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5)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知皇帝之貴
황제가 귀하다는 것을 알겠구나.
열흘 뒤로 전국적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300명이나 되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될 것이다. 이들은 이 자리에 올라가려고 많은 말을 하면서 유권자들, 국민에게 약속한다. 자기를 뽑아 주면 지금까지 내려왔던 고쳐야 할 부분을 고쳐 주겠다고.
사람들은 고쳐 준다는 것을 좋아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혁신(革新)’이니 ‘개혁(改革)’이니 하는 말을 앞에 내세우는 사람이 유독 많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적마다 그것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한다. 고쳐 줄 수 없는 것을 고쳐 주겠다는 하는 것과 고칠 마음이 없으면서 고치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세상과 백성을 현혹하여 속이는 혹세무민이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이러한 혹세무민이 많았다. 내가 어릴 때 경험하였던 것 가운데 잊히지 않는 것이 있는데, 6.25 전란에 3개월 동안 북한 치하에서 살 때였다. 그때 공산당 선전원이 어린아이들을 모아 놓고 공산당의 ‘똑같이 잘 사는 세상’ 이야기를 한 일이 있는데, 이제 와서 북한 사회의 엄청난 격차와 차별을 보면서 그때 선전원의 그 ‘혁명적인 말’이 어린 나를 얼마나 속이려 했음을 감지하게 된다.
자치통감 가운데 있는 가장 혁신적인 구호(口號)를 꼽으라면 어떤 것일까? 나는 진(秦) 말기에 진에 최초로 반기(反旗)를 들었던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말을 꼽겠다. 그들은 진(秦)의 하급 관료로 강남지역에서 장정(壯丁)을 인솔하여 북쪽의 전방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비를 만나서 며칠 움직일 수 없는 바람에 도착기일에 맞출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고생을 하면서 목적지에 가 보아도 벌을 받기는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반기를 드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기가 인솔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제 고생을 하면서 목적지에 가도 기한을 어겼으니 벌을 받게 되었다. 차라리 여기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상(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성공하면 장상이 될 수 있다.’라고 사람들을 부추겼다. 이 말에 장정들은 동의하였고 진(秦) 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그 후 진승과 오광은 망하기는 했지만, 이 말이 도화선(導火線)이 되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평민 출신 유방(劉邦)이 한(漢)왕조를 일으켰다.
역사상 유방이 한(漢)을 건국한 것만큼 혁신적인 사건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한(漢)이 건국되지 전까지의 사회는 귀족(貴族) 출신이 아니면 제왕(帝王)이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시대였다. 진(秦)도 주(周)의 제후국(諸侯國) 가운데 하나였으니 말할 것도 없이 귀족출신이 지배하는 나라였는데, 평민인 유방이 황제가 되었으니 아주 큰 변화와 혁신의 사건이다.
사실 유방과 끝까지 자웅(雌雄)을 다투었던 항우(項羽)도 초(楚)지역 장군 집안 출신이었는데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황제가 되었으니 분명히 평민도 귀족을 이기고 황제가 될 수 있는 시대임을 증명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진승과 오광이 엄청난 혁신의 구호(口號)를 외친 사람이라면 유방은 엄청난 혁신을 완성한 사람이라 하겠다.
이렇게 혁신(革新), 혁명(革命)을 완성한 유방은 정말로 장상(將相)의 씨가 따로 없는 시대를 열었을까? 그러나 유방이 한(漢)의 고조(高祖)가 된 뒤로 황제는 당연히 유씨(劉氏)여만 된다고 하였다. 평민으로 황제가 되더니 안면 몰수하고 스스로 귀족이 된 것이다. 그 후 전후한 4백 년 동안 유씨만이 황제가 되었으니 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구호 속에서 탄생하였지만 반대로 유씨들 스스로 그 구호를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가 조비(曹丕)에게 나라를 헌상(獻上)하자 유비(劉備)는 천하는 유씨의 것인데 조씨(曹氏)가 황제가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촉한(蜀漢)을 세웠다. 유비는 이미 망해 버린 유씨 세상을 끝까지 지켜보고자 한 것이다. 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혁신(革新)적 구호가 나오고 4백년이 지난 뒤에도 훌륭하다고 칭송되는 유비조차 여전히 장상의 씨를 강조한 셈이니 역사를 400년 후퇴시키려 한 것이다.
사실 혁신(革新), 개혁(改革)은 말로는 쉬운데, 실천하기는 어렵다. 유방이 처음에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약속했을까? 유방이 처음 진(秦)의 도읍인 함양(咸陽)에 들어가서 그곳의 부로(父老)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진(秦)의 잔혹한 법을 다 없애고 약법(約法) 3장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경우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 경우를 제외하고 법을 다 없애겠다는 것이다. 정말로 혁신적 정책의 발표였다.
유방이 항우까지 제거하고 황제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귀족 같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군대 안에서의 장군과 부하정도의 관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으니 약속을 지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가 끝난 상황에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 도중에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술을 먹고 칼로 기둥을 치는 무엄한 행동을 보자 변하였다.
유방은 장병들의 이런 행동을 보면서 아주 싫어하였고 약법3장을 지키지도 못하고 차츰 자기가 없애버린 진(秦)의 법을 하나씩 둘씩 다시 적용하기 시작하였으니 진대(秦代)로의 회귀(回歸)였다. 그러더니 숙손통(叔孫通)을 통하여 진대(秦代)의 의식을 참고하고 적용하여 거창한 의례를 만들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유방은 하느님의 아들, 천자(天子)가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좋던지 숙손통에게 ‘이제야 황제가 귀하다는 것을 알겠다.’고 고백하였다. 진대로 돌아가면서 좋아한 것이다. 결국 장상의 씨가 없다는 혁신은 이루어지지 않고, 퇴영적인 조치를 하였으니, 앞에서 한 그의 말은 혹세무민이 되었다.
어떤 것을 주장하는 구호(口號)는 유방의 경우처럼 대체로 혹세무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선거에서도 많은 구호가 범람하고, 그 안에는 유권자를 현혹시켜 속이려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팸덤 정치에 매몰되어 특정집단이나 사람을 맹종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의 국회도 여전히 싸움질로 지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언론도 편을 들면서 엄정한 객관적 시각을 가지지 못하니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직 혹세무민의 구호를 구별해 내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유권자가 현명하면 유권자가 승리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구호로 유권자를 현혹시킨 후보자가 당선되면 그들은 곧바로 ‘국회의원이 귀하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면서 꺼떡거릴 것이고, 한국정치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도돌 이표가 될 것이다.
첫댓글 참으로 웃기는 제도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으니 통탄합니다. 비례대표제에 실형을 받은 사람이 버젓이 등장하여 판을 치고 있으니 비례대표제는 혹세무민하는 제도 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나라가 어찌 될런지 걱정입니다. 시의에 적절한 사론에 감사드립니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