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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사람 노산 이은상은 누구인가
오하룡(시인, 남하이승규노산이은상기념사업회 이사)
머리글
최근 들어 마산을 소재로 한 국민 애창 가곡 ‘가고파’를 지은 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을 그의 고향 마산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다시 자료 위주로 여기서 거론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새삼스럽다는 것은 ‘가고파’가 널리 알려져 있고 그런 만큼 많이 언급되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여기고 있는데, 막상 시민들과 부딪혀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다. 제발 이런 방대한 업적을 남긴 삶을 산 사람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애향 애국 애족의 시인으로 상징되는 마산 사람 노산 이은상은 1903년에 태어나 1982년 타계한 인물이다. 그의 생존 년대에는 그가 남긴 ‘가고파’를 비롯 많은 애창되는 가곡의 가사가 된 뛰어난 문학작품은 물론 다방면에 걸친 걸출한 업적으로 하여 당대 최고의 문화 인물로 회자 된다.
그러나 지금이 2024년이니 그의 사후 세상에서 지워진 지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이 시대에 등장한 사람들에게 그의 업적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가고파’ 등 그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알지 못함으로써 잊어지는 것은 물론, 그의 방대한 업적 또한 지워지는 것도 모르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그를 기려야 할 고향 마산에서 그런 현상이 심각하게 보여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지워진 시간에 태어난 사람들은 노산 선생을 알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그 세대들이 지금 세상을 이끄는 중추적인 위치에 있다. 이들에게 단절 없이 꾸준히 노산의 가곡이 불러지고 노산의 문학작품이 읽혀졌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노산이 지워진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예 모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노산을 좀 알면서, 노산의 노래도 불러본 사람들이 무슨 억하심정에선지 노산을 잘 못 이해하고 고향의 귀한 보배를 못 알아보는 것은 고사하고 없는 흠결조차 찾아내어 아예 지워버리려 나서고 있어, 그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사실, 국가는 진작 노산 이은상의 인물됨과 그 업적을 알아보고 20여 년 전 2000년 밀레니엄을 맞으면서 그의 고향 마산에 기념관을 짓도록 기금을 내려보내는 계기가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친일과 친독재’를 들고나와 반대하는 무리가 나서더니 거기에 더하여 ‘315의거를 불상사’로 비하했다고 하는 무리까지 가세하여 결국 그의 이름으로 된 문학관은 이뤄지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친일’은 관련 없는 사실의 과장이었고 ‘315의거 불상사’ 설도 당시 신문에 난 기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곡해한대서 비롯된 것인데도, 끝내 바로잡지 못하고 노산문학관은 무산되고 진실과 먼 결과를 빚고 말았다. 거기에는 당시 마산시의회까지 등장하여 진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13대 14라는 결과까지 빚음으로써 비웃음이 되었다.
그 배경을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이 험담꾼들은 이념적으로 다소 변질된 부분이 보이기도 하였다. 나라를 건국하고 발전시킨 지도자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업적을 훼손하는 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그 고난의 시대를 함께하고 인내해온 노산 선생까지, 애국 애족적 차원에서 나라가 잘 되는 쪽에서 노력한 것을 무슨 흠이라도 되는 양 사시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얄궂은 작태인가 싶은 것이다.
아무튼 노산 선생이 세상에 존재한 79년의 생애 가운데 활동한 약 60년의 신념에 찬 애향 애국 애족적 문학, 문화 전반에 걸친 행적은 너무나 탁월하고 우뚝하기 때문에 그 행적이 그냥 덮여서는 안 되겠다고 우리는 나서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재능으로 고향을 노래하였고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특히 그를 배출한 그의 고향이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의 많은 업적을 늦게나마 보존하고 가꾸려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 나열된 자료를 보면 설명 없이도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 절로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
1. 출생과 교육
노산 선생의 가계(家系)
19세기(1839-1866) 중기 대원군의 종교박해 때 가톨릭 신자였던 조부에 의해 서울에서 가족이 솔가하여 부산으로 내려온다. 어떤 이유에선지 20세기 들며 아버지 이승규 40세 때인 1903년 부산에서 마산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이때 노산이 출생하였다. 당시 주소는 마산시 상남동 102번지 였다. 노산은 1903년 10월 22일 경남 마산에서 교육가 남하 이승규의 차남으로 출생(본관 전주, 모친 김해김씨 영유)한다. 형제는 모두 6남 1녀로 장남(民相)은 유아 때 사망하고 노산이 차남이었다. 그 아래로 아들 한상(漢相 1906-1998) 길상(吉相 1913-1993) 정상(正相 1915-1935) 신상(信相1921-1972), 여자 형제로 희(喜?)가 있다. 넷째 정상이 학생(서울 배제고 재학 중;1935) 때 사망하고 이 동생을 그리며 썼다는 노산의 수필집 <무상(無常)>(1936)이 70년대 초반까지 7판이나 간행되며 당시 널리 유명하였다고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노산의 직계 자녀로는 3녀 1남이 있다. 장녀 수화(1928.3.25;1남1녀), 차녀 수옥(1933.8.17; 3남 1녀), 3녀 수정(1936.9.10; 3남 3녀), 장남 수장(1941.4.1; 2남2녀)이 있다.(장남 수장 증언. 2024년 11월 현재 미국에 생존해 있음)
본적은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106의 8, 사망할 때 주소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1의 300번지이다.
창신학교 설립과 노산의 교육과정
이 무렵 정착한 상남동 주변에 선교 차 호주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다. 아버지 이승규는 이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 이승규는 당시 인근에서 잘 알려진 한약사로서 당대 지식인이었다. 주민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905년 독서숙(讀書塾)을 선교사들의 협조를 받아 개설하고 교육에 앞장선다. 1908년에는 이것을 사립 창신학교 보통과 정규과정으로 발전 개교한다. 보통학교 졸업생이 배출되자 이들의 진학 길을 위해 고등과를 설립한다. 노산은 이 학교 보통과와 고등과 5회(보통과 4년 고등과 3년 1911-1921) 졸업생이다. 졸업 후 모교에서 2년 정도 교사로 근무한다.(이 부분도 일부는 연희전문 이후와 이전 등으로 다른 기록이 혼재한다)이후 서울 연희전문으로 진학하나 졸업을 앞두고 휴학하고 일본 유학을 한다. 이 부분도 최남선 등의 권유설도 있고 자력설도 혼재한다. 이에 앞서 선생의 20세 때인 1922년 아버지 이승규가 타계한다. 이때 이승규가 자신의 재산을 시당국에 기부하고 생전의 업적과 이런 재산 헌납으로 장례를 지역의 사회장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전한다.
재산 헌납을 보면서 필자가 의문을 갖는 부문이 있다. 아버지 이승규의 사망 당시는 큰아들, 외동딸은 사망하고 없으나 나머지 5남이 한창 자라고 있었다. (4남 정상은 1935년 사망) 그들 교육비와 미래를 의식한다면 재산 헌납은 쉽지 않은 결정으로 보이는 것이다. 과연 사심 없이, 당시 행정은 사실상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정치하일 때이므로 그들 일제 행정당국에 헌납한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이다. 자신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 등에 헌납한 것을 시당국으로 표현이 와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되는 것이다. 이미 토지 일부는 자신이 설립한 학교나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사후 이 재산의 소유문제가 자식 대에서 발생하면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 흔쾌히 사회에 헌납하는 형식으로 공표한 것이 당국에 헌납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노산은 와세다 대학 청강생으로 학업을 마친 것으로 되어있다. 와세다대도 정규과정을 마치는 것이 학생으로서는 당연한 목표일 텐데 왜 청강생으로 마쳤을까 하는 것이다. 유학 시절 양주동 등 당시 수재급 동급생들과의 동경 생활이 전해지고 있다. 노산의 유학 생활은 끼니를 걱정하는 생활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학의 정규과정을 밟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배려부족이 원인의 한 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더욱 노산은 동생이 5명이나 있는 처지이었으니 고심이 많았을 것이다. 노산은 기억력이 출중한 천재급 두뇌를 타고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머리였으니 굳이 정규과정을 밟을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의 신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으로서는 가져볼 수 있는 석연치 않은 의문으로 남는 것이다.
학력
1915년 마산 사립 창신학교 보통과 제5회 졸업(부친 이승규 설립)
1918년 마산 사립 창신학교 고등과 제5회 졸업
1923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사학과 수료
1925.4-1927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 사학부 청강
1927,8-1928년 5월 일본 동경 동양문고에서 국문학 연구
1969년 5월 경희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받음
1973년 2월 국립전남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받음
1974년 3월 연세대학교명예문학박사 학위받음
2. 노산의 문학
노산의 첫 작품은 19세 때인 1922년 작품인 ‘아버님을 여의고’가 첫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고향생각’(일명 고개를 수그리니), ‘꿈 깬 뒤’ 등이 첫 작품이라고도 한다. 나중 노산의 사촌 매제가 된 작곡가 박태준의 기록에 보면, 이보다 앞서 자신에게 보여 준 ‘순례기’ 등 처녀작이 있었다고 하며 이 작품에 곡을 붙인 적이 있다고 하여 노산은 등단 전에 이미 풍부한 문학 청년기를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1925-1935년 무렵 카프에 대항하여 시조부흥운동이 전개될 때 노산의 시조 창작 열의는 대단하였다. 광복 전 개별 작품으로 ‘봄 처녀 1925’ ‘옛 동산에 올라 1928’ ‘성불사 1931’ ‘가고파 1932’ ‘오륙도 1934’ ‘천지송 1935’ 등이 나오고 시조집으로 <노산 시조집 1932> <노산문선 1942> 등, 수필집 <노방초 1935> <무상 1935> 등이 발표되었다. 이로 하여 가람 이병기와 시조운동의 쌍벽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광복 후에는 시조집 <노산시조선집 1958> <푸른 하늘의 뜻은 1970> 수필집 <대도론(大道論) 1947> <민족의 맥박 1951> <노변필담 1953> 기행문 <피어린 육백리 1962> 등이 연달아 발표되었다. 이후 <노산문학선 1964> <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 1970> <산 찾아 물 따라 기행 1971> <성웅 이순신> <짧은 인생 영원한 조국에> <나의 인생관> <태양이 비치는 길로 1971> <민족의 향기 1973> <<조국강산> <구미기행 1974> <노산 산행기> <민족운동총서 전 10권 1979> <시조집 기원 1982> 등 별세할 때 까지 많은 저서를 남겼다.
노산의 문학적 자질에 있어서도 창신학교 재학 때 각별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사학자의 기본도 이때 갖추어진 것으로, 당시 교사진으로 활동한 분들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한글학자들이 이때 이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윤재, 김윤경, 안확 등이 그들이다. 특히 이윤재는 당시에 이미 널리 알려진 사학자로서 이순신에 대한 식견이 탁월하였으며, 노산이 사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그 영향으로 추측되고, 훗날 이순신 대해 깊은 조예를 갖게 된 것도 이윤재의 영향으로 보인다.
노산은 이미 학생 때 한학 실력도 갖추었는데 그 기본은 교사들의 영향이 컸겠으나 특히 한학자 교사 김영규 장로의 지도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학교의 자료가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구전되는 바에 따르면 김영규 교사는 노산의 한문습득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노산은 일본에서 와세다 청강생으로 다니면서 근처의 동양문고에서 동양학 공부를 한 것도 한학자로서 실력을 갖추는데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3. 독립유공자로의 활동
노산은 조선일보에 근무할 때 일제에 의한 언론의 간섭이 심해져 일본군이라 쓰던 것을 아군으로 쓰도록 강요받는 등 악화되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1938년 사표를 던지고 전라도 광양의 지인이 운영하던 백운산 아래 광산촌으로 도피 생활에 들어간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는 고초를 겪는다. 조선어학회 ‘발기 취지문’을 노산이 썼기 때문인데 노산의 은거지를 모르던 일제 경찰이 노산을 검거한데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이윤재 선생은 모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 출판업자는 마침 이윤재 선생 댁에 있던 노산 선생 시조 원고를 보았다. 그 원고라도 주면 좋겠다고 간청하였다. 이윤재 선생은 그 양해를 얻기 위해 노산과 서신 교환을 하게 된다. 일제가 그 사실을 통해 노산 주소를 알게 되어 검거하게 된 것이다.
노산은 이로 하여 해방을 앞두고 광양경찰서에 다시 구금되어 있다가 해방이 되면서 풀려난다.
4. 노산의 경력
(1982년 별세 때 현재)
경력
1928.6-1929.10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 편찬위원
1929.10-1931.3 월간잡지 <신생(新生)> 편집장
1931.4-1932.3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교수
1932.4-1935.5 동아일보사 기자, 월간 <신가정(新家庭)> 창간 편집
1935.6-1938.6 조선일보사 기자 편집국고문 및 출판국 주간
1938.6-1942.9 일제탄압으로 조선일보 사직, 전남 백운산하(白雲山下) 은거
1942.10-1943.9 조선어학회사건연루 홍원경찰서, 함흥감옥구금 기소유예 석방
1945.1-1945.8 사상예비검속 광양유치장 구금 해방과 함께 출옥
1945.12-1945.10 전남 광주에서 호남신문사 창간사 및 국학도서출판관 사장
1949.4-1950.3 동국대학교문리과대학 강사
1951.1-1952.5 부산 피난생활
1952,6-1954.5 전남 광주에서 호남신문사 복간 사장
1953.4-1955.3 전남대학교 재단이사장
1954,10-1969.3 대구청구대학 교수
1955.10-1961.3 사단법인 이충무공기념사업회장
1957.4-1962.5 사단법인 신문학원(新聞學院) 이사
1958.4-1961.5 국립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특별강의
1959.1-1961,12 동방고서국역원장(東方古書國譯院長)
1963.7-1968.12 사단법인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이사
1964.10-1968.12 이한응열사(李漢應烈士) 숭모회장
1966.1-1976.12 한국시조작가회장
1968.3-1977.7 재단법인 숙명학원 이사장
1968.9-1970.12 대종교종경종사(大倧敎倧經宗史) 편찬위원회 위원장
1979.10-1980.10 국제신문사 고문
1965.1(사업종료) 조소앙선생 문고(文稿)편찬위원회 위원장
1969.2(사업종료)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1971.1(사업종료) 의병대장 심남일(沈南一)장군 기념비 건립위원회 위원장
1972.1(사업종료) 벽산 김도현(碧山 金道鉉)열사 기념비 건립위원회 위원장
1976.1(사업종료) 백범(白凡) 선생 탄신 100주년축전 집행위원
1976.10(사업종료) 한글학회 회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1978.10(사업종료) 자연보호헌장기초심의위원회 위원장
1979.9(사업종료) 안중근의사 탄신 100주년축전 집행위원장
1980.3(사업종료) 범 독립운동자 대회(凡獨立運動者大會) 고문
1980.9(사업종료) 한국도로공사 10년사 편찬위원회 고문
1980.12(사업종료) 단재 신채호선생 탄신 100주년축전(祝典)회장
1982년 9월까지의 직책
1962년 2월부터 사단법인 민족문화협회 회장
1978년 10월 대한민국 예술원종신회원
1977년 2월 사단법인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
1977년 1월 한국시조시인협회 종신 명예회장
1966년 4월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
1967년 4월 문화공보부 문화재위원
1967뇬 7월 대한체육회 고문
1962년 3월 사단법인 안중근의사 숭모회장
1978년 5월 국토통일원 고문
1980년 12월 광복회 고문
1981년 1월 통일촉진회 최고위원
1965년 10월 한국청년운동협의회장
1979년 7월 독립동지회 고문
1067년 3월 세계 에스페란토협회 국제이사
1972년 1월 이충무공 기념사업회장
1972년 3월 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1972년 6월 사단법인 문화보호협회 이사
1973년 2월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1973년 10월 국제산악연맹 산악분과위원회 위원
1974년 1월 사단법인 자연보호협회 이사
1975년 3월 신단재(申丹再) 선생 기념사업회장
1976년 8월 사단법인 임백호(林白湖)선생 기념사업회장
1976년 12월 사단법인 충민공 임경업(忠愍公 林慶業)장군 기념사업회이사장
1977년 3월 사단법인 강이식(姜以式) 장군 숭모회 회장
1977년 5월 한중문화친선협회 고문
1977년 6월 총력안보중앙협의회 고문
1977년 10월 한국민속촌박물관 고문
1978년 1월 문화공보부 선현영정(先賢影幀)심의위워회 위원
1978년 2월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고문
1979년 2월 사단법인 지봉 이수광선생 기념사업회 고문
1978년 2월 사단법인 율곡사상연구소 고문
1981년 4월 국정자문위원
수상
1964년 7월 대한민국 예술원 문학공로상 받음
1969년 10월 한글공로상(대통령상) 받음
1970년 8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받음
1973년 5월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 받음
1977년 12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받음
1982년 9월 금관문화훈장(일등급) 추서 받음
5. 노산 이은상 연도별 저서목록
1931년-조선사화집(삼국시대편)(한성도서회사) /묘향산 유기(遊記) 기행(동아일보사)
1932년-노산 시조집(한성도서회사)
1935년-노방초(路傍草)수필(창문사)
1936년-무상(無常)수필(정상장학회)
1937년-탐라기행(조선일보사)
1938년-지리산 기행(조선일보사)
1942년-노산문선(鷺山文選)(영창서관)
1946년-이 충무공 일대기(호남신문사)
1947년-대도론(大道論)수필(국학도서출판사)
1949년-조선사화집(고려시대편)(한성도서회자)
1951년-민족의 맥박(脈搏)수필(민족문화사)
1953년-노변필답(爐邊筆談)(민족문화사)
1954년-삼원당산고(三願堂散稿)(대구일보사)
1955년-조국강산(祖國江山)가집(歌集)(민족문화사)
-낙동강문화사론(부산일보사)
1956년-금계공노인선생사적(錦溪公魯認先生事蹟)(함평노씨종중)
1958년-노산시조선집(鷺山時調選集)(남향문화사)
1960년-노산시문선(경문사)
-국역주해(國譯註解)이충무공 전서(全書) 상하(충무공기념사업회)
1961년-한국사화야담전집(韓國史話野談全集)(동국문화사)
1962년-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성문각)
-피어린 육백리(횃불사)
1963년-쌍충사사적기(雙忠祠事蹟記)(고흥쌍충사)
1964년-노산문학선(탐구당)
1965년-국역야은길재선생문집(國譯冶隱吉再선생문집(고려서적)
-국역주해일화시문집(國譯註解一和시문집(삼학사)
1966년-산찾아 물따라 기행(박영사)
-가을을 안고(횃불사)
-사임당과 율곡(성문각)
1968년-국역주해난중일기(國譯註解 亂中日記)(현암사)
1969년-성웅 이순신(聖雄 李舜臣)(횃불사)
1969년-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횃불사)
-국역농포선생문집(國譯 農圃先生文集)(해주정씨 宗中)
1970년-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금강출판사)
-주해 안중근의사 자서전(안의사숭모회)
-나의 인생관(휘문출판사)
1971 -태양이 비치는 길로 (상하)(삼중당)
1973년-민족의 향기(수학사)
-조국강산(횃불사)
1974년-구미기행(歐美紀行)(한국일보사)
-불타성지순례기(佛陀聖地巡禮記)(중앙일보사)
1975년-노산산행기(鷺山 山行記)(한국산악회)
-노산시조선(鷺山時調選)(삼중당)
1979년-민족운동총서(民族運動叢書10冊)(횃불사)
1982년-기원(祈願)(경희대출판국)
6. 노산을 보는 평가
황희영(1922-1994) 중앙대교수
노산의 모습
-그의 몸매와 키는 우리나라 전형적 선비의 모습이다. 노산 선생의 머리, 손, 발, 걸음걸이를 볼 때 옛 선비의 모습을 보는듯하다.
-노산은 철저한 야인이다. 그가 해방 후부터 추대되었던 각종 단체의 장(회장, 이사, 이사장, 의장, 고문 등) 이런 임시적인 것 말고도 상임으로 또는 정기적인 책임을 진 것만 해도 50여 개가 넘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관청(행정, 입법, 사법부)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교육기관, 학술기관, 재단, 민족문화, 독립운동, 역사, 문학 등 따위의 민간단체의 것들이다.
어느 날 내가 노산 선생 댁을 찾아뵈었을 때였다. 때마침 유신헌법을 선포한 직후였다. 정부에서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저명인사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불러 언론 보도의 일선에 나가 좌담 또는 개인 연설 등을 하도록 종용하던 때였다. 노산 선생은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저윽이 흥분해 있었다. 밖에서 전화를 전하는 비서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노산은 평생 제복 제모를 써본 일이 없다고 해! 내게 정부에서 주는 모자를 쓰고 다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해, 이 노산은 노산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해” 하시었다.
백 년 만의 한 사람인 문장가
-노산의 이름은 무엇보다 문필가로서의 명성이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말은 물론 글도 못쓰게 하였다. 그런 때에도 노산선생은 우리 말 글을 지키고 창작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가 아우(李正相)의 죽음을 당하고 쓴 수필집 <무상(無常)>은 당시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흔히 산문에 춘원(春園)이요 운문에 노산이라고 두 사람을 현대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두 별이라고 하였다.
노산의 문학적 특징은 수필도 수필이지만 우리 민족의 전통인 시조(時調)에 있다. 해방 후부터 특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시와 노래로 노산의 것이 가장 많고 유명하다.
‘가고파’ ‘성불사’ ‘봄 처녀’ ‘그 집 앞’ 이런 노래 가사로부터 우리나라 이름난 역사 유적지와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쓴 기행문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찾아 쓴 <태양이 비치는 길로>, 겨레의 비극현장을 답사하며 쓴 <피어린 육백리> 등 문장들은 길이 남을 것이다. 그의 문장은 운율적이며 유려하다. 나라사랑 겨레사랑 그리고 벗 사랑, 자연 사랑이 주제와 소재를 이루고 있다.
-1970년 국제펜 서울대회가 있었다. 노산 선생이 발제를 하게 되었다. 그 발제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선생은 에게(황희영 교수) 상의해 오셨다. ‘동양의 해학’이란 제목이었다. 그 글은 명문이었다. 박학다식한 문장이었고 슬기와 멋이 넘치는 글이었다. 노산의 꼼꼼한 학자임이 유감없이 담겨진 글이었다.
웅변으로도 탁월하였다
노산만큼 강연을 많이 한 분도 드물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 학교와 언론기관 등이 그의 연설을 들으려 줄을 섰다. 그의 말을 들으면 유익하고 흥미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 톤을 높이지도 크게 소리치지도 않으며 결코 어렵고 현학적인 어휘도 쓰지 않는다, 조용조용한 다정한 목소리지만 그 말속에 크고 웅장하고 힘 있는 뜻이 담겨있다. 듣는 이는 웅변가 아닌 웅변가의 사자후를 듣는 느낌을 갖는다. 거침없이 큰 물줄기가 흐르듯 도도하고 유창한 연설이 노산의 언변이다. 그의 좌담을 들으면 강연장이 웅변 같은 말소리 그대로다. 선생의 경우 웅변이 좌담이요 좌담이 곧 웅변이다.
몸에 밴 애국정신
-노산은 애국이 몸에 밴 진정한 애국자이다. 교민들의 초대로 일본에서 강연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한복을 입었다. 교민들이 선물을 주는 경우 사양하며 받지 않았으며 귀국 때는 원래 소지했던 지팡이와 부채 등 외 어떤 현지 물품을 들고 온 적이 없었다.
소설가 김동리(1913-1995) 한국예술원원장
노산 선생은 시조시인이요, 문장가요, 국사학자요, 애국자이시다. 세상에는 시조시인도 많고 시조시인인 동시에 산문 문장을 쓰는 이도 많고 또 그런 분들은 대개 다 어느 정도는 애국자이거나 민족주의자들인 경우도 많다, 그것은 시조라는 시의 형식이 우리나라 전통 문학 특유의 것인 만큼 그 시(시조)형식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다거나 그것을 자기 문학의 전공 분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히 민족 고유의 정서라든가 가락이라든가 하는 따위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한다면 <민족 고유의 정서라던가 가락이라던가 하는 따위>에 마음이 쏠리고 관심이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조라는 전통적인 시 형식을 택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시조시인은 일반적으로 민족적 관심이 다른 시인이나 문인들보다 자별한 편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노산 선생은 그러한 민족정신과 시조가 연결된 상징적인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 까닭은 대개 다음과 같다.
첫째, 노산 선생이 처음 문학에 발을 들여놓던 20대의 젊은 정열과 패기와 재능으로서 민족적인 소명 의식같은 것이 없었다면 시조를 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리다.
그 당시는 누구나 새로운 것, 자유로운 것을 찾을때라 시라면 신시(자유시)요, 산문창작이라면 소설을 택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육당이나 위당같이 학문을 본업으로 택했을 경우는 부담이 덜 가는 정형시(시조)를 택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시를 본업으로 삼는다거나 전공한다는 전제에서 당시의 노산 선생과 같은 재능과 정열로서 시조를 택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나 엄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둘째, 노산 선생은 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사학자로보다 시인으로 나갈 결심이었다는 것이 그 뒤의 생활 태도를 통하여 증명된다. 그러므로 그 뒤에 선생이 조국 강산과 고적 명소를 철저히 답사한 것도 역사적 학문적 답사라기보다 민족의 숨결과 조상이 살던 뒷 자취를 찾아 헤매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셋째, 노산 선생의 산문을 분류해 보면 이순신(민족의 태양), 안중근, 윤봉길 등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 인물들에 대한 연구와 전기와 행적 찬미 등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육친 고우 등에 대한 기록과 고향 고원(故園) 등에 대한 문장들이나 모두가 민족정신 혹은 민족적인 정서와 가락에 맞는 글들이다.
넷째, 시조시와 산문 문장의 볼륨의 문제다. 시조나 산문이나 한두 권 쓰고 말았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노산 선생은 시조가 약 이천수요, 산문이 수십 권인데 그것의 약 97%가 민족과 국가와 조국 강산과 고향 고구(故舊)와 고원(故園)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다섯째, 작고하기 약 반년 전에 상재된 <기원(祈願)>은 42편 205수의 시조가 수록된 대작인바 그 내용이 전부가 국토를 두 동강 낸 분계선(휴전선)에서 취재했을 뿐 아니라 통일을 기원하는 주제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것은 병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간신히 찾아간 분계선이었던 만큼 205수의 시조는 통틀어 두 동강 난 심정의 울부짖음이요 통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생은 평생 동안 곁눈 한번 팔지 않고, 계속 민족의 혼을 부르고 민족의 숨결을 찾고,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는 방법으로 시조도 쓰고, 수필도 쓰고 전기도 쓰고, 강산을 순례하고 사적도 답사했던 것이다.
아아, 그 몸, 그 마음 그대로 몽땅 민족의 얼이요 넋이었다고 할까.
지금 여기 선생을 그리며 존경하는 벗과 후진과 제자들이 글을 모아 선생께 바치오니 이 나라 이 강산이 온전한 하나 되는 날 저 눈부신 햇빛 타고 돌아오소서.
사후 언론 평문
독립기념관 못보고 가는 게 한스럽다(경남신문 1982. 9.18)
겨레가슴에 민족혼 심어(경남신문 1982. 9.18)
겨레사랑을 노래한 문단의 거목(경향신문 1982. 9.20)
민족애 정신으로 자연 노래(광주일보 1982. 9.20)
가고파 영원한 남쪽바다로(대구 매일신문 1982.9.18.)
시조문학 정착 문다거목(1982. 9.20)
의연히 살다간 민족문화의 거목(동아일보 1982.9.18.)
불귀의 길을 간 가고파(부산일보 1982.9.19.)
민족시인 노산(서울신문 1982.9.19.)
민족문학 정착에 큰 공(중앙일보 1982.9.20)
현대시조의 인간문학사(조선일보 1982.9.19)
주옥같은 시와 시조의 나라사랑 담아(중앙일보1982. 9.18)
한국현대사 움직인 거목(한국일보 1982.9.18)
영면한 내 고향 남쪽바다(한국일보 1982,9.18)
(김복근 <노산 시조론>)
7. 사후 장의위원회가 주는 교훈
여기서 노산의 사회장을 거론한다. 노산의 사후에는 당대 국내의 저명한 인사들로 장례위원회가 구성되고 장례식도 사회장으로 결정된다. 장례위원회에는 각계 명사 3000여명의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정치인도 아니고 일반 문화계 인사로서 이런 규모는 당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드물지 않을까 여겨지는 전무후무한 사례일 것이다.
대통령, 정부수반, 국회의장, 국회의원을 지냈거나 지낸 정치계 인사는 물론이고 중진 중량급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망라되어있다. 지금 마산에서 노산의 행적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이 의식에 참여한 인사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바가 클 것이다. 또한 이 인물들을 보며 노산 선생을 잘 아는 척 하는 사람들도 새삼 노산을 평생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리라 본다,
사람의 일생을 평가할 때 ‘관 뚜껑을 닫아보아야 그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하는 속설에 대한 이해이다. 노산 선생의 위대함이 어느 정도인지 이 장의위원회의 규모가 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산 선생을 잘 못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우리는 우리다’라고 건방진 항변을 할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을 행적을 물고 늘어지는 후배 검사들에게 한 말이 떠오른다. “이러면 막 나가자는 거지요?” 이 경우와 노산 선생의 경우는 단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도 답답해서 해 보는 소리다. 막 나가는 세상이 정상적일 수 없지 않은가?
노산 이은상 선생 사회장
때; 1982.9.12. 오전 11시
곳; 국립현충원
안장식
때; 1982.9.22. 오후 1시
곳; 국립묘지 제1국가유공자 묘역
노산 이은상 선생 사회장 영결식/ 차례
개식; 사회
국가에 대한 경례; 일동
고인에 대한 묵념; 일동
식사; 장례위원장 백낙준
행적낭독; 집행위원장 송지영
종교의식; 목사 김창인
조사; 원호처 처장 이종호
광복회 고문 유석현
예술원 원장 김동리
조시낭독; 김해성 지음
생전의 말씀; 녹음
남기신 노래; 가고파 엄정행
분향 및 헌화; 장례위원장
유족
각계 대표
폐식; 사회
노산 이은상 선생 사회장 안장식/차례
개식; 사회
고인에 대한 경례; 사회
종교의식; 김창인 목사
하관
허토; 유족, 장례위원장, 각계 대표 순서
축도; 김창인 목사
조총 및 묵념;
유가족 인사;
폐식; 사회
노산 이은상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
명단(가나다 순)
고문; 김상길 김상협 김수환 김용완 김종철 나용균 박순천 유석현 유창순 유치송 유대흥 유호준 윤보선 윤치영 이성철 이숙종 이영복 이원순 이응준 이재서 이재형 이희승 정래혁 최규남 최규하 한경직 허정(27명)
지도위원; 강신명 강신호 강원명 강원용 고정훈 곽종원 권익현 김갑순 김국주 김규벽 김두찬 김상문 김석원 김선기 김성배 김성진 김신 김연준 김은하 김의택 김일환 김재호 김주홍 김준 김준성 김준엽 김택현 노기남 노복선 노신영 노태우 류근호 류기정 류제한 류한열 류홍 모기윤 문태갑 민경중 박기성 박시찬 박영준 방우영 손인실 송성찬 송순영 신병현 신영균 신인우 신철균 신태환 안목단 안세희 안호상 오재경 원흥균 유형진 유흥수 윤길중 윤일선 윤성민 이강훈 이강희 이관구 이동욱 이병도 이선근 이선기 이종호 이진희 이흥경 임대흥 장강재 장세형 장이욱 장총명 정수창 정영삼 정의숙 정인섭 정인승 정재각 정창신 조경철 조영식 조일문 조향록 주영하 차낙훈 채문식 천관우 최창규 최태섭 태완선 함석헌 허채경 홍승면 홍종인 홍진기 황수영 황진경(108명)
장례위원장; 백낙준
부위원장; 김동리 한춘생 오범수 정주영 최석채 허웅
집행위원장; 송지영
부위원장; 구자경 김대환 김선홍 김성배 김재수 신호열 윤재욱 이병희 이종찬 임창욱
총무위원장; 권영창
차장; 박대희
위원; 나경덕 안광욱 이종순 이주상 이우종 유욱형 유운상 허찬종
의전위원장; 강주진
차장; 김형승
위원; 권덕상 방임섭 염낙원 유예영 이상보 정재도 장사홍 최병준
재무위원장; 강계중
차장; 최상호
위원; 김갑석 김계곤 박윤석 배삼진 이구현 이기화 조두현
홍보위원장; 이원홍
차장; 김해성
위원; 김석득 김용채 박영출 박용직 박종국 배호원 장철
경비위원장; 이해구
차장; 서정복
위원; 김인식 배석규 손경석 이규성 이응호 이천흥 황우금
치산위원장; 이주호
차장; 김백규
위원; 김정태 김태진 박은석 백인기 선우기성 신수범 이문욱 황희영
장례위원
강경섭 강광식 강남희 강대길 강대진 강덕상 강명규 강명옥 등(2476명)
(이하 생략)
8. 결론
이번 세미나에서는 노산 선생이 남긴 업적을 통하여 이 분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제대로 살펴보는데 초점을 두었다. 앞의 서두에서 밝혔지만 노산 선생이 돌아가신 지가 근 반세기가 가까워오다 보니 세대교체가 되면서 그 뒤의 세대는 자연히 노산 선생과 단절되는 상황을 맡게 되고 따라서 노산이 남긴 뛰어난 업적 또한 제대로 인식 못하고 방치돼 가는 안타까운 상황을 맡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의 빛나는 많은 애창 가곡 ‘가고파’등이 계속 불러져 전국적인 사랑을 받듯이 그의 방대한 업적 또한, 특히 그의 고향 마산에서 먼저 사랑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원고에서 제시한 많은 목록 등을 보면 그가 남긴 문학작품과 역사와 국문학 연구 업적이 얼마나 방대한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업적은 마산의 문화 보물로 기림을 받는 상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산의 고향 마산에는 이상하게 노산을 헐뜯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숫자로 보면 얼마 되지 않아 보이나 이들의 방해가 있는 이상 노산이 고향에서 안정적으로 사랑을 받는 일이 순조로울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줄곧 노산 선생을 문제 삼는 이곳의 반 노산 사람들에게 그들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에 해명하는 데 진력해 왔다. 그들이 315를 폄하했다고 한 부문에 대해서는 여러 증거로서 해명하였다. 이번 ‘마산가고파국화 축제’의 ‘가고파’ 넣는 문제에서 보듯이 그들은 그동안 필자가 해명한 부분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종전의 고집을 계속 유지하는 편협한 태도를 보였다. 노산 선생이 언급한 부분 즉 315당시는 ‘의거’로 개념정리가 되기 전의 ‘마산사건’이므로 ‘불상사’로 한 것으로, ‘315의거를 폄하’한 것이 아니라고 당시 그들이 제시한 64년 전의 조선일보 1960년 4월 15일자 신문의 설문 전체내용을 다 제시하며 진실을 설명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그 사실을 무시하는 청맹과니 행동으로 노산 선생 헐뜯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언젠가는 위대한 이 고향 선배에 대해 지나쳤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협조하는 날이 오리라 여기며, 노산 선생이 고향에서 사랑받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이 원고에서 사용한 자료는 <민족시인 노산의 문학과 인간>(1982) <노산시조론-김복근>(2008) <한국시대사전>(1988) <마산시사> <마산교육사> 등에서 참조, 인용하였음)
오하룡 소개
1975년 시집 모향(母鄕)으로 등단하였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지도위원, 한국농민문학회 자문위원, 한국작가회의, 한국아동문학인협회, 경남시인협회, 경남문인협회, 경남작가회의 회원, 경남아동문학회 마산문인협회 고문, 남하이승규노산이은상기념사업회 이사. 저서는 1975년 시집 모향(母鄕) 간행 (춘추각)을 시작하여 2022년 동시집 <아이와 할아버지>(도서출판 경남)까지 14권의 저서를 펴냈다. 마산시문화상(마산시), 경상남도문화상(경상남도),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상(한국현대시인협회), 경남시문학상(경남시인협회) 등 다수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