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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도주님께서 공부하셨구나!”(下)
- 동래 마하사, 보수동 도장, 영성정 터, 적천사 도솔암 -
연구원 곽춘근
답사 둘째 날이 밝았다. 부산에서 아침을 맞기는 10여 년 만인 것 같다. 서울에서 포덕사업을 할 때 한 번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타향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은근히 설렌다. 낯선 길과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겪는 일상들이 새로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돌아보기로 한 곳은 동래 마하사(摩訶寺), 보수동(寶水洞) 도장, 밀양의 영성정(靈聖亭) 터, 청도의 적천사(碩川寺) 도솔암(兜率庵) 등 네 곳이다.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시간 순서를 따르자면 도솔암(교운2장 28절), 영성정(30절), 마하사(47절), 보수동 도장(52절) 순으로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부산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부산에서 밀양, 청도를 거쳐 여주로 돌아오기로 했다.
동래 마하사는 부산 황령산(荒嶺山)의 산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금련산(金蓮山)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금학이 알을 품고 있는 ‘금학포란(金鶴抱卵)’의 지세로 알려져 있다. 마하사의 명칭은 불경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반야심경)’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마하’는 ‘한량없이 크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창건은 5세기 신라 내물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는데, 1965년 보수공사 때 대웅전과 나한전에서 발견된 상량문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름과는 달리 사찰의 크기는 작은 편에 속해서 일주문은 없고, 천왕문과 그 위에 종각이 있는 2층 전각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이 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설법전의 뒷면이 보이고 그 벽에 팥죽과 나한 전설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마하사를 유명하게 만든 이야기 중의 하나다.
약 500년 전 어느 동짓날 절의 공양주가 팥죽을 쑤려고 했다. 그런데 화로에 묻어둔 불씨가 꺼져 있었다. 할 수 없이 불씨를 구하러 황령산 봉수대로 가니, 봉수꾼이 말하기를 “조금 전 상좌가 불을 얻으러 와서 불을 얻고 쑤어 놓은 팥죽까지 먹고 갔다.”고 했다. 그런데 절에는 상좌도 없고 불씨를 얻으러 보낸 일도 없어서 이상하게 여기고 절 부엌에 돌아와 보니 아궁이에 불이 벌겋게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기한 일이다 생각하면서 동지팥죽을 쑤어서 나한전에 올리러 갔더니 발타라존자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었단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8분씩 나한이 모셔져 있는데 발타라존자는 부처님 왼편 세 번째에 앉아 있다. 그래서 공양주는 봉수꾼이 말한 상좌가 사실은 나한이 동자로 화신하여 벌인 일임을 깨달았단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있었다고 전해 온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응진(應眞)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서 석가여래로부터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구제하라는 임무를 받은 자를 말한다. 이 나한전은 설법전 중앙을 가로질러 있는 하심문(下心門)을 지나서 왼쪽에 있다. 예전에는 응진전이었는데 나한전(羅漢殿)으로 현판을 크게 새로 걸면서 응진전 현판은 나한전 옆면으로 자리를 옮겨 걸어 놓았다. 나한전과 나란히 대웅전이 있고 하심문 정면에 높게 쌓인 계단 위쪽으로 삼성각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지장전이 있다. 이 지장전 뒤로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가 있는데, 이 요사채에서 도주님께서 1949년 겨울에 49일 동안 공부하셨다고 한다. 현재 요사채는 도주님 공부하실 때 있던 건물이 아니고 1970년 중건 이후로 새로 지어진 것이어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았다.
『전경』에 도주님께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시고 끝나실 무렵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불상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는 부처를 상상해 보았었다. 과연 그 모습은 어떨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불상은 나한전에 있던 석가여래좌상인데, 이 여래상은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모셔져 있다고 했다. 도주님의 공부에 등장하는 불상을 보고 싶은 마음에 범어사로 출발하였다. 출입문을 들어가니 불상들이 참 많았는데 이렇게 모여있는 부처님 상을 보기도 처음이었다.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역사의 주인공을 찾아보니 오른쪽 중간쯤에 작은 부처상이 보였다. 보통 석가여래상은 허리를 펴고 눈을 아래로 하여 중생을 내려다보는 모습인데, 이 불상만은 옆에서 보니 구부정한 등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찌 이런 모습일 수 있는지 참 신기했다. 생각해 보면, 불상의 모습은 도주님 공부의 경건함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 행선지인 보수동 도장에는 10시가 조금 안 되서 도착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1948년 9월에 도본부를 부산에 설치하셨다고 나오는데, 그곳이 보수동 도장이다. 여기는 현재 도장처럼 여러 건물이 들어설 만큼 넓지는 않지만 무극도장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 치마바위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은 2층 단독주택으로 도주님의 가족이 거주하신다고 한다. 친지 분들을 통하지 않으면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밖에서 건물의 모습과 지세만 살펴보았다. 대문 안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옆으로 돌아가 치마바위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치마바위는 높이가 상당했다. 10미터 정도는 되는 것 같았고, 위에서 내려다보니 보수동 도장 모습과 저 멀리 있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보수동 도장 대문에서 건물마당까지는 폭이 좁은 진입로가 나있고, 그 주변과 건물 마당에는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예쁘게 단장되어 있었다. 지붕과 벽의 색들은 칠을 한지 얼마 안 되었는지 색들이 살아 있었고, 일층 현관 양옆의 샤시들도 새로 설치하여 깔끔하였다. 지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멀리 바다를 보니 남항대교와 부산항이 자그맣게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천마산과 구덕산, 아미동 고개가 하늘에 닿아 선명하였다.
도장이 설치될 당시 치마바위 뒤편은 야트막한 산이었는데, 치마바위 너머 위쪽으로 마을이 있었고 거기에서 왼쪽으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산 중턱에 도주님께서 공부하시던 ‘산정’이 있었다고 한다. 산정은 도주님께서 머무시며 공부하셨던 집으로, 도장과 산정을 왕래하셨지만 도주님께서는 이 산정에 주로 계시면서 계속 공부를 하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 산정 주변도 개발이 되면서 모두 주택지로 바뀌었는데, 특히 도시 정비 계획에 따라 산정이 있던 자리는 도로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우리 수도인들 입장에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경』 교운 2장 52절에는 도주님께서 이곳 산정에서 공부하시다가 잠시 공부를 멈추시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때가 1954년 봄이었는데 도전님께서도 옆에 시좌하고 계셨다고 나와 있다. 특히 이 구절은 우리 도주님 관련 일화 중에서 『전경』에만 유일하게 나오는 것이다. 도전님께서 직접 적어놓으신 이 구절은 혹시 현재 우리의 모습을 예견하여 놓으신 것은 아닌지 의미심장하다.
세 번째 답사지인 밀양 종남산 영성정까지는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영성정이 있는 위치는 종남산 중턱 조금 위쪽인 7부 능선쯤이다. 6.25 때 불타 없어져 터만 남아 있던 곳에 현재는 개인 사찰인 미덕사가 세워져 있다. 영성정은 재실이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렇게 험하고 높은 산에 재실을 지었다는 것에 의아스런 마음이 들었다. 원래 터의 주인은 김해 김 씨였던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영성정이 김해 김 씨의 재실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현재의 미덕사는 조그마한 대웅전 건물, 칠성각과 요사채 그리고 요사채 지붕 위로 큰 마당을 만들고 그곳에 약사여래상을 세워 놓아서 예전의 영성정 터보다는 확장된 규모로 보인다. 미덕사 경내에서 영성정 터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빈 땅을 구입해서 건물을 짓기 위해 터를 다시 닦았기 때문에 미덕사 관리인 중에 영성정의 내력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주지스님도 영성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형을 보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성정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터는 산줄기가 갈라져 계곡이 시작되는 곳으로 역삼각형 모양의 비스듬한 작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지형에서 영성정 터가 있을 만한 곳은 그나마 경사가 심하지 않은 너른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서 가장 그럴듯한 곳이 대웅전이 세워진 터로, 이곳에 영성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주님께서 영성정에서 공부하신 때는 1924년 여름부터다. 이 시기의 도주님 행적을 잠깐 살펴보면, 1923년 10월부터 1924년 초인 2월 중순까지 적천사 도솔암에서 공부하시고, 그 후 3~4월 경에는 밀양 세천에서 둔도수를 보셨다. 그리고 1924년 4월에 도장이 태인에 마련되자 치성을 드린 후 여름부터 영성정에서 다섯 달 동안 공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교운 2장 29~30절) 이 공부를 하신 후 다음 해(1925년)에 무극도를 창도하시면서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셨다. 이렇게 도주님의 행적을 살펴보았을 때, 영성정 공부는 도장을 마련하고 난 후 무극도를 창도하고 상제님을 영대에 봉안하시기 전에 하셨던 공부로 보인다. 또한 도주님께서는 이 공부를 ‘폐백도수’라고 명명하셨는데, 이 명칭은 마치 옛날에 왕과 제후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비단이나 옥 등의 진귀한 물건을 폐백(幣帛)으로 올리던 예법을 연상케 한다.
이번 답사 일정 중 마지막 장소는 적천사 도솔암이다. 도솔암까지는 약 1시간 20분 거리. 적천사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조금 안 되었다. 도솔암은 적천사에 소속된 암자여서 본 사찰에서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있다. 적천사를 끼고 뒤로 돌아 올라가는 길을 살펴보니 왼쪽과 오른쪽 두 갈래가 보였다. 왼쪽 길이 좀 편해 보여서 따라 올라갔다. 평탄한 길 양 옆으로 굵은 대나무밭을 보면서 한가로이 올라가는데 저 멀리 앞에 오솔길을 가로질러 놓인 나무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길이 막혀 있었다. 10분을 헛걸음하고 되돌아 와서 다시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여기는 가파르게 경사가 진 완연한 등산 코스다. 헛걸음한 시간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져 경치를 둘러보며 쉬엄쉬엄 올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앞에 가고 있는 답사팀원들을 보니 오르는 속도가 거의 군대에서 행군을 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곳을 오르면서 산의 풍치는 보지 않고 땅만 보고 올라가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도솔암에 가까워질수록 급해지는 경사만큼 점점 숨도 가빠와서 잠시 쉬며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험한 곳으로 불공드리러 오는 분들은 이 길을 밟는 한 걸음 걸음을 부처님께 드리는 정성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모습은 정성없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되짚어 보았다.
도솔암은 본당인 도솔암과 그 옆의 사무실 그리고 그 위로 삼성각과 요사채가 있는 작은 암자다. 도착하자마자 경내를 잠깐 둘러보고 도솔암의 내력에 대해서 일하시는 분께 여쭈어 보았다. 그런데 오신지 한 달 밖에 안 되셨단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여러 말씀을 듣고 나서 주지스님을 뵐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렸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주지스님과 방에 들어가 우리 소개를 하고 나서 스님께서도 소개를 하셨다. 법명은 혜승(惠承)이며 오신지 3일 되셨단다. 순간 도주님의 자취를 찾기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도주님 공부하실 때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얻어가고 싶었는데…. 기대하고 온 만큼의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스님과 여러 가지 담소를 나누면서 역시 수행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스님께서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대순진리회에서 이곳을 매우 중요한 곳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다만 이곳이 불자들이 조용히 기도드리는 장소이니 서로 피해가 되지 않도록 소리 없이 오고 갔으면 한다는 말씀이었다. 오게 될 경우에도 미리 연락을 주고 와서는 조용히 둘러보았으면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사실 답사라는 일정은 다소 소란스러운 때가 많고, 간혹 그곳 답사지와 관련된 설명을 하게 될 경우에는 조용한 산사의 정적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이 생긴다. 이런 점에 대한 우려를 말씀하신 것 같았다.
이곳에서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시기는 1923년 10월부터 1924년 2월 중순까지였다. 1923년 6월 상제님 화천치성 후 전교(傳敎)를 내려주신 때와 1924년 4월에 도장이 태인에 마련된 시기 사이다. 돌단을 높이 쌓고 공부를 하셨던 곳은 칠성각 뒤편인데 현재 도솔암에는 칠성만 단독으로 모시고 있는 칠성각이 없다. 대신에 삼성각이 세워져 있는데 보통 칠성각은 삼성각으로 많이 통합되어 왔다. 삼성각에는 칠성과 산신 그리고 홀로 깨달아 성인에 올랐다는 독성 나반존자를 함께 모시고 있다. 삼성을 따로따로 모실 경우에는 칠성각·산신각·독성각 등의 전각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현재 도솔암 삼성각은 예전의 칠성각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답사의 목적인 도주님께서 단을 쌓고 공부하셨던 장소를 찾아보았다. 현재 도솔암 본당 오른쪽에 있는 종무소 뒤는 가파른 언덕이어서 돌단을 쌓을 공간이 없고, 도솔암 본당 뒤편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지만 칠성각 뒤가 아니기 때문에 공부장소로 보기는 어려웠다. 도솔암 본당 뒤 언덕 위에는 요사채와 삼성각이 있는데 이곳에 칠성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요사채는 언제부터 사용하던 곳이었을까? 일하시는 분에게 요사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여쭈어 보았다.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요사채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면 요사채 자리에 칠성각이 세워졌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칠성각의 터로 추정되는 곳은 요사채 자리이거나 혹은 삼성각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칠성각이 현재의 요사채 터에 있었다면, 칠성각이 삼성각으로 통합되면서 그 터가 요사채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각이 원래 칠성각의 터였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으로써는 요사채나 삼성각이 세워진 시기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 뒤편 어딘가에 도주님께서 돌단을 높이 쌓고 공부를 하셨던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곳으로 추정되는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 아쉬웠다. 어쨌든 정성이 부족해서 이겠지만 가끔은 도주님의 자취를 찾는 일이 절벽을 마주하는 듯해서 막막할 때가 있다.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야겠지 하며 힘을 내어 본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며 천천히 도솔암을 내려왔다.
도솔암을 마지막으로 이틀 동안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여주로 향했다. 현재는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곳을 눈으로 보고나니 『전경』 구절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장소 한 곳 한 곳이 보통 사람들은 다가가기도 어려웠을 곳이었다. 짧은 답사 일정 속에서 공부의 의미까지 알 수 있기를 기대했다면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물론 짧은 시간에 안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도주님의 공부 장소를 더 많이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혹시나 둘러본 답사지의 모습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여본다. 우리가 닦고 있는 도는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행해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틀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 속에서 얻은 도주님의 자취는 마음 밭에 든든한 믿음을 차곡차곡 심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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