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들도 한 무리가 되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입니다. '선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인데 '착한', '참된', '유능한', 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거나 게으르거나 나쁜 목자가 아니라 착하고 유능한 목자요, 거짓되고 속이는 삯군 목자가 아니라 참되고 진실한 목자입니다. 좋은 목자입니다. 벧전2:25에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분입니다.
우리가 롤 모델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순신 장군이 나의 롤 모델입니다.' ‘손흥민이 나의 롤모델입니다.’라고 합니다. 롤 모델은 그의 가치관이나 그의 삶을 본받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나의 우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롤 모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단순히 바라보고 닮고 싶은 분이 아니라 우리가 떠나서는 안 되는 영혼의 목자이시고 내 인생의 감독자이십니다.
시100:3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얼마나 정확히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나를 지으신 창조자시고 나는 그분의 것입니다. 나는 그의 백성이고 그가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신앙고백이 담긴 시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목자, 선한 목자인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양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말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고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평생에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집에 살리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이 고백한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나는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11,14절). 그리고 우리를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 중에 간혹 정말 나쁜 사람은 금수와 같다고 합니다.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양처럼 목자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가장 안 되고 불쌍한 자를 말할 때는 '저 애는 부모가 없데, 고아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 제일 불쌍한 자라고 했느냐 하면 목자 없는 양, 길 잃은 양이라고 했습니다. 마9:35이하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 목자 없는 양이 제일 불쌍할까요? 양은 다른 짐승과 달리 야생에서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특성상 15m앞의 물체를 식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20m앞이 낭떠러지인줄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게 양입니다. 그래서 길을 잃기도 하고 굴러 떨어지기도 합니다. 20m 앞에 늑대가 숨어 있는 줄 모릅니다. 그렇다고 가젤이나 사슴처럼 뛰어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몸집에 비해 다리가 형편없습니다. 그러기에 목자 없는 양은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 하지만 양이 우리를 나가고, 목자를 떠나면 죽음을 의미합니다. 개고생보다 양고생이 더 큽니다. 개나 고양이는 집 나가서 몇 일 개고생하다가 찾아오지만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소나 나귀도 돌아옵니다만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들어오기 싫어서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집을 못 찾아서, 길을 몰라서 못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소는 주인을 알고 나귀는 구유를 알 건마는 내 백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고 탄식했는데(사1:3) 양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튼 양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양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신을 지킬 만한 무기가 없습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짐승과 맞서 싸울 사나운 이빨이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차기도 하지 못합니다. 캥거루처럼 앞발을 들어 공격하지도 못합니다. 움켜쥐거나 공격할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점프도 못해서 얕은 개울 하나 건너 뛰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양은 고집불통이어서 변화를 아주 싫어하는 동물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도랑이 생길 정도로 자기가 가던 같은 길만 갑니다. 그리고 한 번 먹기 시작하면 그 언덕에서만 계속 풀을 뜯어 먹어서 그 주위를 완전히 못쓰게 만듭니다. 양은 움직이기를 싫어합니다. 한 자리에서 먹고 싸고 눕고 합니다. 그래서 양은 쉽게 병듭니다. 이러니 목자가 따라 다니면서 이동시켜야 하고 이끌어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주인 없이도 얼마든지 야생에서 살아가지만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방어능력이 전혀 없는 게 양입니다. 그래서 양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고 목자의 돌봄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양에 비유하신 것은 우리를 조롱하고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하고 미련하고 무능하기에 반드시 목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떠나 결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생력이 없는 존재인 것을 깨우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목자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양이 목자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듯이 “나는 예수님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게도 목자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믿고 언제나 따라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 중에 ‘주 없이 살 수 없네’라는 곡이 있습니다. 프렌시스 해버갈이라는 영국 여성이 지은 찬송인데 가사 내용에서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서리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로 고백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1.먼저 양들의 이름을 안다고 하십니다(3).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아는 것 같이 우리를 아신다고 했습니다(15). 그뿐만 아니라 요17:23에서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나도 저들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를 친히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할렐루야!
2.선한 목자는 양들을 앞서 가신다고 했습니다(4). 앞서 간다는 것은 양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를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본을 보이시고 따라오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 앞서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며 섬기는 것을 우리 앞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로 가셔서 우리 위해 그 나라를 예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3.선한 목자는 때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십니다(9). 우리를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케 하려고 왔다고 했습니다(10). 겔34:16에 보시면 "좋은 꼴을 먹이며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쫒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좋은 꼴을 먹이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넘어진 자에게 먼저 다가와 손 내미시고 일으켜주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싸매주는 분이십니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분이십니다. 계7:17에서도 "보좌 가운데 계신 이가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영원한 목자입니다. 할렐루야!
4.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도 버립니다(11,15절). 그러나 삯군은 위험이 다가오면 양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갑니다(12절). 그리고 삯군은 양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곁길로 가게 하고 쉬지도 못하게 합니다. 렘50:6에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쉴 곳을 잊었도다."라고 합니다. 왜 양들을 곁길로 가게 합니까? 삯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삯군은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막습니다. 삯군은 잃어버린 양을 찾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삯군이 아니라 선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데 우리는 주님께 어떤 양입니까? 우리도 선한 양, 착한 양이 되길 바랍니다. 착한 양은 어떻게 한다고 말합니까. 4절을 보면 착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오직 목자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양입니다. 듣기만 하지 않고 듣고 따라가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요12:26).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이 기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데 결혼을 안 하려고 하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순종하지 못하고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착한 양은 타인의 음성을 듣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습니다(5절). 삯군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주님의 착한 양이 되길 축복합니다.
끝으로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직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 양들을 인도하여야 할 터이라고 합니다. 그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되길 원하고 그들도 목자의 돌봄을 받는 한 무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 보십시오.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돋지 못하는 양들이 너무 많습니다. 울타리 밖에 있는 그들에게 주님은 여전히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들이 돌아오기 위해서도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요17:20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이끌려고 하는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양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길 원합니다. 주님은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하고 전도하길 원하십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 길 잃은 양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 전도와 기도에 힘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