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부림’ 여행이라면 통영의 시장이나 골목만으로 족하다. 그럼에도 1시간 가까이 뱃길을 달려 섬으로 간다. 고등어회의 본향이자 전국에서 손꼽히는 단맛을 지닌 고구마가 나는 욕지도로. 해산물을 듬뿍 얹은 ‘욕지 짬뽕’의 시원한 국물도 구미를 당긴다. 해안일주 버스에 출렁출렁 몸을 싣고, 고소하고 달보드레하고 칼칼한 욕지도의 맛을 내내 곱씹었다.
해안일주 버스를 타고 만난 욕지도 풍경
사라진 풍경 뒤에 오는 감칠맛, 고등어회
욕지도는 통영 삼덕항에서 뱃길로 45분이면 닿는 섬이다. 숨막히는 절경을 품은 해안일주도로와 이따금 그물에 밍크고래가 걸리기도 한다는, 망망대해 태평양과 마주한 섬. 일제가 어업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인 만큼 파시(波市, 바다 위에 선 시장)로 전성기를 누리던 때도 있었다.
연중 파시가 열렸던 포구
앞바다에 밤낮없이 배가 그득해 맞은편 부두까지 배를 밟고 건너갈 정도였다고. 배 위에서 생선이 거래되고, 판자 하나 구하기 힘들 만큼 가난한 아낙들이 빨래판에 고구마며 호박이며 김치 등을 늘어놓고 생선과 맞바꾸던 시절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이후로도 이어지던 파시는 1970년대를 끝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연중 파시가 열렸던 해안길
당시 여름부터 가을이면 전갱이, 삼치, 갈치와 함께 고등어가 주로 잡혔다. 요즘이야 사시사철 고등어회를 먹을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싱싱한 고등어는 제철에나 맛볼 수 있었다. 뭍에서도 고등어회를 흔히 먹을 수 있게 된 건 욕지도에서 고등어 양식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역사가 10년도 되지 않았다. 육지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 먹는 고등어회도 대부분 욕지도산이다.
‘늘푸른회센터’의 욕지도 고등어회
정치망으로 자연산 치어를 잡아 가두리 양식장에서 키운 고등어는 30cm쯤 자랐을 때 맛이 가장 좋다. 욕지도 항구에 자리한 ‘늘푸른회센터’는 산지에서 싱싱하게 맛볼 수 있는 고등어회로 일찍이 이름났다. 양식장에서 곧바로 공수해온 고등어를 그날그날 손질해 상에 올린다. 고등어는 성질이 워낙 예민해 살아서도 부패한다지만, 이곳의 고등어회는 비린 맛이 전혀 없고 ‘꼬신’ 맛이 뒤를 잇는다. 신선도 유지가 관건이다 보니 물에서 꺼내자마자 소금을 뿌리고 얼음물에 식초를 풀어 10분 정도 담가둔다. 담백하고 탱탱한 육질을 살리는 비결이다. 고등어조림도 별미다. 지방 성분이 가득 밴 양념은 느끼하지 않고 감칠맛이 돈다. 양념 비결을 물었더니 한결같이 ‘고등어’란 대답이 돌아왔다.
산지에서 맛보는 싱싱한 고등어회
“양념이야 고춧가루, 간장, 꿀… 그 정돕니더. 스트레스 안 받고 육질 좋은 상태로 실려와가 고등어 기름까지 맛있는 거지예.”
두툼한 살을 얹어 비벼 먹다 보면 밥 한 그릇이 금세 동난다
한적한 포구에서 만난 달콤한 위로, 빼때기죽
욕지도 선착장에서 우측 해안길을 따라 돌면 좌부랑개 마을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좌부랑개 선창부터 길게 늘어섰던 파시가 이 길까지 넘나들었다. 한때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을 길을 따라 동백꽃이 함박 피었다. 마을 안으로 곧장 걷다 보면 ‘할매 바리스타’ 간판이 보인다. 욕지도 토박이 할머니들이 손수 커피를 내리고 서빙까지 하는 카페다.
한적한 마을 카페의 창가 자리가 유독 포근하게 느껴진다
“여든한 살 묵은 할매는 졸업하싰고 지금은 평균 70대라예.”2014년 2월에 문을 열곤 3인 4조로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다며 동백꽃 같은 미소로 화답한다. 이 집에서는 흔한 아메리카노 한 잔보다 고구마라떼나 빼때기죽을 맛보길 권한다. 고구마와 견과류, 버터, 밀가루로 만든 고구마마들렌도 별미다. 욕지도는 고등어 못지않게 고구마가 유명하다. 이곳 말로 ‘욕지 고매’라 부른다. 비탈진 황토밭에서 해풍을 맞고 자란 고구마는 욕지도만의 맛을 낸다. 같은 종자를 다른 섬에 심어도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빼때기죽과 고구마라떼, 고구마마들렌
‘빼때기’는 추운 날씨에 쉬이 썩는 고구마를 겨우내 먹기 위해 빼딱하게 판자(때기)처럼 썰어 말린 것이다. 여기에 팥, 좁쌀, 강낭콩 등을 넣고 쑨 죽이 빼때기죽이다. 지금은 간식으로 먹지만 쌀이 귀했던 시절 빼때기죽은 허기를 달래주던 끼니였다. 바다가 훤히 내다뵈는 창가 자리, 할머니가 내주는 빼때기죽 한 그릇이 달콤한 위안을 준다.
할머니의 정성스런 손맛이 살갑다
카페를 나와 마을 뒷골목도 둘러보자. 파시가 성행했던 시절, 뱃사람들이 드나들던 술집이 100여 곳 줄지어 있던 골목이다. 고급 요정이었던 명월관을 비롯해 우체국, 경찰서, 소학교 터를 알려주는 팻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의 흔적이 남은 2층집과 고등어, 전갱이 등을 염장하던 대형 간독도 눈에 띈다. 300m쯤 이어지는 이 골목은 현재 ‘근대 어촌 발상지’라는 팻말을 내걸고 조성되어있다.
좌부랑개 뒷골목 풍경
마을 뒤편 계단을 따라 오르면 포구를 따라 늘어선 마을 풍경이 소담하게 펼쳐진다. 해안도로 곁에 봉긋 솟은 숲은 화가 이중섭이 통영에 머물던 시절, <욕지도 풍경>(1953)을 남겼던 메밀잣밤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343호)이다. 메밀잣밤나무 외에도 해솔, 사스레피나무, 팔손이 등 사철 내내 푸른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데크를 따라 가볍게 산책에 나서도 좋겠다.
적산가옥 형태가 남아 있는 2층집
좌부랑개 앞바다에는 선상 낚시터도 여러 군데다. 고등어, 전갱이가 쏠쏠하게 잡힌다.
메밀잣밤나무 군락과 좌부랑개 마을 전경
해물짬뽕으로 속 풀고 느릿느릿 섬 한 바퀴
욕지도 선착장 쪽으로 되돌아 나오면 해안일주도로를 한 바퀴 도는 마을버스가 기다린다. 버스는 통영에서 오는 배 시간에 맞춰 하루 6회 운행한다. 단돈 1,000원으로 버스 기사님의 구성진 해설을 들으며 느린 시간을 유영해보자.
해안일주 버스를 타면 1시간 내내 바다 풍광이 펼쳐진다
“노대도, 연화도, 우도, 적도, 납도… 섬마다 이름은 있는데 임자가 없습니더. 돌아갈 때 필요하면 하나씩 가져가시이소.”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 있는 노대군도를 가리키던 기사님이 슬쩍 농을 건넨다.
노대군도 뒤로 남해 금산과 여수 돌산도가 납작 엎드려 있다
여유가 있다면 욕지도 비렁길도 걸어보길 권한다. 1km도 되지 않는 길이라 바다를 곁에 끼고 찬찬히 산책하기 좋다. 출렁다리를 건너 펠리컨바위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장관이다.
비렁길에서 만난 펠리컨바위
바닷바람을 실컷 맞은 뒤에는 개운한 국물이 당길 터. 칼칼한 짬뽕 한 그릇으로 여정을 마무리짓는 건 어떨까. 욕지도 내에서 유일한 중국집인 ‘한양식당’에는 주말마다 긴 줄이 늘어선다. 마을 주민들은 짜장면을 즐겨 먹지만 해산물을 듬뿍 얹은 짬뽕이 외지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오후 2~3시면 문을 닫으니, 당일 일정이라면 해안일주에 나서기 전 미리 들르는 편이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