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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말의 연금술사 Rainer Maria Rilke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하였다.
우울한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중간에 위치한 시인으로
섬세한 감성과 세련된 표현으로 신비주의적 주제를 다루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실존주의 시인으로,
20세기 최고의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섬세하고 세련된 시어와 감수성으로
언어의 거장, 시인 중의 시인으로 불린다.
근대 사회의 모순, 번뇌, 고독, 불안, 죽음, 사랑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토대로
명상적, 신비적 시를 많이 썼다.
또한 유일한 장편소설인 《말테의 수기》는
현대 모더니즘 소설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20세기 세계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875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 제국령이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정식 세례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이다.
아버지 요제프 릴케는
군인 출신의 지방 철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 피아 엔츠-킨젤베르거는
오스트리아 참의회 의원을 지낸 아버지를 둔 프라하의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이었다.
릴케가 태어나기 전해에 태어난 딸이
얼마 못 살고 죽자
피아는 릴케가 여자아이이길 바랐다.
때문에 릴케에게 여자아이의 옷을 입혀 키우다가
일곱 살 때에야 처음으로 남자아이의 옷을 입혔다고 한다.
그녀는 전형적인 귀족 부인으로 허영심이 강했고,
따라서 남편이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생활이 부유하지도 않은 데 불만족스러워했다.
또한 광신적일 정도의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릴케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시간인 한밤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릴케를 '마리아의 아이'로 부를 정도였다.
9세 때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릴케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런 어머니의 태도 때문에 고독하고도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
7세 때 프라하 가톨릭 재단의 피아리스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독일인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11세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장크트푈텐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소년에게
육군학교 생활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느낀 불안감과 좌절, 고통은 이후 릴케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유년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고등실업학교에 진학했으며,
이후 린츠의 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 반 만에 그만두었다.
18세 때
릴케는 법과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사촌누나의 소개로 만난 발레리 폰 다피트-론펠트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졌는데,
릴케가 발레리에게 시와 편지로 사랑 고백을 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발레리의 외삼촌은 체코에 유럽 상징주의를 소개한 신낭만주의 시인 율리우스 제이에르였으며,
발레리 역시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릴케는 여러 문학잡지에 시를 써서 보냈으며,
이듬해에는 발레리의 후원으로 첫 번째 시집 《삶과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20세 때 프라하 대학에 입학해
문학사, 예술사, 철학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뮌헨 대학으로 옮겨 예술사, 미학, 진화론 등을 공부하다가
베를린 대학에 들어가 수학했다.
릴케는 프라하 대학에 입학한 해부터 본격적으로 시 활동을 했으며,
그해 보헤미아의 민간 설화를 모티프로 한 두 번째 시집
《가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펴내고, 정기 간행물 〈치커리-민중에게 바치는 노래〉를
약 1년간 펴냈다.
뮌헨 대학 시절에 릴케는 인생과 작품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여인을 만난다.
14세 연상의 유부녀였던 러시아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이다.
루 살로메는 저명한 에세이스트로, 릴케는 그녀를 알기 전부터
그녀의 에세이에 감명을 받고 익명으로 수 통의 편지를 쓴 바 있었다.
그녀와 젊은 시인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며,
점차 루는 릴케에게 연인이자 어머니이며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평생 소울 메이트의 관계를 유지했다.
릴케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 '라이너'라는 독일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우아하고 유려한 루의 필체를 따라 그때까지 흘려 쓰던 필체를 고쳤다.
그녀와의 관계 덕분에 릴케의 시 세계는 더욱 완숙해졌다.
1898년에는 베를린, 이탈리아, 피렌체 등지를 여행하면서
예술 일반론 격인 《피렌체 일기》와 많은 시를 썼다.
이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한 시도였다.
또한 1899년과 1900년 두 차례 루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다녀오면서
러시아의 예술과 역사, 언어를 공부하고 러시아를 영혼의 고향으로 삼게 된다.
이때 톨스토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루와의 만남과 여행에서 얻은 영감으로
초기 대표작 《기도 시집》, 《형상 시집》 등이 탄생했고,
릴케 문학의 본격적인 궤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후 릴케는
친구 하인리히 포겔러를 찾아 독일 북부의 화가촌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를 알게 된다.
이듬해 릴케는 클라라와 결혼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외동딸 루트 릴케가 태어났다.
릴케는 클라라와의 결혼으로
그때까지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던 듯하다.
그러나 릴케의 노력은 얼마 가지 않았다.
1902년,
릴케는 로댕의 전기 《로댕론》을 쓰고자 파리로 갔고,
이후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다가 이따금씩 함께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한다.
릴케는 약 4년간 로댕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의 비서를 했는데,
이때 로댕, 세잔 등의 조형미술 작품의 영향을 받아
그때까지의 명상적이고 낭만적이던 시 쓰기에서 탈피해
'사물시'라는 새로운 창작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물시란
주관적인 감정을 읊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해석하여 언어를 통해 조형화하는 창작 기법인데,
이를 통해 존재하는 대상에 내재된 궁극적인 형태를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기법으로 쓰인 시들은 후일 《신시집》으로 출간된다.
또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도 이 시기에 구상하였다.
탐미주의적 성향을 지닌 덴마크의 젊은 귀족 시인 말테가 파리의 고독한 생활을 쓴
수기 형식의 소설로,
몽타주 기법, 수기, 소설 기법 등 다양한 산문 기법이 혼합되어 있다.
단선적 줄거리에 기반을 둔 리얼리즘 소설에서 탈피해
다수의 주제를 평행적으로 진행시키고 있어 줄거리와 주제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이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형태를 띤다고 할 수 있다.
1906년, 릴케는 로댕과 갈등을 겪고 로댕의 집에서 나왔다.
그는 주로 파리에 체류하면서 독일,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하고 글을 썼다.
로마 체류 중에는 요절한 시인 볼프 그라프 폰 칼크로이트를 위한 〈진혼곡〉과
여류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를 위한 〈진혼곡〉을 썼으며,
1912년에는 두이노에 머물면서 《두이노의 비가》를 썼다.
1913년에는 루와 함께 뮌헨에서 프로이트를 만나고,
정신분석학회에 참여했다(루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실험 사진에 등장하기도 한다).
1921년, 베르너 라인하르트가 스위스 론 계곡의 뮈조트 성을 제공하여
그곳에 정착하고 작업실을 꾸며 여생을 보냈다.
이 무렵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1923년경부터는 백혈병 증세가 나타나 요양소와 뮈조트 성을 오가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시 쓰기를 계속하여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 《과수원》 등을 썼는데,
특히 《과수원》은 프랑스어로 쓴 시라는 데서 새로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발레리의 시와 산문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1926년 12월 29일,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으며,
유언에 따라 라롱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정원에서 장미를 꺾다가
장미 가시에 찔리는 바람에 패혈증에 걸려 죽었다는 시적인 일화가 있으나
이것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묘비에는 그가 직접 쓴 시가 새겨졌다.
1921년,
베르너 라인하르트가 스위스 론 계곡의 뮈조트 성을 제공하여
그곳에 정착하고 작업실을 꾸며 여생을 보냈다.
이 무렵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1923년경부터는 백혈병 증세가 나타나 요양소와 뮈조트 성을 오가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시 쓰기를 계속하여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 〈과수원〉 등을 썼는데,
특히 〈과수원〉은
프랑스어로 쓴 시라는 데서 새로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발레리의 시와 산문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1926년 12월 29일,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으며,
유언에 따라 라롱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원에서 장미를 꺾다가 장미 가시에 찔리는 바람에 패혈증에 걸려 죽었다는
시적인 일화가 있으나 이것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묘비에는 그가 직접 쓴 시가 새겨졌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14. 불안과 소외를 독창적으로 조명한 Franz Kafka ( 프란츠 카프카)
1883-1924년
인간 존재의 불안과 위기를 특유의 정서로 표현한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다."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다룬 대표적 소설로,
기이하고 혼란스러우며 환상성으로 가득 찬 〈변신〉의 첫 문장이다.
이 작품의 저자 프란츠 카프카는
20세기의 실존적 위기와 존재의 불안을 표현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그를 일컬어
'20세기를 가장 순수하게 표현한 작가'라고 칭송했으며,
릴케는
"카프카의 작품 가운데 나와 관계가 없거나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 구절은 없다."라고 표현했다.
카프카는
41세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많은 작품을 쓰지는 않았지만,
불안과 절망에 빠진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을 묘사하는 데 있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 낸 작가였다.
그의 이름에 빗댄 '카프카스럽다(kafkaesk)'라는 단어는 '기이하고 부조리하며
위협적인' 감정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에 있는 게토 지역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와
어머니 율리 뢰비는 상업에 종사했다.
프란츠는 6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남동생 둘은 영아기에 사망하고,
여동생 세 명과는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들은 후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한다.
유년 시절에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유모나 가정부가 그를 돌보았으며,
그는 아버지를 명령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어려워하고 그 앞에서 늘 주눅 들어 있었다고 한다.
6세 때 신분 상승을 추구하던 아버지 때문에
당시 프라하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던 독일계 소년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역으로,
이곳에서 상류층이란
보헤미아 출신 독일인들이었고,
이 학교 출신 다수가 헝가리 제국에서 공직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카프카는 독
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으로 자랐고,
독일 사회에도, 유대계 사회에도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후일 회상했다.
4년 후 소
년학교를 졸업하고 독일계 인문학교인 김나지움에 진학했는데,
이곳에서 루돌프 일로비, 후고 베르크만,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등의 친구들을 만난다.
8년 동안 김나지움에서 생활하면서
카프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고전 철학과 문학을 배웠으며,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 시오니즘, 니체 등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다.
또한 이 시기부터 문학 습작을 시작했다.
학창 시절
카프카는 훌쩍 큰 키, 가냘픈 체구의 소년으로,
단정하고 수수하며 현실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는 인상의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으며,
학업 성적도 특출 나지는 않았지만 늘 중상위권을 유지했고,
출석은 의무감을 가지고 꼬박꼬박 했다.
부모님에게 순종적이었던 카프카는
대학 진학 시기가 오자 독문학을 전공하고 싶어 했으나,
부모님에 대한 의무와 아버지에 대한 공포 때문에 프라하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못한 그는
대학 시절 문학 강연회나 낭독회에 자주 참가하고,
많은 문학 작품을 읽으며 습작을 해 나갔다.
막스 브로트, 오스카 바움, 펠릭스 벨치와 교류하고,
프라하의 유대계 문인 그룹인 '프라하 서클'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한다.
특히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가장 친한 친구로,
카프카 사후 그의 유언 집행자로 지명되었고,
오늘날 카프카의 작품들이 세상에 빛을 보게 한 인물이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된 것이 드물며,
심지어 자신이 죽은 후
모든 작품을 폐기하라고 유언했으나
막스 브로트는 이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또한 카프카는
자신이 살던 프라하 지역을 거의 떠나지 않았는데,
고교 때부터 대학 시절 동안
중부 모라비아 지방의 시골 마을에 몇 차례 여행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이때의 경험들은 〈시골 의사〉 같은 작품들에 반영된다.
23세 때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부터 1년간 프라하 법원에서 법률 시보로 일했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계 보험회사인 아시쿠라치오니 제네랄리에 취직했는데,
직장 생활이 너무 고되어 글을 쓸 시간도 없었고,
스스로 일에서 아무 보람을 찾지 못해 이 일을 '밥벌이 수단'이라 지칭할 정도였다.
그는 다른 직업을 계속 알아보았고,
9개월 만에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프라하에 있는 노동자 재해 보험공사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그는 상사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은 유능한 직원이었으며,
유머 감각 있고 지적인 좋은 청년이라는 평을 받으며,
1922년 건강을 이유로 퇴직할 때까지 근무했다.
카프카는 보험공사에 근무하면서
부당한 고용주들의 행위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고
현실 세계를 재인식하고, 관료주의에 부정적인 견해를 띠게 된다.
또한 사회주의 대중 집회에 이따금 참석하기도 했으며,
유대교 전통과 소수민족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10년에는 법률 고문으로 승진하는 등 직장 생활은 평탄했으나,
'이 기구는 음침한 관료들의 소굴이다'라며 관료 세계에 회의를 품었고,
문학을 유일한 탈출구로 여겼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우울증과 절망감에 빠져 지냈으며, 글쓰기만을 유일한 욕구이자 기쁨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 무렵부터 잡지 〈히페리온〉에 단편소설들을 발표했으며,
꾸준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12년에는 연재했던 단편소설들을 《관찰》이라는 소설집으로 출간했고,
단편소설 〈선고〉를 통해 작가로서의 재능을 어느 정도 알리게 되었다.
또한 이해에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의 소개로 펠리체 바우어란 여성을 만났다.
그녀와는 약 5년간 관계를 지속하면서,
두 차례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다 결국 파경을 맞는다.
펠리체는 녹음기 회사의 속기사로,
명랑하고 현실적인 성격으로 직장에서 성공을 거둔 여성이었다.
때문에 카프카는 펠리체와 가정을 꾸린다면
혼자만의 시간을 잃을 것은 물론, 세속적인 생활에 물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문학 생활에 위협이 되리라 우려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내 내면적 삶을 서술하는 것의 의미는 다른 모든 것들의 의미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라고 일기에 썼을 정도로, 문학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는 글쓰기를
'끄적거리는 짓'이라고 부를 만큼
자신의 삶에서 별 것 아닌 위치에 있다는 식의 표현도 종종 했다.
생전에 출간된 작품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이중적인 태도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펠리체와의 파혼에는
1917년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 선고를 받은 것도 큰 원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몇 달씩 요양을 반복했으며,
요양 생활 중에는 계속 글을 썼다.
신경쇠약 증세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1922년 7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연금으로 요양 생활을 계속 했다.
1923년에도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는데,
요양차 떠난 여행지에서 유대계 폴란드인 도라 디아만트를 만나고,
그녀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았다.
죽기 몇 달 전에는
도라와 함께 베를린에 집을 얻어 동거했으며,
폐결핵이 후두까지 전이되어 1924년 4월에 요양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6월 3일 호프만 요양소에서 4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카프카의 작품은 많지 않다.
생전에 발표된 작품은
〈시골의사〉, 〈변신〉, 〈관찰〉과 같은 단편소설 몇 편뿐이고,
장편소설 《성》, 《실종자》(1927년에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미완의 유고인 《심판》은
사후 브로트에 의해 출간되었다.
그 밖에 일기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정도가
카프카가 쓴 작품의 전부이다.
하지만 그의 문체와 작품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는
현대 문학의 한 가지 모습으로 자리 잡았고,
그의 기묘한 악몽은 오늘날까지 독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