 청한 여섯 조목의 상소가 하나, 비국의 신료들과 함께 인견했을 때에 올린 계사가 하나, 화친을 끊은 후엔 진작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에 군량과 병력을 충분히 갖출 방법을 강구한 몇 천 자 되는 차자가 하나 있다. 이는 많다고 하겠으니 옛사람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공이 평소 마음에 품었던 생각이 여기에 다 담겨져 있다.
세상사람 중에 스스로 올바르고 곧다고 여겨 일을 논하는 데 날카로운 사람도 한 번 진언하고 두 번 진언했다가 대답을 얻지 못하면 나태해져 뒷걸음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더구나 임금의 진노를 받아 두려워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때에 그 뜻을 접고 물러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공의 정성은 타고난 천성으로 남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공이 나라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너무 고집스럽게 화친을 배척하여 함부로 강한 오랑캐를 도발했다고 한다. 아, 나로서는 참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에 조정에서 공을 처벌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이 어찌 빈말로 화친을 배척한 분이겠는가.
충분한 군량과 병력을 갖추는 것을 나라를 지킬 근본으로 삼고,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는 것을 충분한 군량을 갖출 근본으로 삼지 않았는가. 위로 올라가 종묘의 음악을 혁파하고 제수와 수라를 줄이는 일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다 말하였으니, 귀신에게 물어봐도 의심할 여지없는 그 참된 정성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아뢴 계책 또한 허술하지 않았다.
모르겠으나, 한(漢)나라 위상(魏相)이 조 영평(趙營平)에게 한 것처럼 당시의 재상들이 공의 계책을 임금에게 아뢰어 채용하였던가? 공의 계책 중 열에 두세 가지도 채용하지 못해놓고 일이 잘못되면, 겁나서 나서지 못하던 자나 요행을 바라던 자들은 입을 놀려 기회를 삼고, 공과 원수진 자들은 그 단점을 꼬투리삼아 무함하였으니, 이는 육경여(陸敬輿)와 호담암(胡澹庵)이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일이다.
공의 휘는 황(煌)이고, 자는 덕요(德耀)이며 고려 영평백(鈴平伯)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휘 탁(倬)은 경학(經學)으로 벼슬에 나갔는데,
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이 임금 앞에서 천거하여 중종(中宗) 때에 10년간 대사성을 지냈다.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휘 선지(先智)는 가선대부의 품계와 절도사의 관직으로 생을 마쳤는데, 당시 사람들이 떠받들고 무관(武官)으로 보지 않아 승지의 직임에까지 이르렀다.
공에게는 조부가 된다. 휘 창세(昌世)는 돈독히 효성과 우애를 다하였으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는데, 죽은 뒤에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공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묘갈명을 지었다. 부제학 청주(淸州) 경혼(慶渾)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신미년(辛未年, 1571, 선조 4)에 한양리(漢陽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젖니를 갈기도 전에 이미 어른스러워서 놀이를 좋아하지 않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니, 모부인이 항상 번거롭게 가르칠 필요가 없다며 참으로 효성스럽다고 칭찬하였다. 장성해서는 과거 공부에 매진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있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 선조 26)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27세에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 알성시(謁聖試)에 을과 제1등으로 급제하고, 선발되어 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 선조 32)에 승문원 부정자로 거산 찰방(居山察訪)을 겸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600, 선조 33)에 박사로 승진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에 규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사헌부 감찰과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그해 8월에 사간원정언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다. 일을 논할 때에는 피차를 구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오직 의리가 어떠한가를 따지니, 동류들 중에 떠들썩하게 공을 비난하는 자들이 많았다. 공이 마침내 탄식하기를,
“옛날의 군자들은 함께 어울리면서도 편당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 모양이란 말인가.”
하고는 즉시 칭병하고 나오지 않았다.
체직되어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병조와 예조의 좌랑을 지내고 다시 전적과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 선조 35)에 수원부 판관(水原府判官)에 보임되었다. 수원부가 임진왜란을 겪고서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터라, 공을 위로하는 친구가 있었다.
공이 겸손하게 사례하기를,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두렵지, 고을이 피폐한 것은 내가 두렵게 여기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정(善政)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에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604, 선조 37) 여름에 서용되어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가을에 통제사의 부름에 응하여 종사관으로 나갔다. 겨울에 북청 판관(北靑判官)에 제수되었다.
북청은 무관의 장수가 백성을 소와 양처럼 다스리고, 풍속도 사나운 것을 숭상하고 문교(文敎)를 도외시하던 지역이었는데, 공이 한 번 다스리자 부역이 줄고 집집마다 글을 읽게 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 광해군 즉위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때 이이첨(李爾瞻)이 북쪽으로 유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을 만나 지극히 친근하게 대하였으나, 공은 그 사람됨을 싫어하여 도성에 와서는 전혀 왕래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정권을 잡자 공의 고향 친구인 한찬남(韓纘男)이 매번 찾아와 이이첨의 뜻을 전하면서 공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공은 정색을 하고 따르지 않았다.
기유년(己酉年, 1609, 광해 1)에 외직을 구하여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는데, 북청을 다스릴 때보다 더 주밀하게 다스렸다. 부지런히 움직여 복잡한 일을 해결하고 검소한 생활로 재정을 늘리니, 백성들의 세금이 이 때문에 줄어들었다. 임기를 채우기 전에 토호(土豪)들에게 모략을 당했으나, 백성들은 그 뒤에 사모하고 칭송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 7)에 봉상시 첨정을 거쳐 군자감 정으로 전직되었다. 병진년(丙辰年, 1616, 광해 8)에 간사한 무리들이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를 무함하여 옥사를 만들었는데, 공의 장남이 최기의 사위였기에 공이 최기를 문안하였다. 이에 간사한 무리들이 공을 탄핵하여 법망에 걸려들게 되었으나, 마침 하늘의 도움으로 파직되는 정도로만 그쳤다. 이때부터 공은 감히 도성에 살지 못하고 고향 이산(尼山)으로 물러나 5, 6년을 지냈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에 금상께서 반정하여 두루 훌륭한 인재를 초빙하였는데, 공이 가장 먼저 청선(淸選)에 선발되었다. 사헌부에서는 장령을 두 번, 집의를 세 번 지냈으며, 사간원에서는 사간을 다섯 번, 대사간을 네 번 지냈으며, 홍문관에서는 수찬부터 시작하여 응교에 이르렀으며, 세자시강원에서는 보덕을 여러 차례 지냈으며, 의정부에서는 검상에서 시작하여 사인에 이르렀으며,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를 지냈으며, 이조에서는 참의를 지냈다.
외직으로는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되었을 때엔 언관이 유임을 청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어서는 임기를 채우고 돌아왔다. 공이 40여 년간 벼슬길에 있으면서 차례로 세 임금을 섬겼으나, 시류(時流)와 맞는 때가 적어 쌓아놓은 장작더미 같은 곤욕을 치르다가 계해년 이후에야 진로가 비로소 열렸던 것이다.
공은 나라의 은혜에 감격하여 직분상 걱정할 일을 생각하였다. 처음 장령에 제수되었을 때에는 폐세자(廢世子)를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자 혼자서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 역적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 검찰사(檢察使)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군대를 시찰하러 갔다가 퇴각하자 대간(臺諫)은 감히 말을 못했는데, 공은 차자를 올려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이르러선 공의 풍모와 절조가 경외할 만큼 위엄이 있었으니, 먼 지방 사람들이 모두 얼굴 한 번 보기를 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주 낭패를 당하고 견책을 받았으며 자주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다행히도 성상의 보살핌에 힘입어 무사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 오랑캐가 침략할 당시 공은 병든 몸으로 집에 한 달간 머물고 있었다. 급보를 듣고는 부축을 받으며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즉시 조목별로 방어책 몇 가지를 갖추어 체찰사 김류(金瑬)에게 서면으로 올렸으나 김류가 그 계책을 쓰지 못하였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평소 화의(和議)를 주장하던 자들이 공을 원수처럼 흘겨보았는데, 진실로 공을 해치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렇게
할 명분이 없었다. 오랑캐가 서신을 보내어 가장 먼저 맹약을 파기하도록 도모한 사람을 보내라고 요구하자 의정부에서 공에게 앙갚음을 하려 하였는데, 상께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참판 정온(鄭蘊)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자수하였는데, 공의 아들 윤문거(尹文擧)가 공이 항상 남보다 먼저 의리에 앞장섰던 것을 염려하고 또 공의 병이 위독한 것을 걱정하여 감히 김상헌과 정온의 일을 공에게 말하지 못하였다.
그 뒤 의정부에서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자수한 척화신(斥和臣)을 다스리도록 하자, 공이 이때에 두 공보다 늦은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겨 문거를 호되게 질책하고, 즉시 자수하는 상소를 올려 “시종 척화를 주장한 자는 신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아뢰고는 스스로 가겠다고 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안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한두 명의 훈척(勳戚)이 군사를 사주하여 장전(帳殿)에서 칼을 빼들고 척화신을 보내라고 주청하니, 의정부에서 따라서 동조하여 마침내 자수한 사람과 기타 십여 인을 포박하여 오랑캐의 군영으로 보내자고 들어가 아뢰었다.
많은 벗들이 공을 찾아와 울면서 이별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로 성 밖에 있는 여러 아들에게 남길 편지를 쓸 뿐이었다. 이때 간혹 한 가닥 바른 의논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격앙하여 말하기를,
“옛날에는 나라가 망할지언정 우리의 올바른 선비를 포박하여 적에게 넘긴 적은 없었다.”
라고 하였다.
상께서 대신(臺臣)의 말을 받아들여 포박하여 보내는 인원을 줄였으므로 공이 모면하였다. 이에 공을 모르는 자들은 공이 계략을 써서 호구(虎口)에서 벗어났다고 의심하였고,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유언비어를 만들어 실상을 바꾸었으니, 참으로 장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 후 대가가 환도한 뒤에 상께서 공이 지난날 올린 상소 가운데 ‘강화도를 불태우고 평양에 머문다.’는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 의정부에 명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의정부에서 처벌해야 할 열 사람의 명단을 뽑아 아뢰었는데, 나도 여기에 포함되었고 공의 이름이 첫머리에 있었다. 4월에 공은 영동현(永同縣)으로 유배되었다. 배소에 이르러선 죄인의 의복ㆍ음식ㆍ기물ㆍ거마가 보통사람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여겨 모두 소박한 것을 사용하였다. 그해 10월에 사면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638, 인조 16) 8월에 병든 몸을 이끌고 이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평소 살던 집에 거처하지 않고 선영 아래 분암(墳菴 묘지에 세운 제각(祭閣))에 지내면서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도성을 떠난 일은 사직을 보존한다는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오랑캐를 돕는 군대가 서쪽으로 떠난 지금에 와선 사대부로서 의리상 세상에 설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5월에 갑자기 한기가 들었는데, 아들에게 붓을 잡게 하고 유계(遺戒)를 짓기를,
“너의 아비는 시정(時政)을 함부로 논하다가 임금에게 죄를 받은 몸이니, 죽은 뒤에 얇은 판자로 관을 쓰고 곽은 만들지 말라. 장사 지낼 때는 새 묏자리를 잡지 말며, 석물(石物)은 세우지 말고 작은 표석(表石)만 세워라.”
하였다.
한 달이 지나자 병이 마침내 심해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세수 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깨끗이 씻고는 또 여러 아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나를 정침(正寢)으로 옮겨라.”
하고, 또 말하기를,
“자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나를 편안히 눕혀라.”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세상을 떠났다.
공은 처음 병들었을 때에 약을 물리치고 복용하지 않았으며 병환이 심해져도 말과 정신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입 속으로 늘 “중원(中原)을 평정하지 않고는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강에 맹세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색양(色養)의 도리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벼슬하기 전에도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올렸으며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릴 적에는 온화한 기색이 넘쳐흘렀다. 벼슬길에 나가서 누차 외직을 청한 것은 모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형제자매에게도 그 우애가 지극하였는데, 전주(全州)에 부임할 때 홀로 된 누님을 모시고 가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내가 군수가 되었을 때에는 어머니 때문에 기뻤는데, 지금 비록 부윤이 되었으나 누구를 봉양한단 말인가. 내 차라리 어머니를 섬기던 마음으로 우리 누님을 섬기겠다.”
라고 하였다.
또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소원하지 않아 모두 공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사람들을 대할 적에 온후하고 화순하여 모난 태도를 볼 수 없었으나, 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할 때에는 꼿꼿이 서서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이욕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과묵하게 지내다가 임금 앞에서 논쟁할 때에는 충모(忠謀)가 격앙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때문에 감동하였다.
봉사(封事)를 올릴 때에는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침식(寢食)도 잊었으며 조복(朝服) 차림으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문장을 짓는 데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에서 힘을 얻었으며, 말은 의미가 통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다. 의리를 논하고 시비를 분변하는 데 능하였으니, 상소나 차자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세상에서 우계 선생(牛溪先生)이라 일컫는 성혼(成渾)의 따님인데, 아들 여섯과 딸 셋을 낳았다. 장남 훈거(勳擧)는 현감을 지냈다. 처음에 감사 최기(崔沂)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변(抃)이고 하나는 일찍 죽었다.
뒤에 첨사 이장형(李長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손(損)이고 두 딸은 어리다. 차남 순거(舜擧)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교관(敎官)을 지냈는데 백씨(伯氏)의 후사로 나갔다. 감사 이춘원(李春元)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선(揎)과 존(撙)이고 막내는 어리다.
삼남 상거(商擧)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봉사(奉事)를 지냈다. 찰방 이경배(李敬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셋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사남 문거(文擧)는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를 지냈다. 사인(士人) 이전(李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과 딸 셋을 낳았는데, 아들은 박(搏)과 원(援)이고 딸은 이순악(李舜岳)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오남 성거(成擧)는 장가들기 전에 일찍 죽었다. 육남 선거(宣擧)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생원 이장백(李長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 둘은 증(拯)과 추(推)이고 딸 둘은 이정여(李正輿)와 진사 권준(權儁)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민거(民擧)는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경거(耕擧)는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나머지는 시거(時擧)이다. 딸은 판관 최노첨(崔魯詹)의 첩으로 나갔다. 변은 정랑 조직(趙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다.
내가 후배로서 외람되게 공의 뒤를 따라 홍문관과 사간원을 여러 해 동안 출입하면서 공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심취되어 공의 충성이 강렬하게 발로한 것이 평소 함양한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만 균의 무게로 누르면 / 壓以萬勻
누군들 꺾이지 않겠으며 / 誰不摧折
우레같은 임금의 위엄에 / 威以雷霆
누군들 떨지 않으리오 / 誰不掉慄
아, 신하는 / 嗟哉人臣
진언을 실로 어려워하는데 / 進言誠難
어려운 일을 쉽게 하였으니 / 以難爲易
얼마나 충성스런 마음인가 / 何等忠肝
내가 윤공을 보건대 / 我覯尹公
고인의 곧은 유풍 지녔으니 / 古之遺直
자신의 사심을 버리고 / 弁髦吾私
움츠려 물러나는 것을 경계하였네 / 縮朒是殼
위로는 임금과 / 上而乘輿
아래로 전횡을 일삼는 자를 / 下而幷植
바로잡고 다스리기를 / 格之繩之
한결같이 의리에 따랐네 / 一柄唯義
부지런히 올린 상소는 / 厪厪章奏
말씀마다 나라 걱정뿐인데 / 語語國耳
어찌하여 채용하지도 않고 / 奚用之違
공에게 적을 불러들였다 하는가 / 謂公召戎
공이 원통하지 않으랴만 / 非公之冤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비추고 있다네 / 日月在空
[각주]
[주01] 대사간 …… 묘갈명 :
이 글은 윤황(尹煌, 1571~1639)에 대한 묘갈명이다. 윤황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이다.
[주02] 대사간에 …… 상소 :
《인조실록》14년 2월 10일 기사에 윤황이 올린 상소가 실려 있다.
[주03] 화친을 …… 차자 :
《인조실록》 14년 8월 20일 기사에 윤황이 올린 차자가 실려 있다.
[주04] 한(漢)나라 …… 것 :
위상(魏相)은 한 선제(漢宣帝) 때의 재상이고, 조 영평(趙營平)은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진 조충국(趙充國)이다. 조충국이 선제에
게 자신의 계획을 올릴 때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점차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선제가 처음의 주장을 바꾼 사람들을 질책하자, 위상이 “신이 어리석어 군사에 대한 이해(利害)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후장군의 여
러 계책은 그 말이 항상 옳으니, 신은 그 계책을 반드시 쓸 만하다고 보장합니다.”라고 하였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주05] 육경여(陸敬輿) :
당 덕종(唐德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육지(陸贄)로 자가 경여이다. 조정에 있으면서 간언을 잘 올렸는데, 시폐(時弊)를
논한 그의 주의(奏議)들은 명문장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가 많이 읽혔다.《新唐書 卷157 陸贄列傳》
[주06] 호담암(胡澹庵) :
송 고종(宋高宗) 때의 충신 호전(胡銓)으로 호가 담암이다.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으로 있을 때에 고종에게 상소하여 금
(金)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진회(秦檜) 등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하였다.《宋史 卷374 胡銓列傳》
[주07] 조부 :
한국문집총간 77집에 수록된《청음집(淸陰集)》권35〈사간원대사간팔송윤공묘지명(司諫院大司諫八松尹公墓誌銘)〉과 한국
문집총간 100집에 수록된《동토집(童土集)》부록〈사헌부장령동토선생윤공행장(司憲府掌令童土先生尹公行狀)〉에 따르면
윤선지(尹先智)는 윤황의 조부가 아닌 증조부이다.
[주08] 판서 …… 지었다 :
《청음집》권33에〈파평윤공배경부인합장묘지명(坡平尹公配慶夫人合葬墓誌銘)〉이 실려 있다.
[주09] 쌓아놓은 …… 곤욕 :
장작을 쌓을 때 맨 먼저 쌓은 것이 가장 아래에 깔리는 것처럼 먼저 임용된 관리가 나중에 임용된 자보다 지위가 낮은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급암(汲黯)이 후배들이 계속 자신보다 승진하자 한 무제(漢武帝)에게, “폐하께서 신하들을 기용하는 것이 마치 장작을
쌓는 것과 같아 뒤에 온 자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史記 卷120 汲黯列傳》
[주10] 폐세자(廢世子)를 …… 논의 :
폐세자는 광해군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던 이지(李祬)를 말한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과 함께 폐서인되어 교동도(喬桐島)에 안
치되었는데 굴을 파고 도망치려다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폐세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주11] 한두 …… 주청하니 :
한국문집총간 115집에 수록된《송자대전(宋子大全)》권209〈팔송윤공행장(八松尹公行狀)〉에 따르면, 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이 군사들을 종용하여 행궁에서 칼을 빼들고 주상을 협박하여 속히 척화신을 오랑캐에게 보내라고 청했다고 한다.
[주12] 강화도를 …… 머문다 :
한국문집총간 77집에 수록된《청음집(淸陰集)》권35〈사간원대사간팔송윤공묘지명(司諫院大司諫八松尹公墓誌銘)〉과 한국
문집총간 115집에 수록된《송자대전(宋子大全)》권209〈팔송윤공행장(八松尹公行狀)〉에 따르면, 윤황의 상소에 “강화도에
있는 군량과 무기를 서쪽으로 실어 보내고, 강화도 행궁을 불태우고 평양에서 주둔하면서 반드시 오랑캐와 싸우고 물러날 뜻이 없음
을 보이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주13] 오랑캐를 …… 떠난 :
경진년(1640, 인조 18)에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지원군을 요청하자, 영병장(領兵將) 유림(柳琳)을 금주위로
파송하였다.
[주14] 갑자기 …… 짓기를 :
《청음집》권35〈사간원대사간팔송윤공묘지명(司諫院大司諫八松尹公墓誌銘)〉에 따르면, 공이 갑자기 감기에 걸렸는데 집안사
람들은 공이 위독하게 될 줄 알지 못했으나 공은 끝내 자신이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자제에게 유서를 받아쓰게 하였다고
한다.
[주15] 중원(中原)을 …… 맹세한다 :
동진(東晉)의 조적(祖逖)이 한 말인데, 중원의 회복을 다짐하며 충성을 맹세하는 말이다. 조적이 중원의 회복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
겨 군대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너갈 적에 강 한복판에서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내가 중원을 평정하지 않고서는 이 강을 다시 건
너지 않으리라 강에 맹세한다.”라고 하였다.《晉書 卷62 祖逖列傳》
[주16] 색양(色養)의 도리 :
자하(子夏)가 효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孔子)가 ‘색난(色難)’이라고 대답한 데에서 나온 말로, 자식이 얼굴빛을 화열(和悅)하게 하
여 부모님을 섬기는 것, 혹은 부모님의 안색을 맞춰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論語 爲政》
[주17] 봉사(封事) :
내용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주머니에 넣어 봉해서 바치는 글을 말한다. 고대에 관료들이 임금에게 기밀의 사안을 건의할 때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검정 주머니에 담아 밀봉하여 올렸기 때문에 봉사라고 한 것인데 봉장(封章)이라고도 한다.
[주18] 말은 …… 여겼다 :
언어의 목적은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그뿐이라는 뜻이다.《논어》〈위령공(衛靈公)〉에 “말을 할 때에는 자기
의 뜻이 통하게만 하면 된다.〔辭達而已矣〕”라고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김하라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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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尹煌 墓碣銘[趙絅]
崇禎十二年某甲子, 通政大夫、吏曹參議尹公卒于尼山鄕適寢, 用其年某月某日, 祔諸其鄕之先壟。 明年庚辰, 其孤舜擧氏與其弟三人, 狀公行事及公疏箚一卷, 授使者問銘於漢陽趙絅曰: “先君子秉直懷忠, 勇往不顧, 立朝進言, 率多逆鱗而中人忌諱。 側目者堵立於世, 乘機抵巇, 吹毛亂眞。 不肖惟先德不得取信來世是懼, 願得子之一言而表墓道, 以子之不喜諛也。” 不佞固雅敬公之平生者, 遂不敢辭, 而盥水發公疏箚莊誦焉。
丁卯正月, 瀋奴入寇, 公以司諫, 請罪倡去邠者啓辭一: 引對時, 請上堅定死守心啓辭一: 列聖陵寢, 皆在臨津之內, 請守臨津啓辭一: 二月, 從車駕入江都, 痛詆廟堂誤國罪於上前啓辭一: 胡差劉海來要與上抗禮, 公與執義嚴惺入對, 歷數一二勳貴主和辱國之罪, 且請斬弘立、蘭英啓辭二: 論完城君崔鳴吉僨國敗事啓辭一: 論和事疏一: 戊辰五月, 以舍人受命廉問平安道還, 陳一道弊瘼幾萬言狀一: 戊辰八月, 拜司諫, 時歲侵民飢, 請減租稅啓一: 丙子二月, 拜大司諫, 因災異上數千言疏一: 三月, 拜吏曹參議, 請內修外攘疏一: 八月, 拜大司諫, 請損浮費補軍需上六條疏一: 偕備局引見時啓辭一: 絶和之後, 不可無振作, 籌足食足兵之道箚子數千言一。 曰多乎哉! 古之人, 何以加此? 公之所素蓄于胸中者, 盡於此矣。
世之人自謂正直, 銳於論事者, 一進再進而不報, 則鮮不怠而却步矣。 況震薄於雷霆之下, 出入於人鬼之關, 而其有不解而退者乎? 公之愛君憂國之誠, 可謂天性而拔乎人千丈矣。 或疑公不揆國勢而斥和太執, 橫挑强胡。 嗚呼! 余固難言哉! 丁丑朝家罪公者, 以此也。 然公豈空言斥和者哉? 足食足兵, 以爲保邦之本: 節省浮費, 以爲足食之本。 溯而上之, 罷廟樂, 減祭享、御供, 亦有不憚而盡言者, 無論血誠之質鬼神, 而術亦不疎矣。 不知當時宰相能白用公策, 如魏相之於趙營平者乎! 不能用公言什二三, 而事敗則選耎乾沒者鼓吻而挾, 見讎者媒孼其短, 此陸敬輿、胡澹庵之目殆不瞑於地下矣。
公諱煌, 字德耀。 麗朝鈴平伯尹瓘之後也。 諱倬以經學進, 趙靜菴薦于上前, 爲帶大司成者十年, 當中廟世, 於公爲高祖: 諱先智, 卒官嘉善、節度使, 一時推轂, 不以武弁異視, 至任喉舌, 於公爲祖考。 諱昌世, 敦行孝悌, 隱德不仕, 卒贈嘉善大夫、吏曹參判, 以公貴也。 尙書金尙憲爲之銘。 娶副提學淸州慶渾女, 隆慶辛未, 生公漢陽里第。
未毁齔, 已若成人, 不戲憘好讀書, 母夫人常以不煩敎飭, 稱其誠孝。 及長, 攻擧子業, 早有聲。 癸巳, 丁參判公憂, 廬墓三年。 二十七, 中丁酉謁聖試乙科第一人, 選補承文院副正字。 己亥, 以承文院, 兼居山察訪。 庚子, 陞博士。 辛丑, 例遷成均館典籍, 俄拜司憲府監察、刑曹佐郞。 其年八月, 拜司諫院正言、兼春秋記事官。 論事無彼此心, 視義如何, 輩類譁然多咎公者。 公遂歎曰: “古之君子, 同而不比, 今乃爾耶?” 卽病告不出。 遞授典籍, 歷兵、禮曹佐郞, 復授典籍、刑曹佐郞。 壬寅, 補水原府判官。 府自刳壬辰兵, 未完復, 親舊有唁者。 公遜謝曰: “懼不擧職, 邑殘非吾懼也。” 之任未幾, 政成。 明年, 坐事罷。
甲辰夏, 敍除禮曹佐郞, 俄陞正郞。 秋, 應統制辟。 冬, 除北靑判官。 帥武人牛羊牧民, 俗又尙鷙悍外文敎。 公一莅之, 賦簡而戶誦。 戊申, 遞還。 時李爾瞻謫北放還, 遇公道, 致殷勤。 公惡其爲人, 到京絶不之通。 及李柄用, 韓纘男以鄕里舊, 將李意每來甛公, 公正色不應。 己酉, 求出得靈光郡, 爲治比北靑加密。 勤以剸煩, 儉以阜財, 民稅以寬。 考未滿, 爲土豪所中, 民則追思歌之, 爲立遺愛碑。 乙卯, 由奉常僉正, 轉軍資監正。 丙辰, 奸黨誣海州牧使崔沂成獄, 公之督卽崔甥也, 公省顧沂。 奸黨劾公。 幾扞文罔, 適有天幸, 罷官而止。 自是公不敢居京師, 屛跡尼山鄕者五六年。 癸亥, 今上反正, 旁招俊良, 公首膺淸選。 於憲爲掌令者再, 執義者三; 於諫院爲司諫者五, 大司諫者四: 於玉堂自修撰至應敎: 春坊輔德者屢: 於政府檢詳而至舍人: 政院爲同副承旨: 吏曹爲參議: 於外拜安邊府使, 言者請留不赴, 拜全州府尹, 瓜滿而歸。 蓋公釋褐四十餘年, 歷事三朝, 而與時寡合, 積薪蹇連, 癸亥以後, 進塗始闢。
公旣感國之恩, 而職思其憂。 始拜掌令也, 廢世子按律論發, 公獨立異。 甲子逆适亂, 檢察使延平君李貴視師退却, 臺諫莫敢言, 公上箚請律。 至於丁卯, 則風節凜凜, 遠方之人皆欲一見其面。 然坐是數蹶數譴, 數被人齮齕, 賴聖上保持之。 丙子難, 公方病眚, 家居者一月, 聞急舁入南漢, 卽條備御策如干, 奏記體相金瑬, 瑬不能用。 及圍合, 平日主和者執仇讎道睨公, 苟有害於公, 不能爲地。 蛾虜書責送首謀敗盟者, 廟堂甘心於公, 上不之知也。 判書金尙憲、參判鄭蘊聞卽自首, 公子文擧慮公義恒人先, 而且悶病篤, 不敢以金、鄭事聞公。 其後廟堂令兩銓聽斥和人自首, 公於是大恨後於二公, 切責文擧, 卽上自首疏曰: “終始斥和者, 惟臣一人。” 請自行, 不報。 居數日, 江都陷報至, 城中震慴。 有一二勳戚嗾軍兵露刃帳殿, 請出斥和人。 廟堂從而和之, 遂以自首人及他十餘人, 入奏縛送虜營。 知舊多就公哭別, 公從容無幾微動色, 作書遺在外諸子而已。 時間有一脈正議激而曰: “古國家寧亡, 未有縛吾正士與敵者。” 上納臺臣言, 減縛送數, 公免焉。 於是不知公者, 疑公有計而脫虎口, 而不悅公者, 做飛語變實狀, 固賤之爲丈夫哉!
其後車駕還都, 上以公前日疏中“焚江都, 駐平壤”等語爲不祥, 命廟堂科罪。 廟堂抄啓宜罪者十人, 不佞與焉, 公爲首。 四月, 編配公永同縣。 公至配所, 以爲罪人衣食服御不可等平人, 悉用素樸。 十月, 蒙宥。 戊寅八月, 載病還尼山。 然猶不敢處平日室屋, 就先墓下廬以處, 謂諸子曰: “國家出城之擧, 可諉曰存社稷, 至於助兵向西之後, 則士大夫義不可立於世。” 明年五月, 忽感霜露, 命子操筆, 作遺誡曰: “汝父妄論時政, 得罪君父。 死後棺用薄板無槨, 葬勿卜新阡, 勿立石物, 只樹短表。” 踰月病遂革。 一日, 遽命進盥澡潔, 又呼諸子曰“遷我正寢”, 又曰“正席安枕我”, 言終而屬纊。 公始疾, 却藥不服, 及病, 言語精神無異平日, 口中諄諄恒誦“不能淸中原復濟, 有如此水”之語。
公少孤, 色養母夫人, 雖布衣時, 必置甘旨, 晨昏之際, 和氣婉容可掬。 曁登仕, 屢求外補, 皆爲奉養者。 處兄弟姊妹間, 皆極其友。 其赴完山也, 奉寡姊以行曰: “昔吾得郡, 爲親而喜, 今雖作尹, 其誰之養? 吾寧以事親者事吾姊。” 又睦於親戚, 無疎遠, 皆家歸之。 與人處, 溫厚和順, 不見崖岸, 而當官遇事, 則抑抑自立, 不爲威揚, 不爲利屈, 常時恬默自可, 至其爭論於上前, 忠謀激昂, 人皆爲之痛魄。 其進封事, 必積誠敬, 忘寢與食, 朝服而待朝。 爲文得之經史, 辭達爲宗, 長於論義理、卞是非, 於疏箚可見矣。
內子昌寧成氏, 世所稱牛溪先生渾之女也。 男六女三。 長勳擧, 縣監。 初娶監司崔沂女, 生二男: 曰抃, 一夭。 后娶僉使李長亨女, 男曰損。 女二, 幼。 次舜擧, 進士, 敎官, 后伯氏。 娶監司李春元女, 男揎、撙, 季幼。 次商擧, 進士, 奉事。 娶察訪李敬培女, 三女, 幼。 次文擧, 文科, 校理。 娶士人李瑑女, 三男三女: 摶、援, 女李舜岳, 餘幼。 次成擧, 未室而夭。 次宣擧, 進士。 娶生員李長白女, 男二: 拯、推。 女李正輿: 權儁, 進士。 側室三男一女: 民擧, 進士: 耕擧, 生員: 時擧。 女判官崔魯詹妾。 抃娶正郞趙稷女, 男二。
不佞以後進, 猥從公後, 出入玉堂、薇垣者有年, 每接辭氣, 不覺心醉, 而自省其發强爲忠者, 蓋本之素養云。 銘曰:
壓以萬匀, 誰不摧折? 威以雷霆, 誰不悼慄? 嗟哉人臣! 進言誠難。 以難爲易, 何等忠肝? 我覯尹公, 古之遺直。 弁髦吾私, 縮朒是瞉。 上而乘輿, 下而竝植。 格之繩之, 一柄惟義。 廑廑章奏, 語語國耳。 奚用之違, 謂公召戎? 非公之冤, 日月在空。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