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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학자의 백두산(白頭山)에 관한 인식 | | | 역사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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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7 08:04 |
1. 글 머리에
필자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번역하면서 가장 의아스럽게 생각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하는 것이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14 산천(山川) 1 장백산(長白山) 조에는 각종 중국 정사에서 백두산(白頭山)과 관련된 자료를 근거로 역대로 백두산을 어떻게 불려져 왔던 것인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불함(不咸)이라 하였고, 《진서(晉書)》에서는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하였고, 《위서(魏書)》에서는 도태산(徒太山)이라 하였고, 《북사(北史)》에서는 종태산(從太山)(도태산의 오기인 듯함)이라 하였고, 《신당서(新唐書)》에서는 태백산(太白山)이라 하였고, 《원일통지(元一統志)》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 하였으며, 《명일통지(明一統志)》에서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는 백두산(白頭山)이란 표현은 발견할 수 없었다.
2. 백두산(白頭山) 어원의 탐색
필자가 지금까지 조사해 본 바로는 《고려사(高麗史)·세계편(世系篇)》에 지금은 없어진 김관의(金寬懿)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인용한 고려시조 관련 설화 가운데 "백두산(白頭山)"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줄로 알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를 뒤져 보기로 하였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가 수백년 동안 지배하였던 만주와 한만국경에 걸쳐 있던 백두산에 관한 기록이 있을 법한데 아예 찾아 볼 수가 없고 《신당서(新唐書)》에 나와 있는 태백산(太白山)이란 산 이름으로 아래와 같이 모두 다섯 차례 나왔다.
첫째, 신라 지마이사금 6년(138)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시를 하고 태백산(太白山)에 제사를 지냈다.
둘째, 신라 기림이사금 3년(300) 봄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帝)를 올렸다.
셋째,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동명왕기(東明王紀)》의 고구려 건국 관련 총서 부분에서 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太白山)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얻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넷째, 고구려 동명왕 6년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太白山)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였다.
다섯째,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에 고구려의 잔얼들이 태백산 남쪽에 의지해서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최치원전(崔致遠傳)》에 기록된 태백산 관련 기록]
위 다섯 기사에서 신라와 관련된 기사는 당시 신라의 강역이 백두산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태백산(太白山)은 백두산일 수 없다. 마지막 고구려 관련 3개의 기사에서 말하는 태백산은 오늘날의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한편, 중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옛날 환인(桓因)의 지차아들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 일렀다"고 하였는데 중 일연은 괜히 초를 쳐서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으니 일연의 인식으로는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를 쓰면서 고구려가 망하기 전의 강역에 관한 건치연혁 등을 썼더라면 분명히 백두산에 관한 자료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대동강 원산 이남의 고구려 땅에 관한 건치연혁 관련기사만을 남기고 말았는데 도리어 중국의 《요사(遼史)·지리지(地理志)》 등에는 압록강 이북의 자료를 남기고 있다. 예를 들어 함주(咸州) 안동군(安東郡)은 원래 고구려의 동산현(銅山縣)이다, 진주(辰州)는 원래 고구려의 개평성(蓋平城)이다, 집주(集州)는 고구려의 상암현(霜岩縣)이었다 등이다.(졸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파워북, 338~342쪽 참조)
3. 산천사전(山天祀典)의 대상으로서의 백두산
고구려는 7백여 년 동안 존속해 오면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 약 420여년 동안 만주 일대에 수도를 정하고 백두산을 강역으로 하여 왔었으니 적어도 백두산에 제사지내는 사전(祀典)을 두고 있었을 것이나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잡지(雜志)》를 쓰면서 이런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잡지(雜志)》 제1 〈제사(祭祀)·악(樂)〉조에서 신라에서 5묘(廟)를 설치하고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한 것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전(祀典)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국내의 명산 대천에는 제사를 지내면서 천지신명에까지 지내지 않은 것은 아마 《왕제(王制)》에 '천자(天子)는 7묘(廟)요, 제후(諸侯)는 5묘(廟)인 바, 두 소(昭)·두 목(穆)에 태조의 사당을 합하여 5묘(天子七廟: 三昭三穆, 與太祖之廟而七; 諸侯五廟: 二昭二穆, 與太祖之廟而五。)'라고 한 것과 또 《왕제(王帝)》에 '천자(天子)는 천지신명과 천하의 명산 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제후(諸侯)는 사직과 그의 국내에 있는 명산 대천에 지낸다(天子祭天地, 諸侯祭社稷, 大夫祭五祀。天子祭天下名山大川: 五岳視三公, 四瀆視諸侯。諸侯祭名山大川之在其地者。)'고 하였으므로 예전의 분수에 넘치는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중략)…… 고구려와 백제의 사전은 명확하지 않으므로 다만 고기와 중국 역사에 실린 것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만 둔다."라고 하면서 신라의 사전(祀典)은 자세히 전하였으면서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사전(祀典)을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금사(金史)·예지(禮志)》에 의하면 장백산을 흥국령응왕(興國靈應王)으로 봉하고 그 산 북쪽에 묘우(廟宇)까지 건설하여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금사(金史)》 권35, 지(志) 제16, 예8 장백산 참조) 또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의하면 강희 16년(1677) 4월 15일에, 내대신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이 강희제(康熙帝)로부터 청조의 발상지인 장백산(長白山)에 대하여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가서 알아보고 예를 행할 수 있도록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는 칙명을 받고 그해 5월 5일 북경(北京)을 출발, 5월 14일 성경(盛京)에 도착, 5월 23일 오랄 지방의 장군에게 황제의 유지를 전하고 그로부터 여러 협조를 받은 다음, 6월 2일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하여 6월 11일 장백산에서 가까운 액혁눌음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다시 출발하여 6월 17일 장백산 천지까지 올라갔다가 그해 8월 21일 북경으로 돌아와 황제께 그 결과를 보고한 상주문이 실려 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강희제는 "장백산은 열조 발상의 성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므로 장백산에게 마땅히 봉호를 하고 제사를 받들어 나라의 보살핌을 받는 뜻을 밝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졸저, 《만주원류고》, 파워북, 405쪽 주석 참조)
필자는 최근에 일본 와세다대학 진전문고(津田文庫)(전에 와세다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津田左右吉이 기증한 도서로 보여짐, 필자주)에 《봉장백산기(封長白山記)》란 글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글의 첫머리에 "康熙十有六四月望"이라고 씌여 있는 바, 정확히 강희 16년 4월 15일이라 명기하고 있다. 이는 강희제로부터 지시를 받은 해당 관원들이 장백산에 봉호를 올리게 된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문장이다.
[와세다대학교 쓰다문고에서 확인한 《봉장백산기(封長白山記)》]
이처럼 만주족의 조상인 여진족들이 세운 금(金)나라나 그들의 후예인 후금(後金)으로 자처하였던 청나라에서는 백두산을 저들의 용흥지지(龍興之地)로 받들어 제사를 모셔왔다. 우리는 어떤가. 원래 황제국이 아니면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과 같은 제후국에서는 아예 그런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조선 고종 이후 황제국으로 되고 되면서 비로소 백두산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근거규정인 사전(祀典)을 만들었으나 몇년 뒤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4. 백두산 천지와 정계비(定界碑)
필자는 중국 학자가 쓴 《중조변계사(中朝邊界史)》라는 저술을 통해 중·조(中朝) 두 나라는 변계인 백두산 일대의 조사를 두고 양측 관원들의 신경전과 자기 나라의 강역을 지키기 위해 상대측의 의중을 간파해서 우리가 주장할 마지노선을 어디까지로 하여 어떤 점을 얻어낼 것인지 미리 치밀한 사전준비와 불꽃 뛰는 외교전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을 수 없었다.
정계비를 설치하기 전에 우리나라 변경을 조사하려는 청나라 관원들에 대한 조선의 방해공작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691년(강희 30, 숙종 17년) 청 상서 도납(圖納) 등이 지도를 가지고 길림(吉林)·영고탑(寧古塔)에서 실지 대조작업을 하고 이듬해에도 장백산·도문강에 대한 대조 조사를 위해 조선에 향도를 파견하여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조선에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거절을 한 적이 있었다. 1699년(강희 38년, 숙종 25년)에 청국 예부 회동관 통사가 조선의 공사(貢使) 수행화원에게 조선팔도의 지형과 도리의 원근을 그려 달라고 요청을 하였으나 역시 조선 화원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였다. 1711년(강희 50년, 숙종 37년), 목극등(穆克登)이 처음으로 변계를 조사할 때, 조선국왕은 위문사 유집일(兪集一)을 시켜 폐사군(廢四郡) 험로로 길을 안내토록 하였는데, 그 목적은 바로 목극등으로 하여금 길이 험한 것을 알면서 가려고 하느냐면서 변계의 조사를 저지하려 했다는 것이다.(양소전 외, 《중조변계사(中朝邊界史)》, 길림문사출판사, 178~179쪽 참조)
백두산은 지도상에서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다음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그려진 백두산 부분의 모습이다. 우리가 천지(天池)로 알고 있는 곳이 '대지(大池)'로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을 따라 연지봉(連枝峰) 아래부터는 10리마다 거리표식이 되어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중 백두산 부근를 나타낸 지도이다. 백두산 천지(여기서는 '大池'로 쓰여 있음)아래에 정계비(定界碑)가 표시되어 있고, 분수령(分水嶺)에는 '강희임진정계(康熙壬辰定界)'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백두산의 지맥에 '소백산(小白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확인해야 할 '목책(木柵)' · '석퇴(石堆)'란 글자도 있다.]
정계비에는 어떤 글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 제원은 어떤 것일까. 1908년(청광서 34년) 장백산에 올라가서 답사를 한 유건봉(劉建封)은 일찍이 이 비를 직접 눈으로 보고 비문을 두 장의 종이 탁본하였다. 그와 동시에 함께 간 장봉태(張鳳台)도 이 비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 장봉태(張鳳台)가 쓴 《장백회정록(長白匯征錄)》의 기록에 의하면 이 비는 높이가 3척 남짓이요, 폭은 2척인데 자체가 단정하고 엄숙하다고 하였다. 비문은 아래와 같다.
大 淸
烏喇總管穆克登奉
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東
爲土門故于分水嶺上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
筆貼式蘇爾昌通官二哥
朝鮮軍官李義復趙台相
差使官許樑朴道常
通官金應瀗金慶文
우리는 언필칭 민족의 영산이라고 말하는 백두산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지, 외국의 학자들은 백두산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궁금한 사항을 중국의 《변강사연구(邊疆史硏究)》라는 잡지 2007년 제17권 제2기에 실려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조리연구원(助理硏究院) 이화자(李花子) 선생이 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백두산인식(白頭山認識)》이라는 글을 우리말로 번역 소개하려고 한다. 도면 등을 포함하여 모두 11쪽에 해당한다. 이 글의 작자는 조선왕조 초기에 백두산은 역외(域外)의 산으로 인식이 되었고, 1712년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진 뒤에 중국과 조선의 국경선에 있는 산이 되었으며, 영조 때 국가사전화(國家祀典化)가 되었고, 고종 때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 및 결론 순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하여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오라 총관 목극등(穆克登)이다. 그는 강희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때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편찬에 관여한 제신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륭제의 상당한 신임을 받았던 인물로 보여진다. 여기서의 직함은 원임(原任: 전직) 병부주사(兵部主事) 승임(陞任) 강소안찰사(江蘇按察使)로 되어 있으며 직책은 수장관(收掌官)인데 자료수집을 관장한 것으로 보인다.
[와세다대학 소장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 캡쳐했다]
5.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의 백두산 인식
[《대동지지(大東地志)》 무산군(茂山郡) 산수조에 백두산 주변의 산천을 기술하고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중국측에서 장백산이라고 하는 우리의 백두산과 또 다른 장백산(장백산)이 존재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팔도총도(八道總圖)의 모습. 태종 때 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인 영흥 북쪽의 주산으로 북악으로 사전에 올려져 지방관의 제사의 대상이었던 비백산(鼻白山)과 압록강 이북에 그려진 백두산(白頭山)의 모습. 아래 소개하는 논문에도 인용된 자료의 하나이기도 하다.]
[청말 양수경이 작성한 《역대강역여지도(歷代疆域輿地圖)》에 나와 있는 원나라 요양성 일대의 지도이다. 여기에도 3개의 장백산(長白山)이 확인된다.]
무산군 산수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서산(鶴棲山)<동쪽 25리에 있다> 검덕산(檢德山)<남쪽 18리에 있다> 노은산(蘆隱山)<서남쪽으로 130리에 있다> 분수령(分水嶺)<서북쪽으로 280여 리에 있다> 연지봉(連枝峰)<분수령 다음에 있다> 소백산(小白山)<연지봉 다음에 있다> 침봉(枕峰)<소백산 다음에 있다> 허항령(虛項嶺)<침봉 다음에 있다> 보다회산(寶多會山)<허항령 다음에 있는데 서남쪽 220리 갑산과 경계를 이룬다. 모습이 백설과 같고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다> 사이봉(沙伊峰)<보다회산 다음에 있다> 완항령(緩項嶺)<사이봉 남쪽 지맥으로 그 다음은 설령 장백산 대간이다> 노은산(蘆隱山)<서남쪽 130리에 첨봉이 홀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증산(甑山)<서남쪽 200리에 있다> 남증산(南甑山)<서쪽 140리에 있다> 북증산(北甑山)<서쪽 60리에 분개강 바깥쪽으로 석성이 있는데 주위가 넓고 크다> ·증산(甑山)<서남쪽 200리에 있다>·평항산(平項山)<북증산의 북쪽에 있다>·입모봉(笠帽峰)·감토봉(甘土峰)·삼태봉(三台峰)·국사파(國師坡)·가잘봉(加잘峰)·양갑산(陽甲山)·풍파덕(豊坡德)·장파덕(長坡德)·국사파(國師坡)·옥석암동(玉石岩洞)·유동(柳洞)·천평(天坪)·노평(蘆平)·삼봉평(三峰坪)·대각봉(大角峰)<이상은 모두 백두산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본부의 서계이다. 정리를 자세히 조사하지 않은 것은 《여지도(輿地圖)》에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장백산(長白山)<남쪽 3백여 리에 본부 갑산 (甲山)·경성(鏡城)·명천(明川)·길주(吉州)가 도사리고 있다. 계곡이 준험한 것이 비할 데 없어 도로가 두절되어 사람들이 감히 산꼭대기에 머무를 수 없다. 수목이 왜소하다. 5월까지 눈이 녹기 시작하다가 7월에 다시 눈이 내린다.> 백두산(白頭山)<서북쪽 3백여 리에 있다. 《당서(唐書)》에는 장백산(長白山) 또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하였는데 암석이 모두 희기 때문에 이름하여 백산(白山)이라고 하였다. 이산은 가로로 1천여 리에 걸쳐 있고 높이는 2백 리로, 산 마루에는 못이 있는데 둘레가 8십 리나 된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이 되고, 동으로 흘러 토문강(土門江)이 되었다. 숙종 38년 청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백두산의 경계를 정하였는 바, 그 사적은 다음과 같다.
오시천(吾時川)은 경성장백산(鏡城長白山)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 강수와 더불어 합하는데 그 밖은 모두 거치른 자갈밭이라 사는 사람이 없다. 북쪽으로 백덕(柏德) 70리, 검문(劍門) 20리, 곤장우(昆長隅) 15리를 건너면 큰 산이 있다. 그 바로 앞에서 서쪽으로 강수를 건너고 나무를 베어가면서 언덕을 따라 5,6리를 가면 길이 끊어졌다. 다시 화피덕행(樺皮德行)이라고 부르는 산비탈을 따라 가니 더욱 험준했으며, 80리를 가니 조그만한 못이 있었다. 거기서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서 한덕지당(韓德支當)을 올라 수십리를 가니 나무들이 점차 작아지면서 산이 차츰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부터 산은 모두 앙상한 뼈대만 들러내고 색갈은 창백했다. 동쪽을 바로보니 산봉오리 하나가 하늘에 솟아 있는데 바로 소백산(小白山)이었다. 이 산자락을 지나 서쪽으로 10여 리를 갔는데 산꼭대기까지는 2,30리가 남아 있었다. 약간 동쪽으로 하나의 산마루가 있는데 소백(小白)의 자락이었다. 그 등성이를 지나고 보니 백두산이 바라다 보였다. 1천 리를 치달아 웅장하게 푸른 꼭대기를 드러내 놓은 것이 마치 흰 높은 도마 위에 항아리를 엎어 놓은 듯하였다. 산마루 밑을 따라 몇 리를 가니 산은 모두 벌거숭이였고, 5,6리를 가니 산이 갑자기 산이 골짜기로 되어 띄처럼 가로 놓였는데 끝없이 깊고 그 폭은 겨우 2자쯤 되었다. 혹은 건너 뛰고 혹은 손으로 잡고 건너서 4,5리를 가니 또 구렁텅이가 나왔다. 나무를 베어 받침대를 만들어 건너갔다. 약간 서쪽으로 수백 보를 가서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연못이 하나 있는데 마치 숫구멍과 같았고 주위는 2,30리쯤 되었다. 깊이는 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사면의 벽이 우뚝 솟아 있는 (이하생략)
6.《조선왕조의 백두산인식》 논문 번역 소개
관심있는 분들의 원문 대조를 위해 원문을 파일로 만들어 올렸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백두산인식(白頭山認識)》
이화자(李花子) 씀
봉오선생 번역
전언(前言: 머리말)
장백산(長白山)은 한국에서는 이를 백두산(白頭山)이라 한다. 북한 함경도 경성(鏡城)에 따로 백두산(白頭山)이라 불려지고 있는 산이 있는데 우리는 잠시 이를 경성장백산(鏡城長白山)(지금은 冠帽峰으로 불려진다)이라 하겠다. 많은 한국 학자들이 연구하면서 때때로 이 두 산을 혼동하고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꼭 이 장백산(백두산)은 북한 경내의 저 장백산(長白山)(경성관내)이 아니란 사실을 천명해 둘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장백산(長白山)은 만청제국(滿淸帝國)의 발상성지(發祥聖地)일 뿐 아니라,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처음 일어난 성지(聖地)를 상징하기도 하거니와 특히 근대에 들어와 그 뒤로 조선의 주권국가로서의 지위가 상실됨에 따라 민족의 위기가 닥쳐오면서 이 산이 주는 특수한 함의는 한국민족의 성산(聖山)의 상징으로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반도는 또 남·북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체(政體)의 국가로 갈라져 조선민족은 동족상잔의 참통한 일막을 만나, 삼팔선 이남의 한국인들은 장백산천지(白頭山天池)를 오르려면 반드시 중국 경내를 우회하여야 올라갈 수 있고, 이는 한반도 남북분열의 현실을 실감케 한다.
과거 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선민(先民)들의 백두산에 대한 존숭의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상으로는 겨우 조선왕조 후기, 특히 조선 영조(英祖) 시대에 이르러 장백산은 비로소 특수한 함의를 갖게 되어 조선왕조 존숭의 대상으로 되었다. 이 글에서는 처음으로 조선왕조시대를 주선(主線: 대요)으로 하여 역대의 장백산의 인식을 고찰하려고 하는데 특히 그 산천사전(山川祀典)을 고찰함으로써 북쪽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백두산이 조선왕조의 성산(聖山)의 하나로 된 역사과정을 천명해 보려고 한다.
一. 조선왕조 초기에 장백산(長白山)은 역외(域外)의 산으로 간주되었다
조선왕조의 초창기에 장백산은 국가의 정식 산천사전(山川祀典) 중에 들어 있지 않았다. 태종 14년(1414) 8월에, 조선 예조에서는 산천사전(山川祀典)에 관한 제도를 올렸는데 당의 예악제(禮樂制)와 송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따라, 경내의 명산대천 및 제산천의 등급을 자세히 정하여 규정하기를, 악(岳)·해(海)·독(瀆)을 중사(中祀)로 하고, 제산천을 소사(小祀)로 하였다. 그 가운데 악(岳)은 삼각산(三角山)(서울 부근)·송악산(松岳山)(개성)·지리산(智異山)(전라도)·비백산(鼻白山)(함경도)를 포함하였으니 곧 사악(四岳)이요, 해(海)는 남해(南海)·동해(東海)·서해(西海)를 포함하였으나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고 북쪽은 육지와 연결되었으므로 삼면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드린 것이요, 독(瀆)은 한강(漢江)·덕진(德津)·가야진(伽耶津)·압록강(鴨綠江)·평양강(平壤江)(대동강)을 포함하였으니 곧 6독(瀆)인바, 이상의 악(岳)·해(海)·독(瀆)은 중사(中祀)이다. 이외에 경내의 제산은 소사(小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목멱산(木覓山)·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계룡산(鷄龍山)·죽령산(竹嶺山)·주흘산(主屹山)·금성산(錦城山)·치악산(雉岳山)·의관령(義館嶺)·명소우이산(溟所牛耳山)·장산곳(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곳(松串)·비류수(沸流水)·청청강(淸川江)·구진익수(九津溺水) 등을 포함하였다. 장백산은 중사(中祀)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사(小祀)에도 들어가 있지 않았거니와 이는 경기도의 용호산(龍虎山)·화악(華岳), 경상도의 진주(晉州) 성황(城隍)과 함께 지방관이 따로 행하는 제사에 규정되어 있었다. 이와 비교하여, 비백산(鼻白山)은 북악(北岳)으로 규정되었으니, 분명히 그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탄생지인 영흥 (永興) 북쪽의 일개 진산(鎭山)이 존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 때 유교(儒敎)를 숭상하여 각종 문물제도가 진일보하여 완비되었다. 세종 19년(1437) 3월에, 예조에서는 각도순심별감(各道巡審別監)의 계본(啓本: 보고서)에 근거해서 해(海)·악(岳)·독(瀆)·산천단묘(山川壇廟) 및 신패제도(神牌制度)를 자세히 규정함에 있어, 비백산(鼻白山)은 여전히 중사(中祀)에 집어 넣고, 소재지 관원이 따로 제사를 모시던 현덕진백두산(顯德鎭白頭山)은 사전(祀典)에서 삭제되고 말았다. 당시에 제단 신위 판 위에 하나는 "백두산지신(白頭山之神)"이라 써 있었고, 다른 하나는 "현덕진지신(顯德鎭之神)"이라 써 있었다고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현덕진백두산(顯德鎭白頭山)이 사전(祀典)에서 빠지게 된 이유는 "상기 백두산은 우리나라 경내에 있지 않고, 현덕진(顯德鎭)은 고려 때 혁파되어 별로 영험하지도 않사오니 청컨대 사전(祀典)에서 삭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니, 첫째 백두산은 역외의 산으로 간주되었던 것이요, 두째 현덕진(顯德鎭)은 고려 때 이미 혁파되었으니 본국 경내에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하지도 않은 진(鎭)에서 제사를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사전(祀典)에서 삭제되고 말았던 것이다.
세종 때, 장백산이 역외의 산으로 간주된 것은 당연한 바, 당시 장백산 부근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은 조선으로부터 야인(野人)으로 불려지던 여진부락으로,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조선의 촌락을 공격, 조선의 압록강을 따라 설치된 사군(四郡)과 두만강에 설치된 육진(六鎭)은 바로 이러한 여진부락의 침습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왕조 초기 근 1백년 동안 줄곳 간단없이 남부로부터 주민들을 서북지구인 평안도(平安道)·함경도(咸鏡道)와 황해도(黃海道)로 이주시킴으로써 채우거나 변강을 굳건히 하였다. 중종 때(1507~1544)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어윤강(魚潤江)(달리 '西豆水'·'西北川'으로 불려졌던 도문강 상류의 지류)과 박하천(朴下川) 등을 두만강 밖 야인들의 구역이라 하여, 장백산 남쪽의 도문강 상류 지역을 여진인들의 고향(家園)으로 표명하였다.
《조선세종실록(朝鮮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는 현존하는 조선왕조의 가장 빠른 지리지로서 그 지역의 지리를 자세하게 고찰하였는바, 함길도(咸吉道) 명산 중에는 백두산이 없고 주로 아래와 같은 3개의 산을 포함하고 있는데 명산으로 비백산(鼻白山)은 정평부(定平府) 서북 4백여 리에 있고, 백산(白山)은 경성군(鏡城郡) 서쪽에 있고, 오압산(烏鴨山)은 안변부(安邊府) 동쪽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의 "백산(白山)"은 분명히 "경성장백산(鏡城長白山)"을 가리키는 것이요, 백두산은 역외의 산이기 때문에 함길도의 명산 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당시, 조선왕조의 발상지는 여전히 태조의 탄생지인 영흥(永興)을 중시, 세종 13년(1431) 10월에, 일찍이 함길도 도순찰사인 유사눌이 《용흥가(龍興歌)》 1편을 써서 태조의 창업공덕을 구가하면서 그는 "山從長白山來, 水向龍興江流; 山與水鐘秀儲祥, 太祖大王乃生; 源遠流長, 德厚流長, 奄有東方東只, 且傳祚無疆。"라고 하였다. 영흥(永興) 관내에서는 확실히 영흥강(永興江)이라고 하는 한 줄기의 강이 있으니 이 강은 원래 화주강(和州江)으로 부르던 것으로, 태종(1401~1418)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업의 기초를 닦은 하륜(河崙)에 의해 이 강은 용흥강(龍興江)으로 개칭되었다. 여기의 장백산은 영흥(永興)의 지리적 형세로 분석하건대, 마땅히 영흥 북쪽의 경성장백산(鏡城長白山)을 가리키는 바, 그 이유는 경성장백산은 함경도 관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山從長白山來, 水向龍興江流……太祖大王乃生"이라는 왕조의 발상의 위업을 찬미하는 싯귀로 된 것이다.
이와 관계없이 장백산은 동방에서 가장 높은 산봉오리로서, 조선의 북부의 모든 산들은 여기서 기원하였다는 지리인식이 진즉부터 출현하였다. 《조선세종실록(朝鮮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기록하기를, 함길도(咸吉道)의 네 경계는 "동쪽으로 대해(大海) 가까이 있고, 남쪽은 철령(鐵嶺)과 경계를 하고 있고, 서쪽은 황해·평안도와 접하며, 준령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으로 철령으로 달려 가는데 그 길이가 1천여 리요, 북으로 야인의 경계에 이른다(東濱大海, 南界鐵嶺, 西接黃海、平安道, 有峻嶺自白頭山起伏, 南走鐵嶺, 綿亘千餘里, 北連野人界面。"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준령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1천여 리를 달려 철령(鐵嶺)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백두산 산맥체계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다. 이후, 이러한 의식은 갈수록 커져서 1667년(현종 7년, 강희 6년) 부제학 민정중(閔鼎重)은 국왕에게 보고하면서 북도의 형세에 대해 언급하기를, "백두산에는 한 줄기의 띠처럼 좁은 강이 있어, 삼수(三水)·갑산(甲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간 것이 바로 압록강(鴨綠江)이옵고, 그 동쪽으로 흘러간 것이 바로 두만강(豆滿江)이옵니다. 백두산 한 지맥이 우리의 경내로 들어 와, 동쪽으로 가다가 장백산(長白山)(경성)이 되고, 육진(六鎭) 및 경성(鏡城)·명천(明川)·길주(吉州)은 모두 그 아래에 속하옵고, 형승은 대저 이와 같사옵니다"라고 하자, 국왕이 묻기를, "그렇다면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지방이 아니란 말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민정중(閔鼎重)이 대답하기를, "그곳은 오랑캐 땅이옵니다"라고 하자,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거들러서 말하기를, "백두산은 오랑캐 땅에 있사오나 실제로는 우리 산천의 근원이옵니다."라고 하였다.(白頭山一帶水, 自三·甲之後, 西流者乃爲鴨江, 其東流者乃爲豆滿。白頭一支, 入我境, 東走爲長白山, 六鎭及鏡·明·吉, 皆列在其下矣, 形勝大抵如此也。上曰, 然則白頭非我國地方乎? 對曰, 此胡地也。洪命夏曰, 白頭在於胡地, 而實我國山川之祖也。)"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제204책, 현종 8년 10월 3일 기사 참조)
二. 1712년 정계(定界) 후 장백산은 중국과 조선의 계산(界山: 두 나라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되었다
1712년(강희 51년)에, 청나라에서 오라초관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중국과 조선 사이의 압록강 ·도문강의 국경선, 특히 특히 장백산 일대의 지형을 조사하려고 한 목적은 청조여도(淸朝輿圖) -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목극등(穆克等)이 변경을 조사한다는 소식이 전해 오자 조선에서는 급히 그 대책을 강구했다. 압록강 · 두만강은 이미 두 나라의 자연적인 변계(邊界: 변경)와 피차간에 공인된 국경선으로 되었다. 문제는 두 강 사이에 육지와 접해 있는 지방은 어느 쪽의 변경이며, 장백산 이남 지구의 여진부락(女眞部落)이 1백여 년 이래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피차의 경계가 불분명하였거니와 이런 이유로 해서 조선의 변경민들이 장백산 이남의 험천(險川)(劍川)·보다회천(甫多會川) 사이에 거주하면서 사냥을 할 때, 그들에 대해서 국경을 넘어간 죄목으로 처벌 여부를 두고 바로 조선 조신들의 쟁론의 화재가 되기도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제356책, 숙종 20년 3월 23일조 기사 참조)
당시 조선의 진보(鎭堡) · 파수(把守)는 모두 장백산으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5,6일 노정의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은 바로 조선의 실제통제선이었으나, 조선은 청조에 대한 군사방어의 목적에서 나와, 장백산을 하나의 천연 보호벽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장백산 천지(天池) 이남을 조선 경계로 정하는 것을 목표로 말이 나오게 되었다. 비록 일부 신하들이 장백산 천지를 "가로로 절단해서 경계로 하는 것(橫截做限) "은 곧 천지를 절반으로 나누자는 말이 나왔지만, 대다수의 신하들은 장백산 천지가 청조에 대해 갖고 있는 의미라든가 청조가 장백산을 중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조사를 하고 심지어는 관원을 보내어 이 산에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은 모두 청조가 장백산에서 나와 그곳을 왕조의 발상지로 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역관 김지남(金指男)이 목극등(穆克登)을 직접 대면하였을 때, "천지를 가로로 절단해서 경계로 하자(天池橫截做限)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하고 장백산 "대지(大池)의 남쪽이 곧 우리나라의 땅이다(大池之南卽我國界)"란 말을 꺼냈던 것이다.(《조선숙종실록(朝鮮肅宗實錄)》 권51, 숙종 38년 5월 정해조 기사 참조)
정계(定界)한 결과, 장백산 천지 이남 10여 리의 분수령상에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비문에는 "대청 오라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방의 경계를 직접 조사하고자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오, 동쪽은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大淸烏喇總官穆克登奉旨査邊, 至此審査, 西爲鴨錄, 東爲土門, 故爲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기록하였다. 이번의 경계(定界)는 중(中)·조(朝) 두 나라는 압록강·도문강을 경계로 한 사실을 재확인하였거니와, 게다가 이전의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은 장백산 일대 변계가 분명해져, 장백산 천지는 청왕조 발상지로 청조에 들어가고, 천지 이남은 경계비가 서 있던 분수령 이남은 조선에 획귀(劃歸)된 것이 한층 뚜렸해지게 되어, 조선은 예기했던 정계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것이다. 이로부터 장백산은 중·조의 계산(界山)으로 되어, 그것은 중국의 산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산인 이상, 조선의 역관이 《백산도(白山圖)》를 얻을 수 있느냐고 요청하였을 때, 목극등이 아주 격앙된 어조로,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 줄 수는 없으나 백산(白山)은 바로 당신네 나라이니 어찌 그림으로 그려주는 것이 어렵겠는가?(大國山川不可畵給, 而白山乃爾國也, 何難畵給?)"라고 표명하였다는데 이상할 것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백산(白山)"은 마땅히 장백산, 곧 조선에서 백두산(白頭山)이라도 하고, 백산(白山)으로 간칭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장백산 남쪽의 "소백산(小白山)"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경계비는 조선인들이 소백산 꼭대기로부터 장백산 천지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조서인, 《강희년간목극등사변정계고변(康熙年間穆克登査邊定界考辨)》, 《중국변강사지연구(中國邊疆史地硏究)》 2003년 제3기 참조)
이번의 정계는, 중·조 두 나라가 압록강·도문강을 경계로 한 사실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조선으로 하여금 장백산 저 천연장벽의 보호를 획득함으로써 영토상의 안전감(安全感), 특히 장백산 이남 지구에서의 발전적 공간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서북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끊임없이 이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개간을 하여 정착을 하게 되었으며, 도문강 상류인 무산(茂山)은 토지가 비옥하여 유민들이 갈수록 꾸역꾸역 많이 모여 들면서 점차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전하는 북방의 웅읍(雄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광서년간의 중·조 두 나라의 감계(勘界)(을해 · 정유) 때, 중국측 감계 요원들은 무산(茂山) 이북의 서두수(西豆水)(달리 '魚潤江'으로도 불려지는 도문강 상류의 지류) 부근에는 진즉부터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되어, 집과 묘지 모두 이미 연조가 오래되었고, 그 북쪽인 홍단수(紅丹水)(도문강 상류 지류)와 홍토산수(紅土山水)(도문강 상류 가장 북쪽 지류) 사이에 오래전부터 조선 백성 1백여 호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 바,(방랑, 《길조분계안(吉朝分界案)》, 양소전·손옥매의 《중조관계사(中朝關係史)》 길림문사출판사 1993년판, 293~296쪽에서 전인하였다) 이미 백두산 천지 부근으로 바짝 접근하였던 것이 뚜렷해졌다.
이번 정계(定界)는 또 18세기 중·후기 조선지도 제작에 하나의 효시로 되었다. 그 이전의 조선의 지도는 북부 국경선에 대해 상당히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표시되었으니 이후로는 조선지도에서 압록강·도문강과 장백산 천지 등이 분명하게 표시되었으며, 강북(江北)은 경외의 지역이라는 이유로 기본적으로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던 것이 지도에서 정계비의 위치를 표시한다든가 심지어 접계의 경계비와 도문강에서 바로 발원하는 목책(木柵)과 석퇴(石堆)(원문의 '土墩'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의해 '石堆'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았다, 필자주)까지도 표시하였다. 이번의 정계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변계의식과 강역의식을 제고시켰음을 알 수 있다.
三. 영조시기 장백산의 국사사전화(國家祀典化)
조선 영조시기(1724~1776)에 장백산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북부에 대한 관방의 중시에 기인하였다. 영초 초년에, 등등기래침설(磴磴磯來侵說)과 영고탑패귀설(寧古塔敗歸說)로 시끄러운 가운데 등등기(磴磴磯)와 영고탑(寧古塔)의 정확한 위치는 국왕의 큰 흥미를 자아내게 하여 신하들이 이 지방을 설명할 때 항항 장백산(長白山)을 참조물로 삼았으니, 예를 들어 등등기(磴磴磯)는 백두산 왼쪽에 있다라든가 또는 영고탑(寧古塔)이 백두산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는 그 사이가 2천여 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조선영조실록(朝鮮英祖實錄)》 권63, 영조 22년 3월 갑오조 참조)
영조 37년(1761)에, 조선에서는 장백산(백두산)이 비백산(鼻白山)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인지 여부에 대한 일장의 대논변이 전개되었다. 처음에 예조판서 한익모(韓翼모)가 제기하였고, 그를 우두머리로 하는 지지자들의 주장 뿐이었는데 그 첫째는 북도(함경도)는 왕조발상지이나, 장백산(백두산)은 북도 산수의 발원지이다. 그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북로(北路)는 주나라의 빈기(豳岐)와 한나라의 풍패(豊沛)와 마찬가지로 역대조상들의 구기(舊基)로서, 토인들이 아직까지도 아무 강 아무 언덕을 역대조상들의 능침(陵寢: 제왕의 무덤)으로 알고, 모두 북로(北路)로 받들고 있지만, 어느 강물이나 어느 산 기슭인들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산이야 말로 실로 우리 왕조의 빛나는 발상지(發祥地)라 할 수 있다(我國北路, 若周之豳岐, 漢之豊沛, 列祖舊基, 土人尙知某水某丘, 列祖陵寢, 皆奉北路, 而一水一麓, 無不發源於白頭。慈山實我朝炳靈發祥之地。)"라고 하였다. 그 둘로, 장백산(백두산)은 조선 "모든 산의 조종(諸山之祖宗)이다"라고 한 것이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제1189책, 영조 37년 1월 30일 기사 참조)
지지자들의 건의는 영조의 마음에 딱 들었는데, 영조는 조선 역사상 저명한 탕평 군주로서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노론(老論)·소론(小論)·남인(南人) 등 각파의 역량을 균형있게 하여 왕권을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모든 산의 조종인 백두산을 북악(北岳)으로 정함으로써 비백산(鼻白山)에 비해 그 상징적 의의가 큰 이상, 함경도(咸鏡道)를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서의 지위를 제고시키는 데 도움을 주면서 왕조가 처음 일어났던 곳을 존숭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보다 많은 시한들이 혹은 회피하거나 혹은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자들의 이유는 첫째 백두산은 오랑캐 땅에 걸쳐 있어 꼭대기에 올라 제사를 올리는 것이 불편할 뿐더러 "제후는 봉지 내의 산천에만 제사를 올려야 한다(諸侯祭封內山川)는 예제에 비로소 합치되었다. 두째로 조종조에 없던 새로운 예제를 새로 만드는 것을 반대하였다. 예조참판 서지수(徐志修)와 같은 이는 백두산이 사전(祀典)에서 누락된 원인을 분석하여 말하기를, "사전(祀典)을 정한다거나 육진(六鎭)을 개척한 일은 모두 세종조에 있었사온즉, 여기서 중단할 수는 없사옵니다. 거기서 누락된 것은 예조의 의견이 있을터인즉 신이 감히 억측하여 답변드릴 수 없나이다(祀典之定, 六鎭之開拓, 皆在世宗祖, 則未可以此爲斷矣。其所見漏, 又有禮意, 而臣不敢臆對矣。"라고 하였다. 서지수(徐志修)가 한 말은 아주 모호하지만 그는 세종조 때 산천사전(山川祀典)을 정하면서 경흥(慶興) 등은 선조의 조기지지(肇基之地)로서 이미 우리의 판도 안에 들어 있고, 도리어 영흥(永興)(태조 이성계의 탄생지) 북쪽의 비백산(鼻白山)을 북악(北岳)으로 정한 것은 틀림없이 모종의 예의(禮意)에서 나온 것으로 그는 함부로 추측한다는 것은 좀 곤란하다는 말이다.
거의 4개월간에 걸친 논쟁기간 동안, 국왕은 중앙관리의 의견을 청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재외의 산림(山林)에 있는 여러 신하들과 유생(儒生)들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지지자가 몇 사람 되지 않자, 마지막으로 국왕은 부득이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의 대변론은 비록 장백산(백두산)이 비백산(鼻白山)을 대신하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장백산은 동방의 가장 높은 산으로서 조선의 모든 산의 조종(祖宗)이라는 종산의식(宗山意識)이 더욱 강화되었고 이는 나중에 장백산을 북악으로 정하는 데 있어서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6년 뒤, 곧 영조 43년(1767)에, 논의가 다시 전개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좌의정으로 승진한 한익모(韓翼모)가 다시 이 일을 재추진하자, 국왕은 전보다 한층 단호했다. 전술한 바 있는 장백산이 "오랑캐 땅에 걸쳐 있어서(跨越胡界)" 무엇보다도 꼭대기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난제는 망사(望祀: 제사지내려는 산천에 가지 않고 먼 곳에서 바라보고 지내는 제사)를 통해서 아주 수월하게 해결되었다. 이때는 이미 영조의 말년으로, 그가 탕평책(蕩平策)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왕권이 강화되어, 그는 마치 미완의 사업 하나를 완성하려는 신하들에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1장인 "今我始祖, 慶興是宅"을 친히 읽어 보도록 하여 추보지도(追報之道)를 다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번에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대신들의 반대에 부딛쳤는데 판부사 서지수(徐志修) 같은 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즉, "우리 국조의 발생지는 대개 경흥(慶興)에 있는데 백두산은 경흥보다 거리상으로 4, 5백 리나 멉니다. 발상지와 탄생지가 어디 있느냐를 가지고 헤아려 볼 경우 어쩌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조종이 되는 산에 대한 설에 있어서는, 경전(經典)이나 정사(正史)에도 나타나 있지 않고 몇 사람의 논의에 불과하니, 아마도 근거할 만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오례의 (五禮儀)》의 사전(祀典)은 육진(六鎭)을 개척한 뒤에 정했는데, 북방 산악의 제사 차례에 비백산(鼻白山)만 넣고 백두산(白頭山)은 넣지 않은 것은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지금 만약 어느 정도 증감하려고 할 경우, 봉상시(奉常寺)에서 신실(神室)로 받드는 산천의 차서에 반드시 철애지단(掣碍之端)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지수가 반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개괄할 수 있다. 첫째, 백두산은 발상지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다. 둘째, 백두산이 조선의 종산이라고 하는 것은 문헌의 근거가 없고 단지 개인의 논의에 불과하다. 셋째, 국초에 《오례의(五禮儀)》를 제정할 때, 경흥(慶興)을 포괄하여 육진(六鎭)이 이미 경계 안으로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장백산(長白山)이 아닌 비백산(鼻白山)을 북악(北岳)으로 한 것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장백산으로써 비백산을 대체하는 것을 반대했고, 게다가 국초에 제정한 《오례의(五禮儀)》의 예의 취지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형조판서 홍중효(洪重孝)의 반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근간이니 이번에 제기된 망사(望祀)의 의론은 진실로 우연히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제후는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지낸다(諸候祭封內山川。)'라고 하였는데 신은 이 산이 과연 나라 안에 있는 산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목극등(穆克登)이 경계를 정할 때에 분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는데, 그 산마루에서 백두산과의 거리가 거의 하루 길이나 되니, 아마도 그곳을 나라 안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단을 설치할 장소에 있어서는 어느 고을로 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오직 무산(茂山)과 갑산(甲山)에서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고을 지대는 일찍 얼어붙었다가 늦게야 해동이 되므로 8월에도 더러 한 길이나 되게 눈이 내리기도 하며, 2월에는 얼음이 한 길도 넘게 얼어부터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편상 백성을 동원하여 길을 정비하고 눈을 쓸고 얼음을 깨낸 이후에야 제사를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바람과 추위 그리고 비나 눈을 만날 경우 아전과 역졸들이 동사(凍死)를 면할 수 있을지도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기(禮記)》를 고찰해 봐도 맞지 않고 계절로 맞춰 봐도 행하기 어려운데 풍패(豊沛)의 백성에 대한 폐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점이 또 이와 같으니 이것을 어찌 그만둘 수 없는 행사라고 하겠습니까? 신의 얕은 견해로는 아마도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홍중효(洪重孝)가 백두산에 망사(望祀)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예기(禮記)》에 "제후는 나라 안의 산천에 제사지낸다(諸侯祭封內山川)"라고 하였는데, 장백산 천지는 청조의 경계 내에 있고 비석이 소재하고 있는 분수령 이남은 겨우 조선에 속하므로 역외(域外)의 산에 제사지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기서 홍중효(洪重孝)는 분수령은 천지와 하루 거리라고 언급하였지만 틀린 것이 당연해서 실제로는 겨우 10여 리였다. 둘째, 장백산에 망사(望祀)할 수 있는 무산(茂山)과 갑산(甲山)은 그 기후가 일찍 추워지고 늦게 날씨가 풀려 만약 춘추로 망사를 실행하려면 풍패지향(豊沛之鄕)에 민폐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결심은 이미 정해져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1장 '지금 우리 시조는 경흥에 집이 있다(今我始祖, 慶興是宅)라는 여덟 글자가 내 마음에 더욱 간절히 와닿았다. 이는 특히 백두산이 우리나라 산이 된다는 더욱 명백한 증험인 것이다. 아무리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 하더라도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히려 망제(望祭)를 하는 것도 마땅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데 있어서랴? 망사(望祀)의 세세한 절차를 의조(儀曹: 예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되, 제단을 설치하기에 적합한 곳은 도신(道臣: 관찰사)에게 물어서 상세하게 장계(狀啓)를 올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는 곧 국왕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근거해서, 경흥(慶興)이 왕조의 발상지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장백산이 조선의 산임을 강조하였는바, 그가 언급한 "비록 우리 땅이 아니라 하더라도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히려 망제(望祭)를 하는 것도 마땅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데 있어서랴?(雖非我國之境, 其在追報之道, 猶當望祭, 況在我國乎?)"라고 하는 이 단락의 설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할 도리가 없게 하며, 전술한 몇 명의 대신들이 장백산은 역외의 산일 뿐만 아니라 산꼭대기에 올라가 제사지내기에 불편하다는 관점과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이는 아마도 국왕이 장백산에 꼭 제사지내야 한다는 일종의 절박한 심리를 표명한 것이요, 또 그는 장백산이야 말로 중(中) · 조(朝)의 계산(界山)이므로, 그 절반은 마땅히 조선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상은 《조선영조실록(朝鮮英祖實錄)》 권109, 영조 43년 7월 신축조 기사 참조)
위와 같이, 국왕은 예조로 하여금 망사(望祀)를 주관토록 함과 동시에 함경도관찰사에에 지시하여 제단 설치에 적합한 지점을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토록 하였다. 함경도관찰사 김기대(金器大)는 갑산 망산평에서 망사처(望祀處)를 잡으러 다녔는데, 그가 땅을 잡기 위해 여러 날 야외에서 노숙하자 국왕은 숙마(熟馬) 1필을 특별히 하사하도록 명하여 격려했다. 제사의 규격을 높이기 위해, 국왕은 홍문관 제학(提學)에게 제문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고, 그와 아울러 비백산(鼻白山)의 전례 대로 서울에서 제복(祭服) · 제기(祭器)를 보냈으며, 매년 정월·2월·8월에 3차례씩 제단을 설치하도록 규정, 그 이듬해 곧 영조 44년(1768) 정월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하여 장백산은 왕조가 일어나고 처음 그 터를 닦은 곳(興王肇基之所)으로 되었고, 청조와 조선에서 모두 존숭을 받았는데, 청조는 오악(五岳) 외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제사하여 사전(祀典)에는 오악(五岳) 그대로였지만 조선은 장백산을 사악(四岳)의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정하였다.
四. 고종시기의 장백산인식
고종시기(1864~1906)에 이르러, 장백산(백두산)은 조선의 산으로 인식되었으니, "우리나라 백두산(我國白頭山)" · "우리나라 백두(我東白頭)"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1백년 동안의 제사활동을 거쳐서 사상감정상 조선인과 백두산은 한층 가까워지게 되었다. 유교 예의 질서 아래서 국가는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지내는 것은 한편으로는 왕조의 정통성을 널리 선포하여 알리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의 국왕 및 왕실에 대한 충성을 강화시킬 수 있으니 특히 장백산을 왕조발상지로서 위와 같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조선은 또 장백산은 중·조 두 나라의 계산(界山)임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서년간에, 두번이나 조선측 감계(勘界) 대표를 맡았던 이중하(李重夏)가 《백두산일기(白頭山日記)》에 쓰기를, "백두산은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구비구비 수천리 동북으로 치달아 중국 동삼성(東三省)에 이르러 우뚝 일어났다가 우리나라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에 1천여 리를 도사리고 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넓고 크다. 동남으로 가서 그것은 우리나라 모든 산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북쪽의 영고탑(寧古塔)·오라(烏喇) 등은 그 지맥이 뻗어 나간 땅이다."라고 하였다. 1899년에, 현채(玄采)를 우두머리로 한 조선학부 편집국에서 《대한지지(大韓地志)》 함경북도편에 이러한 기록이 있으니, "백두산은 우리 함경도와 청국 길림성에 우뚝 솟아 있는 제일 높은 산으로서, 산꼭대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 흰눈을 이고 있으며, 산허리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깎아지른 언덕이 우뚝 솟아 천태만상이요, 풍취가 세속을 초월하여 실로 세외의 승경(勝景)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들은 실로 이 산에서 맥이 갈라져서 분수령(分水嶺)(무산)·연지봉(蓮枝峰)(무산)·소백산(小白山)(무산)·보다회산(寶多會山)(무산) 등 산봉오리와 고개마루가 백두산 앞에 나열되어 있어 산세가 연이서 오르고 내리곤 한다."라고 하였다.
고종시기는 조선왕조 역사상 전통에서 근대화로 가는 중요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내우외환이 빈발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조선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에 점차 강국의 대열로 향하는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갑오전쟁(甲午戰爭) 이후, 1895년 4월에, 중(中)·일(日)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함으로써 청국과 조선은 2백여년간 유지해온 종번관계(宗藩關係)를 종식시키는 표지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친아반일(親俄反日)의 조선 왕후 민씨(閔氏)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조선을 완전히 통제하고, 동년 8월에 왕후시해사건을 일으켰으니, 역사에서 말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그 이듬해에, 고종은 할 수 없이 러시아 공관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것이다. 1897년 2월에, 고종은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으로 되돌아 와서, 8월에 칭제(稱帝)를 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건립을 공포했다. 고종의 칭제는 비상시기에 실행된 비상조치로서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부터 조성된 군권쇠미(君權衰微)와 국체의 손상을 만회하기 위한 의도에서, 자주근대화(自主近代化)라고 하는 광무개혁(光武改革)의 실행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실현하고 민족위기와 국가위난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은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로 황제로 된 사람으로, 천자로서 비로소 시행할 수 있는 원구단 제천의식만을 실행하고 그는 악(岳)·진(鎭)·해(海)·독(瀆)에 봉호를 실행할 것을 명하여, 광무 7년(1903) 4월에, 고종이 칙지를 내려 "천자만이 천하의 명산과 대천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오악(五岳)·오진(五鎭)·사해(四海)·사독(四瀆)을 아직까지도 미쳐 봉하지 못하여 사전(祀典)을 구비하지 못하였다. 장례원(掌禮院)(원래 예조)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사전(祀典)을 정함으로써 짐이 예로써 귀신을 섬기고자 하는 뜻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조선고종실록(朝鮮高宗實錄)》 권43, 고종 40년 3월 19일조 기사 참조)
이로써 고종은 옛날의 중국황제가 실행한 산천사전(山川祀典) - 악진해독지제(岳鎭海瀆之制)를 구비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장례원은 고종의 지의에 따라 별단(別單)으로 오악(五岳) · 오진 (五鎭) · 사해(四海)의 명칭을 써서 보고를 올렸다. 그 중에 오악(五岳)에 포함된 것은 중악(中岳) 삼각산(三角山)(경기), 동악(東岳) 금강산(金剛山)(강원도 회양군), 남악(南岳) 지리산(地理山)(전라남도 남원군), 서악(西岳) 묘향산(妙香山)(평안북도 영변군), 북악(北岳) 백두산(白頭山)(함경북도 무산군)이었고, 오진(五鎭)으로 포함된 것은 중진(中鎭) 백악산(白岳山)(경기), 동진(東鎭) 오대산(五大山)(강원도 강릉군), 남진(南鎭) 속리산(俗離山)(충청북도 보은군), 서진(西鎭) 구월산(九月山)(황해도 문화진), 북진(北鎭) 장백산(長白山)(함경북도 경성군)이었고, 사해(四海)는 곧 동해(東海)·남해(南海)·서해(西海)·북해(北海)로서, 각기 강원도·전라남도·황해도·함경북도에서 제사를 하도록 규정하였으며, 사독(四瀆)으로 포함된 곳은 동독(東瀆)은 낙동강(洛東江)(경상북도 상주군), 남독(南瀆)은 한강(漢江)(경성), 서독(西瀆) 패강(浿江)(평안남도 평양, 지금의 대동강), 북독(北瀆) 용흥강(龍興江)(함경남도 영흥군)이었다. 장백산(백두산)과 용흥강 등이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산천으로 상징되어 사전(祀典) 중에 들어 갔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백두산과 관련되어 오악(五岳)의 하나로 정해진 북악(北岳)의 최후의 기록이다. 2년 뒤 1905년에, 일본은 조선을 강박하여 체결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保護國)으로 떨어지고 외교권(外交權)을 상실하였으며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을 선포하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일보의 침략으로 인해 조선의 자주근대화(自主近代化)의 노력은 상실되고, 고종의 칭제·대한제국의 건립 및 산천사전의 정비에도 불구하고, 모두 국가멸망의 명운을 만회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은 최후의 한 차례의 노력이었다.
소결(小結)
조선왕조 건립 초기에 장백산(백두산)은 역외(域外)의 산이었으며, 여진인들의 고향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세종은 《오례의(五禮儀)》를 정할 때, 장백산을 국가사전(國家祀典) 중에 집어 넣지 못했으니, 영흥(永興)은 태조 탄생지였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 그 북쪽에 있는 비백산(鼻白山)은 북악으로 되었지만, 장백산은 심지어 지방에서 따로 제사를 모시는 산천의 명단 목록에서조차 되어 제사가 삭제되고 말았다.
1712년(강희 51년) 목극등(穆克登)이 장백산에 올라 경계를 정하면서 조선은 장백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에서는 주로 장백산이 그 북부변방의 천연의 장벽으로서 작용하는 점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장백산 천지 이남을 조선의 정계 목표로 언급하게 된 것이다. 정계의 결과, 정계비는 천지 이남 10여 리에 잇는 곳에 세워져, 장백산 천지는 청나라로 귀속되고, 그 아래 분수령 이남은 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장백산 중(中)·조(朝)의 계산(界山)으로 되었다.
영조는 왕권과 탕평정택의 수요를 강화하려는 데서 나와 왕실의 지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그는 수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중의 "今我始祖, 慶興是宅"에 근거해서, 왕조발상지를 세종조의 태종 탄생지인 영흥(永興)으로부터 목조(穆祖)의 탄생지 - 두만강변의 경흥으로 추진하여 그 북쪽인 장백산을 북악으로 정하였다. 장백산은 동방에서 가장 높은 봉오리로서, 조선의 풍수지리 중 조선 모든 산의 조종으로 간주되어, 마치 사람의 몸통에서 머리와 같이 조선 북쪽의 어느 산 어느 강물인들 여기서 길러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장백산이 조선왕조의 성산(聖山)으로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고종시기에, 사상감정상 장백산은 이미 조선화(朝鮮化)되었고, 그래서 "우리나라 백두산(我國白頭山)" · "우리나라 백두(我東白頭)"라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조선은 또 장백산은 중(中)·조(朝)의 계산(界山)임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은 군권강화(君權强化)와 국가위난(國家危難)을 해결하기 위해 칭제건호(稱帝建號)하여 장백산을 포괄하여 산천에 포함시키는 봉호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일본 침략이 가일층 심화되면서 조선은 최후로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독립을 상실한 뒤, 국내와 국외는 물론 조선인들은 여지껏 국가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을 포기한 일이 없이, 장백산은 원래부터 조선의 발상인 성산을 상징하고, 전하여 조선민족 독립정신을 상징하는 영산으로 되었다. 이 점은 일제시기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애국가(愛國歌)(지금의 한국 국가)의 가사인 발견할 수 있으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에서 간파할 수 있다.<끝>
[출처] 외국학자의 백두산(白頭山)에 관한 인식 (만주원류고를 사랑하는 모임) |작성자 봉오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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