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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을
굴욕시킨
글,편집: 묵은지
조선은 제14대 임금인 선조 때에 일어난 '임진왜란'부터 제15대 광해군과 제16대 인조에 이르는 약 40여 년을 지나는 사이에 무려 4번이나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변란(임진왜란1592년, 정유재란1597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을 겪었습니다. 어느 전쟁이든 전쟁은 항시 당사국간의 적지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은 다반사이겠지만 그 가운데 병자호란은 어처구니 없게도 청나라가 쳐들어온지 불과 두 달도 않되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백성과 병사들의 목숨을 빼앗기고 조선이 일방적으로 항복한 전란입니다.
이전까지 오랑캐라 얕보며 맞상대 조차 꺼려했던 청나라에게 조선의 임금이 자존심은 저멀리 내던지고 조아려 절을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수십만 명의 부녀자들이 야만인들의 노예로 끌려가는 등 조선땅 전체가 씻을수 없는 능욕과 치욕의 오점으로 얼룩진 대 굴욕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참담한 배경에는 어이없게도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빠진 권신들의 한심한 당파싸움과 그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임금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이 자초한 것이었으니 그 바람에 난리를 당한 백성들은 무슨 죄요 이들이 살아갈 나라 또한 풍비박산이 났으니 이 어찌 묵은지로서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변국 정세로 보아 전쟁이 뻔히 예견되던 나라의 급박한 상황을 뒤로한 채 자기들끼리 니편내편 나누며 당파 싸움만을 일삼았던 권신들의 붕당정치가 오늘의 정치현실에서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또한 이러한 정치풍조가 국가와 국민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그들이 겪은 참담한 전쟁의 상황과 조선의 정치사를 통해 각성하는 의미로 다시 돌아볼까 합니다.
슬하에 후사가 없었던 명종에 의해 후사로 낙점되어 1567년 16세의 나이에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었음에도 왕위에 오른 선조는 어린 나이이기도 하였으나 출신이 미약한 관계로 즉위 후 한동안 인순왕후에 의한 섭정을 받았습니다. 이에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고 이들의 영향력으로 자신의 친정에 도움을 받으려 하였고 이런 선조의 의도와는 달리 이를 빌미삼아 당파간에 주도권을 쥐려는 권신들이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하루가 멀다않고 조정은 권신들끼리 업치락 뒷치락 하는 것이 일이었고 이렇게 계속되는 자중지란은 주변의 외세들이 조선을 바라 보기에 그저 손쉽게 잡아 먹을수 있는 좋은 먹이감으로 보일 뿐이었을 겁니다.
반면에 일본은 이즈음 센고쿠 시대 동안 분열되어 있던 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여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으로의 진출을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숩니다. 항시 조선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리던 히데요시는 드디어 1592년, 서로 아귀다툼에 정신이 팔린 조선의 빈틈을 노려 준비가 잘 갖춰진 20만의 일본 대군으로 전격적인 침략을 감행하였습니다. 당파싸움에 정신팔려 아무런 방비도 세우지 못한 조선은 그야말로 나라안이 쑥대밭이 되었고 선조는 목숨만이라도 건지려는 권신들과 함께 저항의 의지를 포기하고 북쪽 압록강 가까운 평안도 의주까지 냅다 도망을 쳤습니다. 이런 임금과 권신들의 무책임한 행동속에도 다행스럽게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나 이순신, 권율 등의 명장들의 활약과 명나라에서 파병한 지원군의 합세로 저항이 본격화 되었으며 기세가 주춤해진 일본은 1597년 또다시 '정유재란'으로 침략을 재차 시도하였지만 결국 힘에부친 나머지 7년간의 전쟁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당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물러난 광해군 이후에도 극심하여 서인을 몰아낸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으며 이는 또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는 등 후에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을 초래하기까지 그야말로 한치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한심한 붕당정치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물안 개구리 같은 조선의 정치가 니탓내탓으로 뒤죽박죽 섞이고 있을 즈음 주변의 국제정세는 또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전까지의 중원을 지배했던 한족위주의 명나라가 서서히 쇠퇴하고 말갈,여진족의 세력이 중심을 이룬 '누르하치'의 '후금'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어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광해군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나마 적절한 양면 외교의 줄타기로 잘 버티는듯 하였는데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롭게 정권을 잡은 인조와 그의 권신들이 실리를 벗어난 명분론에 치우친 '친명배금'을 표방하는 바람에 후금의 심기를 불쾌하게 자극하였습니다. 조선은 강해지고 있는 후금의 세력을 간파하지 못하고 매번 그들을 오랑캐라 무시하면서 상대조차 안하는 국제정세를 역행하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당파간의 싸움이 극을 달리다 정권을 잡은 인조의 권신들 사이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유로 비롯된 '이괄의 난'이었습니다.
이괄의 난은 겪렬했던 처음과 달리 자기들 끼리의 내분으로 이괄이 살해되고 반란세력의 한사람인 한명련이 전투중에 사망하는 등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그의 아들 '한윤'과 '한택' 등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그들에 의해 조선의 배금정책과 조선군사의 허약한 실상을 '홍타이지'에게 낱낱이 고자질하였습니다. 안그래도 명나라와 일전을 앞두고 대치하는 과정에서 후방에 위치한 조선이 자주 신경 쓰였던 후금은 이들 도망온 조선인을 앞장세워 1627년(인조 5년)에 군사 3만으로 조선 침공을 감행 하였습니다.
이때에도 도망하는데 이골이 나있던 조선의 조정은 강화도로 잽싸게 피난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이러한 권신들과는 다르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정신이 투철한 백성들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여 정봉수, 이립 등 의병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우선적으로 주변정리가 급했던 후금은 형제관계를 제의하였고 이를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인 조선과 그 해에 강화가 성립되면서 정묘호란은 막을 내렸습니다. 전란을 연이어 겪으며 호되게 당한 조선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뒤늦게나마 인조에 의해 국방의 태세와 군비를 정비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갖추는듯 하였으나 이제까지도 정신 못차린 권신들은 파벌과 제몫 챙기는 일에 열올리며 당쟁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노골적으로 조선을 향한 요구사항이 늘어났는데 가뜩이나 오랑캐와 형제국을 맺었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하고 불쾌스러웠던 조선의 입장에선 홍타이지가 황제로 등극하게되니 자연히 조선이 오랑캐의 신하국으로 내려앉게될 것은 뻔한 사실이기에 조선은 사신들마저 청나라 황제 즉위식에 참석하고도 배례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비록 후금에게 전쟁에 지고 화약을 맺기는 했지만 친명정책을 고수해왔으며 조선의 권신들 대부분은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는 것은 말도 않되는 일이라며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척화론'을 주장하였고 청나라와 전쟁을 피하고 화의를 모색하자는 '주화론'의 주장은 들은 척도 않했습니다. 홍타이지 역시 조선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던차에 조선이 아직 친명배금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벌이기 이전에 골치아픈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켜 버르장머리를 고쳐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국제정세는 이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내달리고 있는데 조선은 잇달아 이어진 국내외의 변란으로 지칠대로 지쳐있었으며 계속되는 당쟁으로 이렇다할 제대로된 대비책도 갖추지 못하고 나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전쟁을 막기위한 국방력 정비나 외교적인 노력은 커녕 여전히 케케묵은 친명론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고 당쟁에 치우친 나머지 전쟁에 대한 대비가 턱없이 미흡하여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어림도없는 실정이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정묘호란 직전에 나라안에서 발생한 이괄의 반란은 이를 진압하는데 주력 군사인 상당수의 조선 정예병의 손실을 가져와 가뜩이나 부족한 군사력에 치명타를 입었으며 이후에 일어난 병자호란에서의 무기력한 참패를 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같은 조선의 허점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던 홍타이지는 1636년(병자년) 12월에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이 전쟁이 바로 치욕의 '병자호란'인 것입니다.
조선을 침공한 홍타이지는 과거 정묘호란 당시의 공략으로는 조선의 임금을 잡아 가두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빠른 기동력으로 곧바로 한양을 기습공략 하는 전법을 택했는데 이런 기습적인 침공작전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조선의 군사들은 전혀 방비를 못하였고 순식간에 도성까지 점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홍타이지는 이번에도 인조가 강화도로 대피할 것을 간파하고 미리 강화로 가는 길을 막는 바람에 시간이 없던 인조는 1만 3천의 군사와 함께 비교적 방어하기 나은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도피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외세의 공격시 안전한 피난처로 계획했던 강화도가 무산되는 바람에 다급한 남한산성으로의 피난은 식량이나 군사장비도 미리 갖추지 못한터라 장기적으로 버티기에는 불가능한 요새였습니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와 조선의 군사들은 명나라와 전면전을 앞둔 청군이 되돌아갈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시간을 벌기위해 버티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충분히 비축하지 못한 식량은 이미 바닥나 버리고 허기에 지친 군사들은 청군의 공격보다도 굶주림과 맹추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주력군을 이끌었던 천하의 간신배 김자점은 경기 양평인근에서 머뭇거리며 움직이지도 않는 어이없는 짓을 하고 있었고 남한산성에 집결하기 위해 모여들기로 했던 조선 8도 각 지역에 퍼져있는 근왕군들은 기마로 중무장한 청군 별동대에 연이은 참패로 막혀 인조를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청군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인조와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살짝 당황한 청군은 작전을 바꿔 강화에 피신해 있는 조선의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인질로 삼을 것을 계획하고 강화도를 공략하였습니다. 이때 강화도를 방어해야할 조선 군사 수장인 김경징이 청군이 뜻밖으로 수군을 편성하여 들이 닥치자 놀라 도망가는 바람에 청군은 1637년 1월 22일 손쉽게 강화를 점령해 강화에서 갖은 만행과 학살을 자행하며 조선의 인질들을 남한산성으로 끌고와 인조를 협박하므로써 결국 인조는 모든 것을 채념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하고자 59일만인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으로 예상되는 '삼전도'에서의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어디든지 항복하는 입장에서 행하는 예가 당연히 굴욕적이긴 하지만 이른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라 알려진 이 예는 3번 무릎을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라는 것으로 조선 임금이 오랑캐 수장인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비웃음을 받으며 올리는 굴욕적인 '항복의 예'였습니다.
이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불러왔고 치욕적인 역사의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는데 도성의 파괴는 물론이요 전쟁으로 죽은 백성이 수십만을 헤아리고 청나라로 끌려간 부녀자의 수 역시 무려 3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청나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조선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는데 야만인들에게 능욕을 당한 여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이른바 '환향녀(還鄕女)' → '화냥년'이라 불리며 주변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였으며 겁탈을 당하여 임신을 한 채 돌아온 여인이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를 '호로자식'이라고 부르며 냉대를 하는 등 변란이 끝난 이후에도 이런 상황을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살로 가정의 파탄이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40여 년을 지나면서 외세로부터 무려 4번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병자호란을 당하기까지 인조나 조정 중신들이 권력싸움에 열을 올리느라 사실상 정치적인 무능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전란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도 서로 힘을 합쳐 외적을 물리치기 보다는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여 심지어는 청군이 쳐들어오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도와주기는 커녕 자기들끼리 등 돌리고 못 본 체하는 어이없는 작태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인조는 전란이 예상되는 비상 시기에 결정적으로 군권에 대한 인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지 못해 참패의 화근을 만들었습니다. 북방에서 유일한 정예 군사를 이끌어야 하는 도원수 자리에 병법의 기초도 없는 김자점 같은 무능한 사람을 자신의 측근이라하여 앉혔고 왕실의 피난처인 강화도의 수장 역시 군사를 통솔도 못하는 김경징을 앉히는 등 조선의 주력 군사를 통솔하는 자리에 전쟁에 능한 장수를 기용하기 보다는 권신들 가운데 자신과 가까이 지내는 인물만을 골라 앉히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청군이 쳐들어오자 제대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그저 도망다니느라 허둥대기 바빴으며 이들의 무능한 대처로 숫적으로도 결코 뒤지지않았던 조선군 이었으나 작전 수행 능력이 떨어지는 지휘자는 물론이요 대부분 제대로 훈련도 받지못한 대립군 투성이에다 그나마 지닌 군사력마저 분산되어 청군에 일방적으로 밀려 버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인조가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온 나라안의 부녀자 대부분을 강탈 당하는 나라의 수치를 겪어야 했는데 이때 희생된 백성들과 군사들의 수는 정확한 수치는 어렵겠지만 전쟁중 사망자와 청나라로 끌려간 부녀자들의 수를 합해 대략 50만 명 이상의 수를 헤아렸다니 당시 조선의 총 인구 수가 약 400만 명이 채 않되는 것을 감안하면 그 비례를 생각해봐도 실로 엄청난 인명 피해였습니다. 그나마 청나라는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은 외면한 채 주로 조선의 북부와 중부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 규모가 이정도였으니 묵은지가 생각해봐도 이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 전쟁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묵은지의 입바른 소리이긴 하지만 나라와 백성들의 고난사가 주 내용인 역사는 어느 시대를 들여다 보아도 항상 위정자나 권신들의 정치적 망상과 어리석은 이기심이 그 발단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나라를 위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사심을 가득 채우는 속이 뻔히 보이는 역겨움을 주는 정치인들, 그들이 존재하는한 병자호란과 같은 역사의 굴욕은 언제든지 다시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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