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마리아는...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횬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가 통곡하는 장면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오'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눙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요 20: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흰 옷 입은 두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드러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의 육안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별 무리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둥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누가와 요한은 무덤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예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 요 20:13]"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천사들이...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 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중오하였던 육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
한편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말을 하지 않으며 더이상 둥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부활 사실을 고지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요 20: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의 서신 것을...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올 들여다 보고 있었고 천사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눙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 이래 많은 주석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올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톨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온 도상의 두 제자도 그랬고해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요 20:15]"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자여...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뚱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동산지기.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주여...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는 '주'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되었으므로 '선생님' 또는 '여보세요'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단신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요 20: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아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말씀을 연상시킨다.
돌이켜...랍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한다.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라는 표현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의해 거부되며 후자는 문맥상 마리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가눙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랍오니'는 '나의 선생님'을 뚱하는 헬라어 '디다스칼레'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니까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