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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순교자 성월에...
* 글, 그림 : 임 프란치스코(의준) 신부님
(서울교구 직장사목부 담당)
“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는가… ? ”
이 질문에 몸을 바쳐 답을 주었던 순교자들...
“ 이 시대에 신은 어디 있는가… ? ”
이 질문에 나는 답을 줄 수 있을까...
내 자신에게...
신자들에게...
이 시대에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 로마서 8. 3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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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종의 칙서 >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 제10부 -
글 : 교종 프란치스코
하느님의 종들의 종, 로마 주교 프란치스코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이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빕니다.
21.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경험은 자비가 정의를 뛰어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이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는 유다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붕괴 직전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선조들의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불충한 이들을 배척하시려 한다는 것이 타당해 보일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으므로 그에 따른 형벌, 곧 유배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가 바로 그들의 임금이 되리니 그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마다하였기 때문이다.”(호세 11,5)라고 예언자가 전한 말씀이 이를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질책 바로 다음에, 예언자는 어조를 완전히 바꾸신 하느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입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8-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치 이 예언자의 말씀에 주석을 다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보다 분노를 참으시는 일이 더욱 쉬우셨습니다.” 13) 바로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시이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입니다.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의만을 요구할 때 결국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십니다. 그렇다고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더 큰 차원 안에 두시고 이를 뛰어넘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정의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체험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나무랐던 당대 유다인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사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10,3-4). 하느님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총으로 모두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와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2. 희년에는 대사도 수여됩니다. 자비의 성년에 대사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죄를 없애 주시는 당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힘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와 교회의 중개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여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고 또한 늘 새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끊임없이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죄를 저지릅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죄의 무게를 무겁게 느낍니다(마태 5,48 참조). 우리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총의 힘을 느끼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죄의 힘도 느낍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지만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로 그에 맞갖은 삶을 살지 못합니다. 고해성사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며 그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십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강하십니다. 그 자비가 하느님 아버지의 대사가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통하여 이미 용서받은 죄인에게 다가가시어 죄의 결과로 남은 모든 것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시어,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고 자비롭게 행동하며 사랑을 키울 수 있게 해 줍니다.
교회는 성인의 통공으로 살아갑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인 이 통공은 우리를 성인들과 복자들과 영적인 결합을 이루게 합니다(묵시 7,4 참조). 성인과 복자들의 거룩함은 우리의 나약함에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교회가 기도와 삶으로 거룩한 이들이 나약한 이들을 도울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년의 대사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믿는 이의 삶 전체에까지 이른다는 확신으로 우리가 당신의 자비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사는 교회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구원의 열매를 모든 이에게 전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희년을 충실히 살아가며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당신의 자비로운 대사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 10월호에 제11부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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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9월의 하늘 아래에서...
( 무상(無常)의 길에서... )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신부>
우리는 생(生)의 길을 가다가 찬미와 감사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맞기도 한다.
어느 시절에는 기쁨과 고마움, 어느 계절에는 슬픔과 눈물로 힘겨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어서 혼돈과 아픔으로 밤을 지세우기도 한다.
어느 때는 빛과 희망의 시간들, 어느 날은 어둠과 절망의 순간들이 우리네 삶을 차지하거나 비춘다.
마음과 영혼은 방황을 하고, 하늘을 우러른 채 홀로 눈물을 짓기도 한다.
다 새우지 못하고, 다 태우지 않은 인간과 인생의 미완성 길이기에 ...
우리는 살아가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을 만나며 행복하거나 불행하기도 한다.
기뻐하거나 슬퍼하기도 한다.
지금은 지금은 슬픔과 아픔의 노래를 부르는 시절, 어둠과 절망의 노래를 부르는 계절...
무례(無禮)한 힘의 폭력이 푸르른 풀밭위에 머물고, 다가온 무지(無智)의 어둠은 고요한 영혼들의 호수에 풍랑을 일게 한다.
지금껏 도우며 노를 젓던 그 활기찬 손목들은 힘을 잃고, 푸르러 오는 9월의 하늘을
슬픔으로 우러른다.
지금은 지금은 혼돈과 방황의 시절, 슬픔과 아픔의 계절, 고독과 애련의 시간...
살아온 작은 날들의 어둠은 지금만이 아니었고, 머물러 온 작은 인생의 시련은 어제와 오늘의 일들만은 아닌데...
나는 오늘 여기에서 9월이 온 하늘을 우러르며, 우리들 인간의 삶과 무상(無常)함을 바라보며 아픈 이 가을의 노래를 부른다.
시편의 시인은 노래했는데...
‘ 우리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바람 한번 스치고 지나가면 모든 것들은 다 쓰러지고 마는 것을... ’
‘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인데,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뿐인 것을, 우리들 인생의 날 수를 셀 줄 알게 하소서... ’
손길들의 무례(無禮)함은 지금과 오늘이 모든 것이고, 주어진 날들이 영원인 듯, 무존중(無尊重), 무인격(無人格)으로 다가와 9월의 노래를 아프게 한다.
어제와 오늘은 찬탈(簒奪)과 비애(悲哀)다. 어둠과 혼돈(混沌)이다. 절망(絶望)과 슬픔이다.
무상(無常)한 생의 길이여, 슬픈 인간 삶의 노래여, 아픈 시절의 고독(孤獨)이여...
우리네 삶이 그러할지라도, 우리네 생애가 그러하다 해도,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인간 무상의 노래를 부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사람들로서 복음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데...
‘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하느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
오, 주여 !
미움이 오더라도 미움을 살지 않게 하소서.
사랑의 혼돈이 오더라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모든 것 다 비우고 내어준 채 자신을 십자가에 바치신 당신을 우러르며,
지금껏 쌓아오던 모든 이와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가고 소멸(燒滅)해 가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을 우러르고,
십자가에서 나신(裸身)으로 매달린 채,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시던 당신을 묵상하며 그렇게 우리들 자아와 자신들도 다 살라 봉헌할 수 있게 하소서.
다 바쳐 기도할 수 있게 하소서.
지극히 작은 우리 인간의 생애, 참으로 조촐한 우리 인간의 삶들...
당신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면 그렇게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
당신을 따라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당신 무덤가에서, 새롭게 부활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작은 생애가 삶으로써 죽고 죽음으로써 사는,
영원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영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우리들 작은 생(生)의 이 무상(無常)한 길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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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2016. 9. 4
루카 14, 25~33
♠ 복음 공부
-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예수님의 수난과 구원의 여정에서 그분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단순한 호기심이나 군중심리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시키신다. (25절)
<참된 제자가 되는 길>
* 26~27절 : 예수님에게 가는 것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누구나 예외 없이 일차적으로 가족의 유대와 혈육의 관계를 끊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다룬다. 교부들은 모든 관계에 사랑이 우선순위가 있는데 친족보다는 선에 더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히에로니무스.에피데투스) 예수님은 부모 공경을 강조하셨지만 (마르7.10-12;10.19),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뜻과 추종을 더 소중히 여기셨다. (9.57-62:11.27-28;12.51-53)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마땅히 가족의 의무를 다해야하지만, 넓은 의미로 인간관계와 세속적인 모든 일에 너무 집착해서 그보다 더 높은 의무인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해야한다고 한다. ‘미워하다’의 원 단어는 ‘miseo’ 로 ‘덜 사랑하다. 버리다’라는 단어로 이탈. 단절. 초월 등을 뜻하는 말로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의 이탈과 자유’ 를 얻기 위하여 개인의 염려에 매이지 않도록 가르치시며,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미 9.23에서 이 가르치심을 하셨는데, 예루살렘에서의 순난을 향한 여정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길을 따를 것을 강조하신다. 따름을 거절했을 때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며, 구경꾼으로서 따라가는 것이다.
* 28~32절 : 십자가의 험난한 길을 택하여 끝까지 이 좁은 문을 걸을 수 있는지 먼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뜻에서 탑(망대)과 전쟁의 이중비유를 하면서 훈계하신다. 이것은 오직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특수 자료로 잠언 24.3-6을 참조하여 두 비유를 연결시켜 집을 지혜롭게 건축하는 것과 전쟁을 현명하게 치를 수 있는 자원과 군사력이 충분한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 일을 벌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을 뜻한다.
* 33절 : 결론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라고 말씀하시는데,
버려야 할 것은 26-27에서 언급된 가정, 가족, 그리고 생활의 안정이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생명이다. 특히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재물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제자들의 경우 재물 포기를 강조한다. 사도들과 치명자들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본보기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을 따르는 봉헌자나 사제, 올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한 길은 가족, 혈연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이며 개인사의 염려에도 메이는 일 않도록 (예를 들어 수입, 성공, 인정 등) 자기 목숨이 아버지의 손안에 있음을 알아채고, 현재와 미래를 아버지께 맡기고 의탁하면서 신뢰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며, 탑 건축자와 전쟁을 계획하는 임금의 비유를 수집해 그만큼 희생과 헌신을 다해 계획하여, 신앙인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식별하고 실제로 자신이나 가족, 친구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인간관계나 소유물, 자신의 욕망에 메이지 않은 초탈을 이룰 수 있도록 26절과 33절을 연결시켜 따르는 자세로 자기포기와 희생을 통한 자유를 선택한다.
♠ 대화 방향 : ① 세례를 받아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신앙인 그리고 FB로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의 나의 결단은 무엇이며, 이를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동의나 협력 없이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이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에게서 내려놓지 못한 갈등, 즉 내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무엇인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불리운 그리스도인, FB로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② 각자의 생활은 구원을 향한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근래에 겪는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참고 문헌 : ▪ 신약성경 주해 루카복음 (바오로의딸.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계획 유충희 지음)
▪ 루가복음 주해서 (성서못자리 연구소 안병철 신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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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
2016. 9. 11
루카 15, 1~32
♠ 복음 공부
-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이야기 셋 -
* 1~3절 : 상황묘사 - 루카복음 5.29-30을 옮긴 것으로,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며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 그런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자 말씀하신다.
* 4~10절 : 잃어버린 양의 비유(4-7), 되찾은 은전의 비유(8-10) - 이 두 비유는 구조와 내용, 문체와 낱말이 유사한 점에서 예수어록을 인용했을 것이며 똑같은 결론을 맺고 있다. 즉, ‘잃음과 찾음’ - ’되찾음과 기쁨’ - ’하느님의 기쁨’ 순으로 되어 있다. ‘잃은 양과’ ‘은전’은 ‘죄인’, ‘되찾은 것은’ 회개를 담고 있는데, ‘잃은 양’과 ‘은전’ 때문이 아니고 잃은 것을 찾고자하는 목자와 부인의 열성 때문이다. 이는 목자가 회개하여 돌아오는 양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할 양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즉,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잃은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고, 죄인이 회개했을 때의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신다는 것이다.
* 11~24절 :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 신약성경에 나오는 비유 중에 가장 길고 감동적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루카 복음에 만 나오는 특수사료에서 옮겨온 것으로 집을 뛰쳐나갔다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반기는 모습을 강조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유산)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나 이방인 지역에서 방탕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설상가상 심한 기근으로 곤궁에 처하게 되어 돼지를 치면서 돼지 먹이로라도 굶주림을 채운다. 더 큰 이상과 자유를 찾아 먼 고장으로 떠나왔지만 레위기 11.7에 의하면, 부정한 동물인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가까이하면 불결해지는 그 동물과 접촉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 율법을 어긴 죄인, 자신의 전통 종교를 배반했고 불효자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배고픔과 외로움뿐이다. 이런 소외현상이 자신을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자 정신이 들자 자신의 행동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가 되었음을깨닫고 돌아갈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겨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예레31.18-20을 반영한다. 몸은 멀리 있어도 시선은 항상 아들을 향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멀리서 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다. 19절에 했던 독백을 아버지 앞에서 고백한다. 그러나 아들이 고백하기 전에 아버지는 이미 죄를 용서하고 종들에게 좋은 옷을 가져오게 하여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어 아들의 신분과 권리를 천명하고 한 공동체로서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베풀게 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느님을 가리키고 그분은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언제나 기다리며 돌아올 때 기쁘게 맞으신다.
* 25~32절 : 큰아들이 등장한다. 29-30절에 나오는 큰 아들의 항변은 18.11-12에 있는 바리사이의 기도문과 흡사하다. 아버지의 처사에 불평하는 큰아들은 선하고 충실한 백성, 율법에 머무르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돌아온 아들은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계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잘못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자 이들도 하느님의 자녀들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 복음 요약 : 회개에 대한 두 비유는 회개에로 초대하는 자, 즉 회개에로 이끌려 가는 자에게 초점을 두고 이에 비해서 독선에 빠진 바리사이들에게 두 아들을 가진 사람 이야기를 할 때 죄인임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능동적인 회심을 촉구하고 있다. 자비에 대한 세 가지 비유는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과 회개가’ 주제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시려는 본성이 드러남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이 비유들 안에서 복음과 우리 신앙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우리 신앙인의 삶의 궁극목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 대화 방향 : ① 큰아들은 바리사이와 같은 사람이다. 어느 점에서 그렇게 보입니까? 아니면 나는 큰아들과 작은아들 중 누가 죄인이며 누가 의인이라 생각되는지 나누어 보세요.
② 자비의 대희년 마감의 문턱에서 내 자신이나 공동체가 자비를 실천하는 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었는지? 를 함께 나누어봅시다.
♠ 참고 문헌 : ▪ 성경주해 루카복음 (바오로딸출판사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계획 유충희 지음)
▪ 복음서 발견하기 (마가릿 누팅 랄프 지음 임숙희 옮김 바오로의딸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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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16. 9. 18
자♠ 복음 공부
* 23절 :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분 가르침에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따른다는 것이다. 둘째로 스스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직접 십자가를 지셨듯이 그분을 따라야한다. 셋째로 자신을 버리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믿음이 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만으로는 부족하며 매일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안에서 일어나야한다.
* 24~26절 :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얻음이다. 주님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 될지 모른다.’ 고 하셨다. 그분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교우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럼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 복음 요약 : 과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집착과 욕구, 이기심, 걱정 등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까지 비워야한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님은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유한한 인간이지만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제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새롭게 시도하라는 희망 메시지로 볼 수 있다
♠ 대화 방향 : ① 내가 세상에서 배워, 옳다고 믿었기에 이를 상대방에게 강요한 적이 없는지?
② 나의 지나친 확신 때문에 상대방이 받을 상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오늘 주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는 성서형제회 공동체 안에서 무엇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나눠봅시다.
♠ 참고 문헌 : ▪ 루카 복음 주해서 ▪ 여정 - 루카 복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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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2016. 9. 25
루카 16, 19~31
♠ 복음 공부
* 19절 : 이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의 의복은 자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이었다. 자색 옷은 당시에 왕이나 귀족들만 입던 비싼 옷이었으며, 고운 아마포 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비싼 옷이었다.
* 20~21절 : ‘라자로’는 ‘하느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그가 비록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기는 하지만 그가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 은총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라자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불구자였으며, 또한 피부병 환자였다. 라자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고 살았다. 유대인의 경우 일단 그릇에서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은 먹지 않았고, 다시 접 시에 담지도 않았다. 이것은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생긴 습관이다. ‘떨어지는 것’은 부자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 먹고, 남아서 버린 찌꺼기를 의미한다. 리자로는 움직일 수 없어서 개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핥기도 했다. 여기서 언급된 ‘개’는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가 아니라,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사나운 들개이다.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다고 하는 것은 라자로가 ‘개’에게 조차 천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22~24절 : 그 부자는 세사에서 영광을 누렸지만,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부자는 연약한 자들을 멸시하던 유대 종교지도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라자로는 세리와 죄인들처럼 영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던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품이란 의로운 영혼들이 평화롭게 머무르고 있던 곳, 낙원을 의미하며, 악인의 처소로는 불로 고통을 당하는 곳, 지옥을 의미한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중재하면 지옥에서 까지도 자신들이 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 25~31절 : 부자는 탐욕과 이기심과 허영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지 않았다. 부자는 재물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살지도 않았으며, 또 영원한 생명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부자는 지옥에서 라자로는 낙원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그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 놓여서 서로 왕래할 수 없다. 26절에서 큰 구렁은 ‘벌어진 틈’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큰 구렁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 서로 왕래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한 번 죽고 나면 영원히 회개의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 후에 떨어진 장소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다. 자신은 기왕 버린 몸이지만 제 형제들이나마 죽기 전에 회개하기를 부자는 바라고 있다. 그래서 부자는 라자로의 부활 같은 엄청난 기적을 보면 자신의 형제들이 회개할 가망성이 있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부자의 요청을 거절한다. 회개를 촉구하는 성경 말씀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설사 죽은 사람이 부활할지라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답한다.
♠ 복음 요약 : 이 복음은 부자들과 처참할 정도로 가난에 찌든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격차를 다루고 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의식주, 교통수단, 의료혜택, 위락 등에서 부자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살게 만드는 치명적인 역할을 한다. 부자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갈라놓고 있는 높은 담은 그가 죽은 후에 아무도 어쩔 수 없는 심연으로 된다.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사람들 각자는 영리하게 하느님을 섬겨 영원한 생명을 얻거나, 미련하게 돈을 섬겨 영원히 망하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 대화 방향 : ➀ 우리 공동체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➁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자기 품 안에 받아들이는가, 혹 자기와 그들 사이에 그들 사이에 심연을 파고 있는가?
➂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말씀에 어떻게 순종하고 있는가?
♠ 참고 문헌 : ▪ 주석 신약성경 <성요셉 출판사> ▪ 루카복음 읽기 <성바오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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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묵상 나눔 >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권 토마 (순)
< 연중23주일 (루카 14,25~33) >
나는 성서공부를 통해 너무나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나의 십자가를 벗겨달라고만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항상 하느님께 나의 십자가를 벗겨주지 않는다고, 나에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주신다고 원망만 많이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요구하시고 또 내가 견딜 만큼의 십자가를 지워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어렵고 힘들었다고 느끼는 십자가도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면, 그것은 역시 내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십자가였음을 깨닫게 되고, 정말 내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질 수 있는 그런 마음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도 느끼게 된다. 진정 나에게 다가오는 아픔과 어려움의 십자가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길 기도한다. †
< 연중24주일 (루카 15,1~10) >
제멋대로 집을 뛰쳐나갔던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특히 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살면서 정말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많이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지켜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알게 모르게 죄도 많이 짓고 더 나아가 그 죄들을 합리화시키는데도 점점 익숙해져 갑니다. 어느 순간 나의 이런 모습을 느낄 땐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과 나의 죄를 외면하고 그냥 은근슬쩍 지나쳐 버리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아들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하기 위해 아버지에게로 발길을 돌려 스스로 찾아갑니다. 이것을 보며 정말 나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죄를 합리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외면하고 모른 체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반성하고 그것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태도 말이지요. 그랬을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너그럽게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죄를 추궁하기보다 오히려 성대한 잔치를 벌인 탕자의 아버지처럼 말이지요. †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대축일 (루카 9,23-26) >
이제 겨우 4반세기를 조금 넘게 살아왔지만 그 동안의 삶에서도 ‘그래, 이게 내 십자가지’라고 생각했던 몇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 파장이 짐작만으로 가능한 그런 중요한 결정이 하나둘 다가오고 그에 따라 내가 감수해야하는 나의 십자가는 점점 더 크고 무거워서 외면하고 싶은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른들이, 어떤 규범이 제시하는 식으로 그냥 따라갈 수만은 없는, 내 스스로의 결단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는 사실, 이런 것을 겪으면서 나도 온전한 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겠지만 아직 어린아이로 남고 싶은 저에게는 너무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들이지만 어떤 자매가 들려준 말이 용기를 갖게 하네요.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예수님이 함께 그 짐을 지어주신다는 사실이요. †
< 연중26주일 (루카 16,19~31) >
오늘 루카복음에 나온 것처럼, 부자는 이 세상에서만 행복한 사람이고, 이 세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하느님나라와 함께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부자였던 그 사람의 삶은 힘겹고 불행한 것이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말씀은, 부자로 등장한 이름이 없는 사람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었던 라자로의 삶을 비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라자로가 남긴 삶의 본보기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현실의 삶과 연결된 새롭게 시작된 세상에서 힘들고 고생을 하는 사람으로 나오고, 아무런 본보기도 남기지 않은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는다는 소리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도대체, 세상에 사는 신앙인들이 어떤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느님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하느님은 세상의 부자를 멸시하거나 미워하는 신(神)’이며, ‘가난한 사람이라면 이유도 없이 무조건 좋아하는 신(神)’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그렇게 하는 생각은 세상의 구조와도 맞지 않으며 우리가 가난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할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인의 길을 떠나게 하거나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복음말씀을 듣고, 우리는 우리에게 생긴 재산과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야 한다고 권고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 참고 도서 : 보득솔, Good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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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큰모임 스케치 >
뜨거운 태양처럼 절실했던 FB 연수회를 정리하면서...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서기보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
수류 성당 입구에서 모인 우리는 전주공동체에서 준비해온 공동식사로 시작됩니다.
성당은 이미 교구 내에서 오신 학생들의 여름수련회롤 차여있었기에 저희들은 성당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사무실 앞에 자리를 깔아놓고 식사를 했었습니다.
1~2가지인 찬에서 밥과 시원한 국을 같이하였지요.
교육회관에 올라가서 보니, 아직도 앞서 하셨던 다른 성당의 주일학교의 수련회 짐이 빠지지 않아서, 우리는 숙소2층의 임시 거처에서 묵주5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봉사자인 보나벤뚜라, 효주아녜스, 세실리아, 아폴로니아 자매님 등의 개인묵상의 형식으로 희망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다시 강당으로 내려온 우리는 3시 자비의 기도를 바치고, 4시에 성거산에서 오신 신부님의 주례로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 후에 정 아퀼레오(지풍) 신부님의 강의를 1,2차에 나누어서 듣게 됩니다.
창설자 신부님이 온 힘을 다해서 쓰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삶' 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이 부분 강의 시 너무 피곤해서 졸면서 들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복기하기가 어려운 부문이 있습니다. 제가 일주일 정도 자료를 보면서 그 내용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고,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서 올리려고 하오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첫날은 미사 후에 미리 준비해둔 성체를 임시 성체조배실에 이동해두었습니다. 신부님 강의 중에서 몇몇 분이 성체조배실을 지켰으며, 그 이후 전체 성배조배이후 성체조배실은 그 다음날 오전 5시까지 몇 분이 성체조배실에 남아있어서 지켜졌습니다.
신부님 일정 관계로 아침 5시30분에 아침기도를 드리고 6시에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 이후 단체사진 촬영과 조식, 그리고 간단한 파견식을 가졌습니다. 미사 중에 당산동의 이 효주아녜스 자매님의 선서와 수많은 사람들이 선서갱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인사 시 적지 않는 사람들의 사랑의 눈물들이 보였습니다. 선서갱신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인 필자의 손에 선서갱신문 안에는 이런 글이 들어 있었다. 매일 성경묵상, 로사리오기도, 세운 결심 충실히 실천하기, 자신의 모범적인 생활로써 본회의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하기... 등 등
이 글을 보면서 너는 과연 최선을 다하였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데레시아 수녀님의 강의가 이어졌고, 창세기 3장 아담이 숨어있는 장면을 말씀하시면서 잘못임을 깨닫고 회심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양심성찰’ 특별히 예수회에서 하는 ‘의식성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정신에 대해서도 미리 준비된 원고에 의하시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를 표현하기가 퍽 어려움으로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다시 수녀님으로부터 확인을 받아 다시 올려볼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중식을 사이에 두고 1, 2차 코이노니아를 5개조로 나누어서 했습니다. 처음에는 코이노니아의 실제적인 나눔을 하였고, 두 번째는 코이노니아 활성화에 대해서 나눈 다음에 전체가 다시모인 자리에 대표자가 발표를 하였습니다.
3시에 자비기도를 마친 우리는 열성적인 몇 분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마당에서 파견식을 하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글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를 생각했는데, 그중 한 가지를 말한다면 헌장전문 중 '성경을 충실히 연구하고 실천하고' 이었습니다. 몇몇 평신도 지도자들 중에서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시는 분도 계시고, 제가 알기로는 전주교구 내에서도 성경 주제발표 등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는 분이 계시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신자들은 복음말씀풀이 조차 미사 때에나 아니면 피정지에서 말씀사도직을 가지신 사제나 수도자에 크게 의존하기에 이에 대한 다소의 거부감으로 코이노니아에 영향을 미친것입니다. 제가 지금 보는 생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나 성서, 그리고 조선교회사를 볼 때에 우리는 성경에 해박한 지식으로 출발하지 않았음을 분명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소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가 있지만, 200년 이전에 조선에 천주교회가 전달될 때에 중국에 가신 조선 양반들이 가져온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리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교회의 가르침을 적은 책들이었습니다.
이에 반면 개신교회에 100여 년 전에 북한 평양 대동강을 통해 들어왔을 때 그 배에 가득 실은 것은 성경책이었습니다. 성경이 적힌 서양종이가 한지보다 훨씬 좋게 보였나봅니다. 그래서 강물에 떠다니는 책들을 모아서 이를 말려서 집 벽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워서 여기저기 읽어보다가 한 청년이 이를 믿게 되고 해서 신앙이 퍼졌다고 합니다.
200여 년 전에 조선에 천주교회가 들어왔을 때에 이를 가르쳐줄 사제가 없었습니다. 초기 중국인 주문모신부님이 들어오셨지만, 박해 중이었고 해서 전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가 힘들었지요. 그리고 더구나 우리나라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사제가 되셔서 조선에 들어올 때까지 조선은 사제가 전혀 없는 시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성사를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특히 여성회장을 중심으로 조선은 양반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교우들이 늘어갔고,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 안에 녹아내리는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박해지에서 발견되는 것은 성경책이 아니고 묵주였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
조선시대에 들어오신 외국 선교사들이 시골마을을 둘러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은 이미 공동체를 갖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조선인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지만, 한마을 한공동체로 살아갔기에 그들의 삶이 교회의 삶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에서 그 처참한 박해시대에서도 전국의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 주님께서 미리 마련하셨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여기서 저의 얄팍한 지식이 동원됩니다. 성경을 온통 다 이해하고 주장하는 신학자보다 성경 한 줄을 보고 감화되어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런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간절함'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간절함으로 바라본다면 다 해결되리라 여깁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하거나 부족하게 가진 이들, 즉 가난한 이들의 간절함이 가장 클 것이고, 이들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 여깁니다.
시골어른이 하신 말씀이 갑작이 떠오릅니다...
'시장이 반찬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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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I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6년 7월 입출금 및 <FB 연수회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