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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창6:1-8절) 홍수 이전의 상황
날로 심각해져 가는 강과 바다의 오염을 보면서, 또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불어난 쓰레기나. 처치할 장소가 없는 핵페기물 문제 등을 보면서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이러한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인류에게 남아있는 문제는 내가 밥을 먹느냐 못 먹느냐 더 좋은 집(아파트)에서 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상황이 이런 식으로 계속 악화된다면, 인류 전체가 함께 파멸하고 말리라는 우려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강이나 바다가 이런 식으로 계속 오염되고 공기가 이런 식으로 계속 혼탁해진다면, 사람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이제 남은 것은 언젠가는 *인류 전체가 오염된 쓰레기더미 지구 위에서 함께 망하고 말리라는 예상입니다.
사실 인류는 함께 멸망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하나의 재앙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인류가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망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인류는 곧 그 무서운 재앙에서 살아남은 몇몇 사람의 후손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이 무서운 인류 멸망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어느 때, 인류가 모두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수천 년 전에 인류가 함께 멸망했던 그 역사를 다시 들추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인류가 처해 있는 상황이 곧 그때의 상황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한 개인이 더 잘 사느냐 못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앞으로 공멸(共滅)하느냐 공생(共生)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있었던 한 무서운 홍수 재앙의 원인이 단순한 지구환경의 이상변동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연재해가 아니었습니다. *이 재앙의 원인은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교만과 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홍수는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전 지구적이고 전 세계적인 심판이었습니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오늘 본문부터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가 다룬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죄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껏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긍휼을 베푸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시면서도 장래의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그 구원의 증표로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들을 쫓아내셨지만. 완전히 알몸으로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가인에게도 표를 주셔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해서 참지 않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인간 전체를 심판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죄에 대한 아주 격렬한 감정이 여기에서부터 표현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의 성경적인 의미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노아 홍수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심판*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과 공중의 새까지 심판하는 보편적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특히 이 심판은 평소에 내리던 비가 좀 더 내려서 강물에 많은 사람들이 떠내려가 죽은 그런 사고가 아닙니다.
하늘의 문이 열려서 하늘에 있는 물이 모두 다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땅도 창을 열어서 땅 밑에 있는 지하수가 모두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늘에 있는 물이 쏟아지고, 땅 속에 있는 물이 치솟아 올랐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원래 땅은 물 위에 세워졌습니다. 물이 땅보다 더 많습니다. 산이 솟지 않고. 그냥 평지가 되면, 물이 전 지구를 덮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물을 마치 병 속에 가두어 놓듯이 바다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물이 땅위에 범람하지 못하도록 자연법칙을 세우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절대 땅으로 올라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창조질서를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덮고 있는 물이 다 쏟아졌고, 바다가 땅 위로 올라와서 완전히 땅 전체가 물에 잠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완전히 파괴되는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교만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노아 홍수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무서운 진노의 심판 중에서 한 가정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다 멸망해 버리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누가 깨닫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 와중에서도 한 가정(씨 종자)을 구원하셔서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며, 온전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한 가정을 구원하심으로 구원의 기본적인 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가정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서 불러내실 때에는 개인적으로 불러내십니다. 그러나 구원의 단위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로 구원을 이루십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건이고, 반드시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 노아 홍수를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되. 인간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공중의 새와 땅의 가축과 짐승들을 함께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단순한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자연이 함께 하는 우주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인간을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공중에 있는 무지개에 두심으로써 이 구원은 하늘과 땅이 함께 동참하는 우주적인 구원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노아 홍수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마지막 심판의 모형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류의 마지막 심판이 곧 이 노아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37-39절). 우리는 이 노아 홍수 사건을 통하여 마지막 심판이 임할 때, 개인의 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쓸어버릴 그때, 지구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자연법칙이 완전히 파괴될 그때, 땅속에 있는 불이 올라와서 온 인류를 불로 태울 그때의 상황이 어떠할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황을 다음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Ⅰ.택한 백성들의 타락.
노아 홍수가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타락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공동체)의 부패가 곧 보편적인 심판을 불러온 것입니다.
6:1-2절)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했습니다.
천사들이 인간의 딸들과 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견해는 성경 전체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입니다.
신(神)이나 신(神)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과 결혼한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神)들은 인간과 똑같습니다. 즉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며, 남의 아내를 납치하기도 하는 아주 못된 신(神)들이 올림푸스 산에 다 몰려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해석입니다. 지금까지 모세가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모든 인류가 그의 죄 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태어나는 자는 모두 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죄 된 본성을 눌러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는 뱀의 후손이요, 다른 하나는 여인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영원히 원수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뱀의 후손은 살모사나 방울뱀이나 구령이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뱀의 후손은 인간은 인간인데, 사탄의 기질을 가지고 그 기질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반면에 *여인의 후손은 같은 죄 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자기의 죄 된 본성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타락했어도 그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주 적은 수라도 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소망이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경건한 후손들이 그만 *가인의 후손들이 누리고 있는 아름다운 삶을 본 것입니다. 즉 *가인의 후손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악기를 개발해서 노래를 했고. 철이나 동으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또 *여자들은 마음껏 멋을 부렸습니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건강한 여성입니다. 그러니까 힘든 일을 해도 지치지 않는 여성이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에게 아름답다는 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라, 관능적인 것입니다. 즉 *살을 빼고, 좀 비치는 옷을 입으면 얼마든지 미인으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경건한 후손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인의 후손들이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재미있게 산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없이 사는데도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들은 전부 악기를 만들어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들어서 누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을 보니까 왜 그리 날씬한지 모릅니다. 또 옷은 왜 그리 얇은 옷을 입고 다닙니까? 완전히 혼이 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네 여자들은 *기도만 하고. 애만 낳는 겁니다. 그것도 열 명, 스무 명씩 낳으니까 배는 쭈글쭈글하고. 살이 쩌서 몸매가 엉망입니다.
그런 여자들만 보다가 *애도 낳지 않고, 맨날 몸에 우유 바르고, 향수 발라서 피부가 매끈매끈한 여자들을 보니까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경건한 후손들이 매일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허구한 날 아벨의 피 제사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보니까 *세상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는 거예요. 배울 것도 많고, 할 일도 많고, 개척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너무 할 일이 많아서 죽기도 아깝고, 잠자기도 아까울 정도예요.
그런데 자기네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재미를 다 외면하고. 오로지 하나님께 피 제사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짐승을 잡고. 피 흘려서 회개하고. 죄 짓고 또 회개하고. 죄 짓고 또 회개하고.....*그저 매일 하는 것이 죄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을 가진 사람이 죄를 안 지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또 회개해야지요. 도대체 죄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도 죄고, 저렇게 해도 죄고, 숨 쉬는 것도 죄고, 생각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다가 가인의 여자들이 지닌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본 것입니다. *우와! 여자가 우 째 저럴 수가 있을꼬? 천사인갑네! 우리 여자들 하고는 종류가 다르네. 키도 크고. 날씬하고 옷도 얇고......*
그들은 가인의 여자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보고서는 경건한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아름다움을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충격을 받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이 경건한 후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천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죄 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가지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이나 지위를 물려받는 것입니다. 즉 고아원에 있던 사람이 귀족의 양자로 입양되면, 그 귀족의 모든 지위와 재산을 물려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특권과 능력과 신성과 영광을 우리에게 물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아이들이 집 뜰에서 노는 것을 보면,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집 안에 들어가는 아이는 오직 그 집 애 뿐입니다. 옆집 애가 따라 들어오면 *너는 왜 들어오니? 너희 집에 가야지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내는 것은 이렇게 서로 섞여서 뜰에서 노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이 집 애고. 누가 옆집 앤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아버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들로 택함 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연결되고 있는 성경의 사상(思想)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경건한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딸들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나님의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모든 부귀와 영화와 존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의 이 약속이 현실적인 재미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특권을 누리는 것이 세상의 아름다운 여자들과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재미있게 사는 것보다 못하다는 거예요. 그럼 경건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말씀에 따라 자제(自制)해야 합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을 지키는 것이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생명을 지키면서 다닐 수 있는 직장을 주시면, 직장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직장에 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할 수 있는 짝을 주시면, 결혼합니다. 그러나 결혼 때문에 신앙의 길에서 돌아서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공부할 수 있게 하시면 공부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버리고 공부를 붙잡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문이 얼마나 좁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자기 생각대로 맘껏 일을 골라서 밤낮 그것만 쫓아다녀도 될까 말까 한데, 그저 *주시면 받는 거고. 안 주시면 안 받는다*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자니. 성에 차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상으로 행복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에서처럼 하나님의 장자의 특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에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장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방랑하는 기질이 있었습니다.
방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질을 하나님의 축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아 당시에 살던 경건한 후손들은 아름다운 여인들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미없는 피 제사를 매일 드리는 것보다. 이 세상에 뛰어들어서 같이 음악을 연주해가며. 재미있게 어울려 사는 것이 훨씬 더 복되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딸들과 결혼했고, 결혼한 이후로는 더 이상 아벨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피의 제사를 포기하자.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양심에 남아 있었던 마지막 죄의식을 스스로 버렸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앙양심입니다. 신앙양심을 가지고는 장사해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장사해서 성공하려면, 제일먼저 신양양심을 떼버려야 해요. 피도 눈물도 없이 돈을 벌어야 돈이 모이지, 신앙양심을 지키면서 장사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들이 마지막 죄의식을 포기하자 너무너무 자유로웠습니다. 겁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여태껏 드리고 있었던 아벨의 피 제사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방에 있는 군인들이 그리워하는 게 뮙니까? 다방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배 피우면서 여학생들과 이야기하고. 마음대로 영화 보는 겁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결정을 했다고 합시다. *야, 이제부터 나라 지키지 말자. 우리도 압구정동에 가서 마시고 놀자* 그러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누군가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죄에 대해 눈을 감으시고.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피의 호소가 가인을 살린 것처럼.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임할 무서운 재앙이 중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입니다. 홍수나 전쟁보다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진노의 심판을 막는 아벨의 피 제사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피 제사를 드리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 여자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세상이 너무너무 재미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 예배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왜 이 세상에 무서운 홍수 심판이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 있는 진정한 예배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들이 세속적인 여인들과 결혼한 이후.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자.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이 무서운 심판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나 자신을 살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살리는 최후의 보루(堡壘)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세상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멈추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코로나 재앙의 시대 이후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배를 점점 더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느니. 다른 것을 더 배우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친구도 만나야겠고, 멋진 아가씨와 데이트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곧 노아 시대에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예배는 남들에게 드리라고 하고. 나는 돈 벌러가고 좀 더 즐기러가자하는 바로 그 태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노를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더 이상 죄에 대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왜 우리는 늘 소극적으로 죄만 말할까? 좀 적극적이고 현실적이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않을까? 왜 우리는 죄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가?하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때 인류의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기 자신의 죄와 가족들의 죄와 이웃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에는 세속주의가 보편화 되어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느니. 텔레비전 보고 비디오 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이 세상의 아들이 되고자 했을 때, 한 두 사람만 망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몽땅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이 세상의 심판을 막는 보루(堡壘)였는데, 그것을 지키기 싫어하고, 희생하기 싫어하며, 죄 문제에 대해 정직해지기 싫어했을 때, 모든 인류가 망해버렸습니다.
Ⅱ.철저한 무정부 사회
이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사상(思想)은 영웅주의였습니다. 영웅만이 인정을 받았고, 영웅만이 추앙받았습니다.
6:4절)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
여기에 나오는 *네피림*은 *거인*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 단어가 거인을 뜻하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칼뱅에 따르면 *네피림*은 *나팔*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서 원래는 *넘어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거인들이 *넘어지다*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 칼뱅은 세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들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들을 볼 때 *안색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안색이 죽었다*는 말은 *넘어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사람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쓰러졌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해석은 이들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렸기 때문에 네피림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서 *사람을 쳐 죽이는 자*, *쓰러뜨리는 자*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있지요? *사람의 씨를 몽땅 말린다.*는 뜻에서 터미네이터라고 부른 것인데, 네피림이 곧 이 터미네이터와 같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모조리 쓰러뜨리고 죽여 버리는 사람들이 네피림이고. 영웅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피림이라는 명칭을 얻으려면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어떻게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적어도 노아 홍수전까지는 국가가 생긴 흔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 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 아닐 것입니다.
미국 개척시대에 총잡이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영웅이 된 것처럼 이때에는 힘센 사람들이 경기를 벌여서 사람들을 쳐 죽이고. 네피림이 되거나, 사람을 많이 죽이기로 소문난 사람을 찾아가 겨루어 이겨서 영웅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살인은 전부 사적인 살인이었습니다.
술집에서 누군가 째려보는 사람이 있으면, 결투해서 때려죽이고. 별 하나 달고 *더 강한 자가 있다더라*하면, 도시락 싸 가지고 찾아가서 *한판 붙어 쳐 죽이고. 별 하나 달고.....* 이런 것이 네피림의 생애였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술집에서 위스키 한 잔 척 마시고, 째려보고 있다가 얼른 돌아서서 총 뽑는 것 생각만 해도 멋있지요. 네피림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일에 하나님의 아들들도 가세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나 드리고 기도나 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터미네이터가 되자*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딸들 사이에서 나온 자식들 중에서도 네피림이 있었고, 이들은 고대(古代)에 아주 유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용사가 아니라, 유명한 살인광이고. 깡패두목이었습니다. 모세는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얼마나 이 땅이 피로 물들여 졌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사소한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별을 달았는지. 또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만연해 있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을 마음껏 남용해서 완전히 무정부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법이나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총을 빨리 뽑는 자만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주먹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철저한 무정부사회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이러한 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경건한 자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도 전부 총잡이와 칼잡이로 나서서 똑같이 폭력을 쓰며 살았고, 세상보다 더 악하게 복수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노아 홍수 이전의 사회가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버리고. 성적으로 타락하기만 한 사회가 아니라, 엄청난 살인과 폭력이 만연되어 었던 사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회 안에서는 진리(眞理)가 살아 있는 세력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진리(眞理)를 확실히 붙들고 *이것은 옳지 못하며 정당하지 못하다*라고 명확히 말함으로써 죄를 견제하고, 죄에 반대 의견을 표시하는 진리의 세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Ⅲ.하나님의 한탄
이제 성경에는 이렇게 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이 한탄하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6:3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5-6절)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하나님의 거부감과 분노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죄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감과 분노가 여과 없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침묵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올까 싶어서 살인자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살려 주셨고. 라멕 같은 자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철저하게 악용해서 이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범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인간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비록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육체이며, 생각이나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겉으로 드러내서 말하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어도 실제로 보지 못하면, 그가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곧바로 보십니다. 아무리 은밀한 곳에서 죄를 지어도 다 아십니다. 이 하나님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보셨을 때, 그들의 생각이 너무나 악하며, 은밀히 저지른 죄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아셨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마 구역질이 나서 다시는 서로 쳐다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에잇! 이 더러운 놈아! 다시는 너랑 같이 교회 안 나온다*하고 욕할 겁니다.
겉으로는 천사같이 미소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잡아먹을까*하고 노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면,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습니까? 입으로는 *ㅇㅇ씨, 사랑합니다.*하는데,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여관에 데리고 가서 내 욕심을 채울까*하는 것이 보인다면, 어떻게 구역질이 안 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같이 못 산다*하면서도 같이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전부 읽고 계십니다. 좋은 표정을 짓고. 거룩한 척하며, 교양 있는 척하지만. 컴컴한 곳에서는 못된 짓을 하고, 시치미 떼는 사람과 하나님은 도저히 교제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 썩은 시궁창 물이 올라오듯이 속에서 끊임없이 악한 생각이 올라오는데, 겉으로는 웃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교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6:3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사람이 육체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우선 이것은 *인간은 육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음으로는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몸이 있기 때문에 다짐대로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나는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해. 이제 많이 먹지 말아야지*합니다. 그러나 뷔페식당에 가면, 일단 정신없이 먹고 나서 *너무 많이 먹어버렸네. 할 수 없다. 내일부터 해야지*하는 겁니다.
막상 먹을 때에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결심대로 안 돼요. 또 학생들은 공부할 때, 자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눈을 딱 떠보면, 아침이에요.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는 성적인 욕망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됩니다.
한번 음란한 생각이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안 먹을 수 없고, 안 잘 수 없고, 좋은 옷 입고 싶지 않을 수 없고, 성욕이 안 생길 수 없습니다.
육체의 욕구가 끊임없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억제해서 이 몸을 바르게 사용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신주단지같이 모셔 놓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위하여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돌보아주고 입으로는 찬송하라고 몸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조절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 곧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있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성령의 뚯에 복종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타락한 본성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않았고,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려고 하시는데도 바꾸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끝까지 다 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들이 육체의 욕망을 느꼈기 때문에 심판하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순종 할 때 하나님은 성령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리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십니다. 홍수가 일어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를 가려줄 피의 제사를 드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즐겁고 배울 것 많은 세상에서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기 위해 피의 제사를 버린 겁니다. 물론 예배를 아예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요, 날라리 예배요, 자기를 자랑하려고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변화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아담 때부터 노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삶을 바꾸려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왜 무서울 까요?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변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도 안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도 안 바뀌는 사람은 어떤 기적이 일어나도, 홍해가 갈라져도 안 바뀝니다. 절대 안 바뀝니다.
앞으로 영원히 구원 계획을 포기하셨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 세대 사람들을 철저하게 버리셔서 그들에게서 성령의 역사를 거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곧 이들에게는 다시는 회개하거나 뉘우칠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이 옳다는 확신만 더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하는 짓이 옳고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리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먹는 음식 덕분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감동시키셔서 우리의 잘못을 깨우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심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내가 내 머리나 힘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으며,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교회에서 점점 떠나고 계시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배에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교회에 임하시지 않습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찬양은 단순한 음악에 그치고 맙니다. 또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말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자신을 믿고 있으며, 자기의 믿어 온 연수와 자기의 종교적 열정과 사회적인 신분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을 몰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교만하고, 더러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서 뻐기고 앉아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성령의 역사를 교회에서 몰아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추십시오. 이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연수를 120년으로 정하셨습니다. 지금부터 홍수 멸망까지 남은 시간이 120년이라는 것입니다. 120년만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계획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수를 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정하신 기간이 차면, 모든 역사는 중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니 12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멸망시킬 때, 육축과 짐승, 공중의 새들도 모두 멸망시키셨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육축은 하나님께 필요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만큼 사람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 길로 갈 때, 하나님은 더 이상 짐승과 육축과 모든 것을 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누군가가 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120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상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었지만, 멸망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 때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4:38-39절)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노아 홍수의 긴박성과 또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먹고. 마시는 쾌락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보면
*장가들고 시집가고*라는 것이 아주 강조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장가들고. 시집가는 데, 모든 것을 걸기 때문입니다. 모든 돈을 결혼에 다 씁니다. 예쁜 웨딩드레스 입고. 비싼 목걸이 하고. 비싼 음식 먹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살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혼여행 가면, 사진을 수백 장씩 찍습니다. 그 다음부터 먹을 것이 없더라도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결혼식은 정말 겸손히 해야 합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즉 밥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세금도 내야하고. 아파트 관리비도 내야지요.
노아 홍수는 최종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판의 모형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리기 싫어할 때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붙들고 나와서 예배드리기를 싫어할 때, 예배가 나의 자랑이 되고, 하나의 무대처럼 될 때,
*예배는 짧게, 골프 시간은 길게*가 될 때, 그때가 곧 보편적인 심판이 임할 때입니다. 택한 백성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딥니까? 곧 교회(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집에서 식구들이 *교회 가지 말고 공부나 해*할 때에는 *내가 교회에 가야 엄마 아빠가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벨의 피 제사를 드리러 가야 합니다. 네피림들이 추앙받을 때,<터미네이터>가 같은 영화가 인기리에 상영 될 때, 무서운 종말이 오고 있다는 징조를 읽으십시오. 우리는 절대로 영웅을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다 형제와 자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세대에 대해서도 이미 기간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육체를 쳐서 성령께 복종시킵시다. 이 몸을 진주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막 쓰십시오. 즉 아픈 사람 있으면. 가서 빨래도 해주고. 설거지도 해주세요. 사우나에 가서 올리브유 바르다가 지옥에 가면 더 오래 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몸은 사용하라고 주신 겁니다. 오직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이것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멘
찬송가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5월 15일(주일예배)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주 중 감동받은 양식 재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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