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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한국의 美_ 활
ysoo 추천 0 조회 64 16.06.15 11: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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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 이생진


해가 어디서 뜨는가
사람들은 그것이 관심사다
해를 지켜보는 사람은 여유 있는 사람이다
상백도 하백도 그 사이에서 해가 뜬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국기에 대하여 경례!’

‘이 아름다움을 지켜온 선열에 대하여 묵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국기 게양대
부동자세 앞에 떠오르는 것은
태양 같은 태극기
파도가 애국가를 합창하자 한다


한 애국자의 준엄한 결의처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6월 한국의 美_ 활


호국의 빛나는 지혜 활 弓


예로부터 우리 선조는 동이족(東夷族 : 해 뜨는 동쪽의 활을 잘 쏘는 종족)이라 불릴 만큼 활을 잘 다뤘으며, 활쏘기를 통해 심신 단련과 더불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활은 가장 중요한 무기 중 하나로 숱한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반만년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지켜준 문화유산입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선조의 얼과 슬기가 깃든 국궁(國弓)의 찬란한 가치를 되새겨보았습니다.



김홍도 ‘활쏘기’(종이 위에 엷은 색, 39.7×26.7cm, 1745~1816년 이후, 보물 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물의 역할과 표정에 따른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다. 활 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장정들과 군관의 얼굴 표정 및 몸놀림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제현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비단, 73.6㎝×109.4㎝, 고려말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말을 탄 호복(胡服) 차림의 다섯 사람이 허리에 활을 차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소재와 묘사법 등에서 원나라의 수렵도 계통의 그림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데 구도와 배치가 무척 세련되었다.



고요함의 동학(動學),
활에 담긴 한민족의 얼


고작 계절 몇 번 바뀐 듯한데, 돌이켜보면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쏜 화살이 얼마나 빠를진대, 무상한 세월을
쏜살같다고 했을까. 언어는 일상이 쌓여 체득되는 법.
우리네 일상 속에 활은 고요하게, 그러나 바람과도 같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활 쏘는 민족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렸다. 해 뜨는 동쪽의 활을 잘 쏘는 종족이란 뜻이다. 오랑캐를 이르는 이(夷)라는 글자의 파자가 ‘큰 대(大)’와 ‘활 궁(弓)’으로 이루어진 걸 보면 뜻풀이가 미루어 짐작된다.


알에서 태어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활을 매우 잘 쏘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름이 ‘주몽(朱蒙)’일까. 주몽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이를 일컫는다. 동명성왕을 잇는 다음 임금 유리명왕도 신궁이었다.

어려서 참새 잡기를 즐겼는데, 아낙네의 물동이에 구멍을 낸 것을 다시 진흙 탄환을 쏘아 구멍을 막아서 물이 새지않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고구려의 정치가에겐 활을 잘 쏘는 것이 카리스마 축적의 지름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정치란 내치의 안정과 더불어 외환을 막는 일이 막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당서>는 고구려가 경당 같은 교육 기관에서 독서와 함께 활쏘기를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당시엔 인재 선발에도 활쏘기가 활용되었다. 고구려는 매년 봄과 가을에 사냥 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엔 귀족의 자제는 물론 일반 백성도 참여할 수 있었다. 평원왕(平原王) 시기에 왕이 직접 참여한 사냥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평강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온달이었다. 온달은 이 대회에서 우승해 장군으로 선발되었다. 활쏘기가 인재 선발의 기준이 된것은, 활쏘기를 잘하려면 올바른 자세, 맑은 정신, 뛰어난 체력,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과 빠른 판단력 등을 고루 갖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만 보아도 우리 선조의 활 솜씨를 짐작할 수 있다. 말 앞을 달리는 호랑이를 향해 활을 쏘기도 하지만, 달리는 말 등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려 목표물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기도 한다. 실로 기백이 당당하다.

백제 아신왕은 도성 내의 백성들을 모아 활쏘기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백성들도 활쏘기에 소홀할 수 없었다. 야생동물이 많아 사냥감도 풍부했고, 전쟁도 잦았기 때문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어릴 때부터 손이 부르트도록 활을 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활솜씨는 고려의 훌륭한 장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덕도 클 것이다. 우리글로 쓴 최초의 활쏘기 책인 <조선의 궁술>이 나열한 이 땅의 역대 선사 명단에는 이성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들어 있다. 대물림된 기술인 셈이다. 덕분에 이성계의 활쏘기 실력은 가히 신화처럼 전해 내려온다.


<태조실록>에는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적장 납합출을 활로 쏘아 죽였다든지, 왜구와 싸울 때 깃을 단 화살로 왜적의 왼쪽 눈만 쏘아 맞혔다든지, 가파른 비탈에서 사슴을 쏘아 잡아 최영 장군과 함께 안주로 먹었다든지, 송도 성문 밖에서 사냥할 때 꿩을 날아가게 한 뒤 나무로 만든 화살인 고두리살을 쏘아 잡았다든지 등 이성계의 일화가 전설처럼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조선의 주력 무기도 활이었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무예에 능한 자를 관리로 선발하는 절차인 무과를 실시했다. 무과에서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과목이 있었고, 5개의 표적을 각각 3보의 거리에 세워두고 말을 달리면서 맞히는 방법으로 실시했다.

조선의 군인들은 활쏘기 성적이 나쁘면 진급이나 포상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활쏘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군인들이 활쏘기만 연습하느라 칼과 창 쓰는 법을 배우지 않은 것이다. 정조 14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 무예 훈련 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는 이런 군 문화를 시정하기 위해 아예 활과 관련된 사항을 누락시켰다. 당시 군인들의 지나치게 뛰어난 활솜씨에 대한 방증이다.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닌 무관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가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난중일기>엔 활쏘기에 대한 기록이 무려 270여 차례나 등장한다. 1592년 사천 해전에서는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고, 여러 가지 총통을 바람이나 천둥같이 어지럽게 쏘아대자 적들이 두려워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왜선 13척을 불태워 없앴다”고 기록함으로써 조선 해군의 활쏘기 실력을 뽐냈고, 1596년엔 “늦게 삼도의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대접하고 겸해 활도 쏘고 풍악도 울리며 모두 취해서 헤어졌다”며 예하 장수들을 통솔하는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다. 아마 놀이를 즐기면서 친목을 다지는 요즘의 골프 모임과 비슷했으리라.


그러나 이렇듯 호쾌한 기질의 충무공도 승패의 갈림길에선 때로 마음의 불안을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진지에서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적을 상대할 작전이 길할지 흉할지 점쳐보았더니, 첫 점에 “활이 살을 얻은 것 같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그의 일기에 쓰여 있다. 그는 꿈에서도 활 생각뿐이었다.

1596년 여름의 일기를 보자.
“새벽 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이것을 점쳐보니, 멀리 활을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갓을 차서 부수는 것은 갓은 머리 위에 있는데 발길에 차였으니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

과연, 활 마니아다운 해몽이다.


이렇듯 유물과 문헌의 지적을 종합할 때, 우리 활의 역사는 5,000년이 넘었음을 알 수 있다. 활 잘 쏘는 민족으로서의 전통은 현대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이 굵직한 세계 대회에서 매번 금메달을 따내는 것은 그 안에 면면히 흐르는 민족의 피 때문이 아닐까.


활로 세상을 말하다


활을 단순히 살상용 무기로만 본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원시 사람들에게야 짐승을 잡는 데 유용한 생존 도구로 쓰였지만, 역사가 기술되기 시작된 때부터 활은 그 존재 가치를 드높여 일상 곳곳을 과녁으로 삼았다. 활과 관련된 일상 용어가 많은 것도 그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쏜살같다’는 물론이거니와 ‘삼매경’도 활과 관련된 용어다. 활을 들어 시위를 당기고 겨냥하는 수초의 시간. 그 찰나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시간의 흐름은 경계 너머로 사라진다. 모든 시름,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이 사라진 ‘삼매경(三昧境)’의 순간이다.


‘백발백중’이란 말도 활과 관련되어 있다.

춘추 전국 시대, 진(晉)나라 여공이 군사를 동원해 정(鄭)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 공왕(共王)이 정나라를 도왔다. 두 나라의 군대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진나라 장수 위기의 화살이 초나라 공왕의 눈을 명중시켰다. 이에 원한을 품은 왕은, 명사수로 알려진 신하 양유기에게 화살 두 대를 주며 자신의 보복을 부탁했다. 왕의 화살을 받아든 양유기는 즉시 나아가 화살 한 대로는 위기의 말을 쏘아 죽이고, 나머지 한 대는 다시 초왕에게 돌려주었다. 단 한 대의 화살로 왕의 복수를 행한 이 일로 양유기의 명성이 매우 커졌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때, 반당(潘黨)이라는 또 다른 명수가 있었다.

한 하늘 아래 태양이 두개 있을 수는 없는 법. 둘은 기상천외한 시합으로 솜씨를 겨루는데, 과녁은 백 걸음 떨어진 버드나무 잎이다. 반당은 버드나무 잎 세 개에 번호를 표시해 두고 차례로 맞혀볼 것을 제안한다.

양유기의 활시위를 떠나는 세 대의 화살!
모두 번호 순으로, 그것도 잎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간다. 백발백중(百發百中)이다.


양유기의 고사에서 한발 더 나아가 활솜씨가 빼어난 신궁과 좋은 시인의 경지가 같음도 알 수 있다. 문(文)과 무(武)가 어찌 비교되느냐는 질문은 섣부른 우문이다. 신궁이라 함은 양유기처럼 아무리 멀리 떨어진 작은 표적이라도 정확하게 맞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좋은 시인이라 함은 세상에 아무리 많은 말이 있어도 꼭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한마디뿐인 말을 찾아내어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사람이다.

전자는 과녁의 정곡을 찌르고, 후자는 마음의 정곡을 찌른다. 활쏘기에서 나온 말 ‘정곡(正鵠)’이 문학에도 유효하게 쓰이는 데서 문무의 이치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화살통’(금속, 24.8cm,가야(5~6세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살을 담는 통으로, 경북 고령군 지산동 39호 무덤에서 발굴됐다. 가죽 등 유기물로 이루어진 화살집을 보강함과 동시에 외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구름무늬나 용무늬를 새긴 금동판을 덧대어 못으로 고정했다. 이와 같은 화살집은 안악3호분과 같은 고구려 벽화 고분의 무사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화살집’(나무, 길이 96.7cm, 지름 8.6cm,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인뿐 아니라 문인도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정신을 집중하고 덕과 도량을 기르기 위해 활쏘기를 즐겼다. 화살집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재료와 치장이 다양했다. 이 화살집은 나무로 된 팔각 통에 옻칠을 하고 몸체에 매화 무늬를 사실적으로 조각해 붙여 끈을 달 수 있도록 했다. 몸체에는 거북 모양의 자물쇠가 달렸고, 뚜껑의 둥근 끝부분에는 풀잎 무늬를 여러 개 겹쳐놓듯 양각해서 붙였다.


활, 놀이가 되다


활은 본디 사냥이나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17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의 모든 활은 빠르고 광범위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화포가 전쟁의 탁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지상전에서 활은 조총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름부터가 ‘나는 새도 맞혀 떨어 뜨린다’는 조총(鳥銃)이었으니 거의 백전백패였다. 조총은 수목 사이로 몸을 은폐한 채 발사할 수 있었지만, 활은 전신을 노출해야만 쏠 수 있는 무기였다. 목표물 조준에서도 조총은 간단한 훈련만으로 습득되지만, 활은 오랜 훈련을 통해 몸이 감각적으로 익혀야만 명중이 가능했다. 전쟁에선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쓸모없어진 활이었으나, ‘상무(尙武)’ 정신을 귀하게 여긴 선조 대왕은 백성에게 호국 무예로 활쏘기를 권장했다. 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 건춘문 안에 활터 오운정(五雲亭)을 세우고 민간에 개방한 것도 선조 대왕 때다. 오운정을 열었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활쏘기를 즐길 수 있음을 말해주는 공식적이자 공개적인 선언이었다. 이를 계기로 민간의 활쏘기는 점차 활발해졌고, 19세기 중반에는 서울 도성 안팎에 무려 48곳이나 될 정도로 민간 사정이 즐비했다. 당연히 활터 사이에 기량을 겨루고 친목을 다지는 편사가 성행했을 터. 사정끼리는 터편사 또는 정편사, 향교끼리는 향편사, 마을끼리는 골편사가 열리곤 했다.

골편사와 터편사는 그야말로 마을 축제였다. 편사가 열리면 출전 궁사와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해서 가져갔다. 놀이였지만 승부를 가리는 것이었기에 나름의 징크스도 있었다. 음식을 가져갈 때 남자들이 지게로 ‘지고’ 가면 편사에서 지고, 여자들이 머리에 ‘이고’ 가면 이긴다는 속설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편사 음식, 이고 간다”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당시의 들뜬 열기가 느껴지는 속담이다. 그리고 이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마침내 도성 안팎 장안의 모든 활터가 겨루는 ‘장안 편사’까지 등장한다. 장안 편사는 17~19세기에 서울 장안에서 가장 볼만한 이벤트였다. 이후 ‘장안 편사 놀이’는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활쏘기의 유행은 도성을 벗어나 농촌까지 퍼져 나갔다. 지방의 유명한 활 대회로 전주의 대사습이 있었다. 숙종 때부터 열리기 시작한, 달리는 말에서 활을 쏘는 대회였다.


철종 때엔 여기에 판소리 경연까지 곁들였다.
놀이로서의 활쏘기는 이렇듯 집단화가 특징이었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활을 쏘며 노는 풍속이 생긴 것인데, 민초들의 놀이 문화로는 활 백일장이 대표적이었다. 활 백일장은 단옷날이나 한가위 때 행하던 널뛰기, 윷놀이, 씨름과 그 궤를 같이한다. 온 백성이 즐긴 대중적 운동이요, 놀이였던 것이다. 해방 전의 신문 자료만 보아도 단옷날 때 행하는 놀이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활 백일장은 보통 3~4일이 걸렸다. 백일장이 열리는 동안 주변은 시골 5일장처럼 난전이 벌어지고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농한기에 마땅한 놀거리, 볼거리가 없던 때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2~3일간 예선을 치르고 마지막 하루는 1등부터 5등까지 입상자를 결정했다.


민초들이 활 백일장을 즐기는 동안 선비들도 활터로 나섰다. 그들의 활 문화에는 기품있고 고아한 흥취가 배어 있다. 활터에는 늘 한아름이나 되는 한지가 마련되어 있어 사군자를 치고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1960년대까지도 진주 남강에서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들이 모여 활을 쏘고, 벼루 가득 먹물을 갈아놓고 즉흥시를 썼다. 그냥 벼루가 아닌 바윗덩이에 홈을 파서 만든 커다란 벼루였다. 활을 같이 쏘던 기생들은 장구와 가야금을 끌어당겨 그 시에 곡을 붙이고 창을 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름다운 활 풍경은 또 있다. 남녀 궁사들이 달 밝은 밤에 즐기던 야사(夜射)다. 즐거이 활쏘기 기량을 연마했을 그들은 어쩌면 신화에 나오는 큐피드의 화살을 서로에게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성들이 활을 쏘며 노는 것을 얼마나 즐겼는지, 한반도 곳곳을 여행한 러시아 장교들이 “조선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활을 잘 쏘았다”고 여행기에 적었다.

활쏘기가 스포츠나 놀이가 된 후로 나라엔 명궁이 넘쳐났다. 조선 시대 중기를 무대로 1930년 전후에 집필된 대하 역사 소설 <임꺽정>에는 당시 이런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나온다.

소설 속 인물 이봉학의 본업은 명사수인데, 전주부윤이 뒤를 봐줘서 전주공방 비장이 된 사람이다. 과연 누가 뒤를 봐줄 만큼 활솜씨가 뛰어난지 관아의 뜨거운 관심거리가 된다.


“네가 참새 눈을 쏘았다니 저기 느티나무에 앉은 까치의 왼쪽 눈을 쏘아보거라.”
“왼쪽 눈만 맞히기는 어렵소이다.”
“참새 눈을 쏘는 놈이 까치 눈을 못 쏜단 말이냐?”
마침내 부윤이 참견한다.
“왼쪽 눈 할 것 없이 그대로 까치를 쏘아라. 까치만 쏘아 맞혀도 잘 쏘는 활이다.”
“왼 눈 하나만 쏘아 맞히려면 까치가 죽지 않고 날아갈 듯해 쏘기가 어렵다고 말씀을 아뢰었습니다. (…)

만일 왼 눈에서 오른 눈까지 꿰어 뚫어도 좋다시면 한 번 쏘아보겠습니다.”


왼쪽 눈에서 오른쪽 눈까지 관통된 까치가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과연 조선 명궁의 무용담이다.


양생(養生)의 활쏘기


활쏘기는 사실 우리만의 전통은 아니다. 윌리엄 텔은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쏘았고, 활 끝에 자유를 담은 로빈 후드도 있다. 그런데 서양의 활 문화와 우리의 활쏘기 문화를 구분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기를 운용해 신체의 기능을 크게 넓히는 ‘양생’이다. 양생이란 여러 가지 수양과 단련을 통해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 즉 신선이나 진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활쏘기를 도 닦기라 하는 말도 이 때문이다.


수렵 도구이자 군사 무기로 쓰이던 시절을 지난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한자리에 서서 두 팔을 움직이는 ‘정중동(靜中動)’의 스포츠가 된 활쏘기. 움직이지 않은 채로 움직이는 것, 즉 활기참과 고요함이 하나인 운동을 하는 것은 개인에겐 훌륭한 수양 방법이다. 끝없는 수양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이뤄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선조의 얼이 느껴진다. 그들은 활시위를 당기며 어떤 우주를 만나고자 했을까.


글 전희영(방송작가)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도서 <활쏘기의 나침반>(정진명 지음, 학민사 펴냄), <활을 쏘다>(김형국 지음, 효형출판 펴냄),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이윤기 지음, 작가정신 펴냄)





큐피드의 화살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멋스럽게 표현할 때 흔히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다’고 말한다.
화살을 쏘는 사랑스러운 꼬마 신의 이름은 ‘에로스’다. 로마 신화에서는 ‘쿠피도(Cupido)’, 영어에서는 로마식을 좇지만 발음은 조금 다르게 ‘큐피드(Cupid)’라고 한다.

큐피드는 조그만 활과 화살을 갖고 다니는데, 어머니인 아름다움과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지시하면 이 화살을 쏜다. 사랑이라곤 눈곱만큼도 모를 것 같은 저승의 신 하데스도 이 화살을 맞고는 최고신 제우스의 딸 페르세포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화살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불길이다.

다 타서 재가 되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다.


그런데 큐피드가 장난꾸러기임을 잊지 말자. 큐피드는 때로, 사랑해선 안 될 사람들을 엮어놓기도 했다.

피해자 중엔 태양신이자 궁술의 신 아폴론도 있었다. 어느 날 큐피드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아폴론. 마침 아폴론은 거대한 구렁이 피톤을 퇴치하고 기고만장해 있던 터였다.

조그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노는 꼬마 신이 고까워 보였으리라. 활같은 무기는 자기 같은 무사에게나 어울리는
거라며 면박을 주는 아폴론에게 뿔이 난큐피드가 당돌하게 말한다.

“당신의 화살이 무엇이든 다 맞힐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화살은 바로 당신을 맞힐 수 있어요.”

이 말은 곧 현실이 된다. 큐피드는 아폴론에게는 사랑에 빠지게 하는 황금 화살을,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이자 아름답기로 유명한 님프인 다프네에게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부와 경멸의 납 화살을 쏜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사랑한다며 쫓아오는 이와 두려워 도망치는 이. 구애를 하며 다가오는 아폴론을 피해 도망치던 다프네는 강의 신인 아버지에게 빈다. 아폴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나무로 변하게 해달라고.

결국 다프네는 월계수나무로 변하고 만다. 활과 화살을 무시한 대가가 참으로 비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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