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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에 오르면
주윤 jooyun ・ 20시간 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디를 가든 혼자 가는 걸 원치 않는 데 코로나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지난해부터 계획만 하다가 실천에 옮기지 못했고, 겨우 금년 4월부터 시내 골목투어를 실시하면서 희망하는 문지회원을 모시고 투어를 진행하고 있으니 정말 기분이 좋다. 덕분에 수년간 골목해설사를 지냈지만 잊혀져 가는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 좋았고, 참가한 회원들이 경청해 주시니 고맙고, 그동안 변한 골목을 재발견하니 보람이 있어 좋았다.
28일 10시 동산 선교사 주택앞에 19명 회원님들이 모여 있었다. 약간 많은 숫자일듯 하지만 확성기 없이 무난하게 꼬박 두 시간을 진행했는데 우선 코스부터 알아보자
스윗즈선교사주택 대구시유형문화재 제24호(선교박물관)-능금시조목-챔니스주택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5호(의료박물관)-블레어 주택대구시유형문화재 제26호(교육역사박물관)-박태준노래비-은혜정원-38만세운동길-제일교회-신명학교-동산병원 구관(등록문화재 제15호)-계성학교 아담스관 대구시유형문화재 제 45호-계성학교 멕퍼슨관 대구시유형문화재 제 46호-계성학교핸더슨관 대구시유형문화재 제 47호
동산(해발 48m)은 산이라기 보다 언덕이다.그런데 대구 감영지에서 보면 서남쪽인데 왜 동산이 되었을까. 1601년 안동에서 경상감영이 대구 포정동으로 옮겨오기 전에는 대구달성이 대구의 중심지였고, 거기서는 대략 동쪽방면이라 동산동이란 동명(洞名)이 되었다. 신명학교 90년사에 의하면 동산(銅山)이라 표기했는데, 이곳에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에는명당으로 여기고 몰래 묘를 써서 구린내가 나서 붙인 것이다. 동산은 청라(靑蘿)언덕, 대구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담쟁이가 많은 곳이며, 파리의 몽마르트르는 해발 130m로, 순교자의 언덕이란 의미라는데 무명화가들의 집결지로, 사크레쾨르 성당이 있고, 반고흐의 옛집이 있는 등 파리의 유명관광지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1895년 미국북장로파 선교사들이 달성서씨 문중 땅이었던 동산과 주변 농지를 2200냥에 사들여 동산병원, 계성학교, 신명학교, 영남신학대학(제일교회 자리),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였다.
선교박물관은 1910년에 지었고, 스윗즈 선교사가 살았으며, 대구여자성경학교를 설립한 미혼 여성이며 18년을 봉사하다가 49세로 사망 후 은혜정원에 묻혀있다. 현존하는 세 채의 선교사 주택 중 외형이 가장 아름답다. 대구읍성 돌인 안산암을 주춧돌로 썼고, 벽돌을 쌓았으며, 지붕은 기와로 덮은 지하1층에 2층 양옥이다. 마침 코로나 사태로 문을 닫았기에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초기 대구에 온 선교사들의 활동모습, 선교 유물, 모세 시대에 썼던 등잔. 이스라엘 현지에서 구입한 구약 신약 등이 있다.
가운데 있는 의료박물관은 1911년에 지었으며,챔니스, 레이너, 동산병원장을 지낸 마펫 선교사가 살았다. 외관도 아름다워 영화 '강적', 6월의 향기','모던보이'와 드라마 '사랑비'등의 촬영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래된 의료기기, 세균배양기, 청진기 등 퇴역한 의료기기 전시장이다.
교육역사박물관은 1908년에 지었으며, 블레어, 라이스, 강진성 등이 살았으며, 대구 경북지방의 3.1운동 사료와 교육자료등이 전시되어 있다.
능금시조목은 1900년 존슨 목사가 미국 미주리주에서 사과나무 묘목 72그루를 사들여 대구에 재배하였는데, 과즙과 맛이 재래종과 다른 품종이라 한 때 대구를 사과의 고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하었다. 그 사과나무 2세목을 1998년 남산동 사택에서 스윗즈 주택 옆으로 이식해 대구시보호목으로 지정하여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오늘 와보니 밑둥을 싹둑 잘라 버렸다. 그러지않아도 비실비실했었지만 잘려나간 밑둥을 보노라니 씁쓸한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도 저렇게 흔적조차 없이 샤라질 게 아닌가. 다행히 3세목 세그루가 잘 자라 열매까지 맺고 있어 위안이 된다.
2009년에 세운 박태준의 동무생각 노래비가 자리를 빛내 준다. 한때는 여기를 해설하면서 시원찮은 노래까지 불러줬지만 오늘은 참았다. 유명한 작곡가인 박태준(1900~1986)은 약령서문 서쪽 계산동에서 출생하여 동산을 넘나들며, 계성학교를 다녔고, 이때 여기서 만났던 유인경이란 신명학교 학생을 짝사랑했었단다. 세월이 흘러 마산 창신학교 음악교사가 된 박태준은 국어교사였던 노산 이은상을 만나 그 유명한 '동무생각'이 탄생한 것이다. 마침 전에 없던 백합꽃이 만발하여 운치를 더해 주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나는 흰나리꽃 향기 맡으며/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백합같은 내동무야/네가 내게서 피어날적에/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은혜정원은 선교사들과 가족묘지 이름이다. 맨 뒤 가운데 아담스 선교사의 부인 넬리 딕 아담스 묘지인데 묘지명에는 '그녀는 죽은 게 아니고 잠들어 있다'고 표현했으니 죽음도 이정도로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 맨 앞줄 우측에는 동산병원장을 지내고 계명대학에 의과대학을 설립한 마펫(한국명 마포화열)선교사 내외분이 묻혀 있다. 귀국하여 2013년에 소천하며 유언으로 대구땅에 묻어달라는 뜻이 실현된 모습이다.
3.8만세운동길로 가보자. 대구의 3.1운동은 1주일 뒤인 8일(토), 동산 숲속에 비밀리에 모여 90계단을 따라 내려가 좌회전하여 옛동산파출소가 있었던 강씨 소금가게 앞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로를 따라 대구경찰서 앞에서 우회전하여 종로를 따라 옛 중앙파출소를 거쳐 대구백화점 부근 달성군청까지 행진해 갔다. 3월 4일과 7일에 거사를 주도했던 홍주일과 계성학교 백남채 교사가 체포되었고, 이갑성, 이만집, 김태련, 이재인교사(신명)등이 주도하고, 계성학교 46명, 신명학교 50명, 대구고보(현경북고) 200여명, 성결학교 20명이 참여했는데 오후 1시경 800여명으로 불어났다. 김태련 조사가 달구지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 일경에 잡혀가자 이만집 목사가 뒤를 이어 낭독했다. 아버지 김태련이 잡혀가는 것을 항의하다가 아들 김용해(24세)도 잡혀갔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가출옥한지 3일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김태련 조사는 감옥에서 이 소식을 듣고 그물을 짜서 3원 50전을 모아 비문을 세웠는데 일경의 감시를 피하고자 비명에 이름을 정훈으로 고치기까지 했다. 아! 이런 일이 있었다니……. 혈육이란 바로 이런게 아니던가. 두 분의 유해는 국립신암선열묘지에 모셨다니 그나마 위안이 되려나. 당시 주동했던 이만집, 김태련은 징역 3년과 2년 6월을, 김영서, 백남채, 최상원, 김무생은 징역 2년 등 많은 분들이 실형을 살았고, 225명이나 잡혀갔을 정도였으니 대구의 3.8만세운동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제일교회로 눈을 돌려본다. 1896년은 베어드(한국명 배위량)목사가 대구 남성로에서 첫 예비를 보기 시작한 해다. 100주년을 맞아 동산의 영남신학교 부지를 매입하여 1989년 기공식을 갸진 후 1994년 입당 예배를 보고, 첨탑이 완공된 것은 2002년이며, 제일교회가 새로운 역사를 동산동에서 열개된다. 동산 높이 48m, 종탑 높이 57m를 합치면 105m나 되는 최신 고딕식 화강암 교회당이 우뚝 서서 대구의 새로운 명물이 되있다. 지하 2층, 지상5층(종탑까지 8층)에 연면적 7130㎡(2160평), 대예배실 1840㎡(560평), 스태인드글라스 창문이 16면인 아름다운 건물이다.
현재명나무란 이름을 달고 200년 된 이팝나무 한 그루가 제일교회 북쪽에 서있다. 남산동 출신이고 계성학교를 다녔으니 이 나무를 보고 악상을 떠올려 작곡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하여 대구시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희망의 나라로', '그집앞', 나물캐는 처녀', '고향생각'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명은 친일인명사전에 약 3쪽 정도를 차지할만큼 친일행적을 남긴 사람이다. 우리가 보통 친일(親日)이라면 일본과 친한 게 뭔 좌가 되느냐 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친일이란 일본을 어버이처럼 생각하는 무리들을 가리킨다. 그져 친할 정도가 아니랴는 의미다. 그는 친일단체에 가입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곡을 썼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까지 한 인물인데 그를 기리는 나무를 보호수로 하다니 말이 아니다. 차라리 박태준나무가 어울리지 않을까.
신명학교는 1902년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 마르타 브르엔 등이 신명소학교로 설립하였고, 1907년에 중등학교로 발전시킨 전통의 사립학교이다. 브루엔의 '한국생활 40년'이란 책이 김중순 교수에 의해 번역 출간되었다.
1919년 3.8운동 당시 이재인 교사 등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에 어찌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있으랴. 학교를 미리 방문하여 3.8독립운동기념탑을 참배하겠다고 전언하여 성사가 되었다. 이 기념탑은 학교에 세운 최최의 기념탑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별첨 사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산병원 구관(등록문화재 제15호)으로 옮긴다.고풍스런 붉은 벽돌집을 기리키는데 건물q벽에 설치한 'sinse1899'는 동산병원이 최초로 문을 연 해를 가리키며 건물을 지은 해가 아니다.
동산의료원은 1899년 선교사이자 의사인 존슨(1869〜1951)에 의해 설립되었다. 1897년 존슨은 만삭인 아내와 함께 남성로의 제일교회 자리에 들어왔는데 마침 성탄절이었다. 처음에 미국약방⤑제중원(1899년, 영남지역 최초의 서양의원)⤑동산으로 이전(1906년)⤑지금의 동산의료원⤑계명대학교성서캠퍼스 동산병원으로 확장 이전(2019년)
구관 건물은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병원인 제중원을 전신으로 하여 선교사 플레처(Fletcher)가 건립하였다.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군들이 경찰 병원으로, 한국전쟁 때는 국립경찰병원 대구분원으로 사용하였다. 평면은 ‘一’자 모양으로, 복도를 중심으로 각 실이 마주 보며 배치되어 있고, 정면 중앙에 현관의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었으나 대구지하철 3호선을 개설하기 위해 2010년 현관 부분을 철거하여 동산에 옮겨 두었다.
계성학교 아담스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5호)
대구 최초의 선교사인 아담스(Adams)가 미국 선교부로부터 건축비를 지원받아 1908년에 건립한 영남 최초의 양옥(洋屋)교사(校舍)이다. 건축의 설계는 아담스 선교사가 직접하고 건축공사는 그의 감독하에 중국인 벽돌공과 일본인 목수들이 담당하였다 한다. 이 건물에 사용된 창호 재료, 유리, 위생, 난방시설 등은 미국에서 가져왔고, 붉은 벽돌과 함께 쌓은 석재는 대구 읍성을 철거한 성돌이다.
외관은 정면 중앙에 돌출된 종탑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지붕은 박공지붕에 동기와를 이었다. 벽체는 붉은 벽돌과 함께 안산암으로 조적하고 종탑의 하단부는 인조석 버팀기둥과 반원아치의 아케이드를 설치하였으며 종탑부의 창문은 3심원아치, 교실부는 결원아치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이 건물은 지붕형태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요소가 느껴지며, 벽면구성은 서구의 고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양옥교사라는 역사적 의미 외에도 대구의 개신교사와 당시의 건축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한·양 절충의 구성수법, 외관구성 및 벽돌 조적법 등 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귀중한 건물로 평가된다.
맥퍼슨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6호)
계성학교 제2대 교장이었던 라이너(Reiner) 선교사가 미국에 있던 맥퍼슨(McPherson)에게 자금 지원을 받아 1913년 9월에 건립한 건물이다. 건물의 설계는 아담스(Adams)와 라이너 선교사가 하고 건축공사는 중국인 벽돌공과 일본인 목수들이 담당하였다 한다.
이 건물은 계성학교아담스관의 북쪽에 동향으로 배치된 붉은 벽돌조 2층 건물로, 정면 중앙의 주 출입구에 설치된 사각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며, 지붕은 모임지붕에 한식기와를 이었다. 외관은 대구 성돌을 바른층 쌓기한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였으며 층간에는 수평돌림띠를 돌리고 반원 아치창을 설치하였는데 창의 밑인방은 3단 내쌓기로 물흘림 경사를 두었다. 맥퍼슨관은 한·양 절충의 건물로 한·양 절충의 변화 과정 등을 살필 수 있어 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다.
핸더슨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7호)
계성학교 제4대 교장이었던 핸더슨이 블레어 선교사가 미국에서 염출한 자금으로 1931년 건립한 건물이다. 건물의 설계는 핸더슨이, 건축공사는 핸더슨 교장의 감독하에 학생들이 기초공사를 하고, 상부공사는 중국인 조적공과 일본인 목수들이 담당하였다 한다.
이 건물은 건축 당시 붉은 벽돌조 2층이었으나 1964년 3층으로 증축하면서 건물 내부에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바닥을 슬라브로 개조하였다. 핸더슨관은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고딕풍의 학교 건물로 지금까지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고, 건물이 갖는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구 건축의 유입과정, 외관 구성수법 등을 살필 수 있는 건축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다.
오늘 탐방한 코스는 한국관광공사에서 2012년에 '한국관광의 별'로 지정한 핵심코스의 일부이다. 최소한 이 자료만 갖고도 혼자서 탑방해도 별 무리가 없을만큼 상세한 자료를 담았다. 모쪼록 이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동산동의 대구제일교회>
<제일교회 100주년 기념관>
<현재명 나무>
<신명학교 담장에서 찾은 독립운동자료>
<옛구암서원, 산격동으로 이전한 뒤 게스트하우스로 쓴다>
<선교박물관, 스윗즈 선교사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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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박물관 뒤로 제일교회가 보인다>
<동산의료원의 담장허물기 때 옮겨온 종>
<동산이 하나님이 준비한 땅이라 생각하며 세운 표석>
계성학교 아담스 관 (대구 유형문화재 제45호) - 校志가 -寅畏上帝智之本 이네요.
첫댓글 原本은 명예회장님의 Naver Blog, 날마다 일상 에서 제가 '폄" 해 놓았습니다. 감상 하소서..
어제 (28일) 명예회장님의 주최下에 뜻 있는 골목 투어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대상황이 암울하기만 했던 20세기초 대구사회에 큰영향을 준선교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동산과 주변의 문화유산들을 해설해주신 명예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산은 대구에 기독교가 정착한 성지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이를 고치고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와 병원 교육기관이 시작되고 발전한 동산입니다.
여기에는 조선을 위하여 힘쓰고 애쓰다가 목숨까지 바친 외국인들이 잠들어 있는 은혜의 동산도 있으니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른 나라에 나누어 주는 봉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대단한 유적들이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주춧돌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다시 보는 그것들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오셔서 알려 주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명예회장님 감사합니다. 기록하신 것들은 더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