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명용사위령비(抗日無名勇士慰靈碑)
1945년 8월 15일 새벽의 야음을 틈타 가덕도 일본 해군기지를 탈출한 후 헌병에게 쫓기다 장강을 건너지 못하고 벼랑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 무명용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녹산 향토문화관에서 1995년 건립하였는데 이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방(解放)되던 그날- 우리고장 녹산면에 군인이 절벽에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는 왜놈 헌병에 쫓기던 한 조선청년이었고 피투성이된 시신은 꺼지기 들것에 실려 어디론가 갔다. 2시간 뒤, 그날 정오(正午)에 해방이 되었다. 고향도, 성(姓)도, 이름도 모른다. "큰 키에 좀 마른 얼굴, 누리끼리한 일본수병의 옷을 입었고 어깨에는 옷보자기 같은걸 짊어 졌더라"고 했다. 해방의 감격과 안타까운 이 비운의 죽음은 그날 이후 50년! 지금은 잊혀가는 전설(傳說)로 묻혀있다. 『당시 가덕도 외양포에는 일본육군 포대가 있었고 천성과 등대쪽에는 일본해군이 주둔하고 있어 아마 이 병영을 밤중에 탈주해 10리 바다를 헤엄쳐 건너, 새벽녘에 송정 바닷가 석축(염전뚝)에 닿고, 송정→방근→화전마을 바닷가를 따라 녹산→성산에서 한집에 들러 아침요기로 허기는 면했건만 이미 왜놈 헌병은 뒤를 추격해 오고 있었고 그는 다급히 강변(西낙동강)길을 따라 날아나다 힘은 부치고 총성은 절박하다, 하는 수 없이 장락포 모랭이(처녀골 입구)에서 산으로 기어올라 절벽 낭떨어지에서 총을 쏘는 헌병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가 오전 10시경, 진퇴양난이요 절대절명의 기로에서 마침내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부르고 투신, 장렬한 항일(抗日)의 죽음을 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