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종교
어제는 종일 가을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쾌청한 하늘에 소슬바람과 함께 단풍이 무르익고 석류가 익어가는 전형적인 가을날씨다. 봄은 새싹을 움트게 하고 대지에 활력을 주지만 가을은 소슬바람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색의 계절인 것 같다.
읽지 않은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두 아이와 한번만이라도....” 시한부 아빠의 특별한 외출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조선일보 10월 17일)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암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어린 남매를 놀이동산에 한번 못 데리고 간 것이 가장 아쉽다”고 병동의 간호팀장 수녀님께 간곡한 부탁을 하여 수녀님의 주선으로 에버랜드에 가서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보내는 장면이 소개 되었다. 세 살, 두 살배기 아이들은 어려서 아빠가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고 아내는 별거 중이라 동행하지 않았다.
환자용 이동식 침대에 누워서 아이들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들을 향해 안간힘을 다해서 손을 흔드는 장면의 사진을 보니 가슴이 찡하다.
신문의 그 옆면에는 대선주자 세 분의 동정이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려 있다.
별도의 경전이나 어느 큰스님의 설법보다도, 나에게는 오늘 가을이 주는 계절의 정서와 함께 이 신문의 장면들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다시 보며 깊은 공부가 되고 있다.
‘한 사람은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두고 떠나야할 어린 자식들과 마지막 정을 나누고 있고, 또 다른 세 사람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다.
알고 보면 말기암 환자만 시한부 인생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시한부 인생들이다.
지금 열심히 뛰고 있는 대선후보들도 몇 십 년 후면 이 세상에 없을 사람들이다.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와서 어떻게 살다가 무엇을 남기고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야 잘 살고 가는 것일까?
죽음은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아무리 집착해도 형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고 오직 평생을 자기가 지어 놓은 무형의 업만 가지고 혼자 떠나는 긴 여행길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작가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란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는 평소에 사냥과 낚시로 살생을 즐겼던 사람이다. 그래서 인지 말년에 자신의 엽총으로 자살을 한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의 모습도 각자의 업에 따라 너무도 다양하다.
생전의 삶의 모습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도 서로 다른 것이다.
현세를 힘들고 고달프게 살았던 사람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간다고 한다.
집착이 덜한 사람이 죽음을 잘 수용하는 것 같다.
생과 사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멸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있지만 영혼은 육신과 함께 금방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애벌레가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나비라고 하듯이 육신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영혼은 다음 생을 찾아 훨훨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마지막 관문을 잘 통과하려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야 한다.
그러므로 이승의 삶을 마치고 돌아갈 때 마지막으로 입고 가는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귀중한 무엇을 줘도 잡지 못하고 손을 펴는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수 없고 다만 생시에 지어놓은 업만 가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생에 대한 집착과 물질의 소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승에서 맺은 인연에 대한 집착으로 죽음이란 마지막 관문을 가볍게 통과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순간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수행하는 목적은 성불이지만 수행의 정도에 따라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형태가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
최후의 이별은 자기가 이승에서 평생 동안 같이 했던 자기 육신과의 이별인 것이다.
평생을 입고 관리해 오던 육신이란 낡은 헌옷을 벗어 놓는 죽음이란 마지막 통과의례를 잘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마지막 관문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거운 삶의 무게 때문에 의지할 곳을 물색하다가 종교라는 것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화를 만들고 신을 창조해 내고 그 신에 의지하는 기막힌 방편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들이 인류 역사상 수없이 많고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신들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무거운 삶의 무게와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어딘가 의지하고 위안을 얻고자 해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원초적인 불안을 신앙을 통해 의지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보고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놓은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인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부처님의 가르침도 각자의 업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신심 있는 불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복 일변도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의식과 형식에 길들여져서 외통수가 되고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은 예고한 대로 종교에 대해서 공부해 보기로 한다.
나는 생사의 기로에서 실존적 의문으로 고뇌하다가 부처님을 만나서 회생의 길을 안내받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러주고 전하기 위해 자청해서 반야용선이라는 금강카페의 아름다운 도반님들을 위해 간식당번이 되어 영혼의 간식을 차려 올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간식 메뉴는 종교라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 간식은 우리만 먹을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같이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9월11일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와 외교관 세 명이 이슬람 무장 세력의 공격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마침 그날이 9월11일이다보니 9.11사건 11주년을 기해 기획된 테러라는 말도 있지만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한 편이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무슬림의 순진함’이란 정체불명의 영화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비하하며 동성애자나 아동성애자로 묘사했고 이 영화를 추천한 사람이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불태우겠다고 했던 미국의 테리존스 목사라는 소문 때문이다.
이것을 계기로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과 동남아의 몇몇 이슬람국가들이 반미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종교가 대립과 투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 간의 대립은 물론이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불편하고 심지어 부부, 형제, 부모 자식 간에도 종교로 인한 갈등과 불화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개인은 물론 국가나 민족 사이에 분쟁이나 전쟁의 불씨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같은 민족이었지만 종교가 달라지면서 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인간사의 갈등과 세상의 분쟁을 종교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종교 때문에 분쟁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자기가 믿는 하나의 신만 주장하는 유일신사상 때문이다.
인류의 상당수가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신 사상의 대표적인 종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인 것이다. 이들 유일신교는 오랜 세월동안 증오와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일신 사상의 성서들은 신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완벽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편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같은 성서를 읽고도 그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개신교도들은 불교사찰의 불상과 천주교의 마리아상을 보고 우상숭배라고도 한다.
어느 교회의 성도들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봉사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절의 마당에 있는 불상의 이마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는가 하면 제주도 원명선원의 경우는 작은 불상 750기의 목을 자르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는 단군상의 목을 자르기도 하고 다른 종교의 기물을 파괴하기도 하고 심지어 방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슬람교도가 꾸란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환자를 보살피고 있을 때 똑 같은 꾸란을 읽은 다른 이슬람교도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몸속에 폭약을 숨기고 인간폭탄이 되기도 하고 알 카에다 에 합류하여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성직자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같은 천주교의 신부이면서 아프리카에서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바친 이태석신부님이 있는가하면 제주도 강정마을에 가서 국가안보를 위해 건설해야하는 해군기지의 반대를 주장하며 데모를 하는 신부님도 있다.
지율스님께서는 천성산의 도룡뇽을 살려야 한다고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며 터널공사를 지연시켜서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기도 했다.
불교의 핵심은 어느 한곳에 치우치는 극단이 아니고 중도인 데도 많은 불자들이 중도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역시 서로 다른 업력인 것 같다.
각자의 업에 따라 성직자들의 모습도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각자의 업에 따라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다가 이승을 마감할 때도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죽음이란 긴 영혼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업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의 인연을 만나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돌아오는 시기 역시 일정하지 않다.
환생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계의 모습도 육신만 없을 뿐, 이승의 연속이므로 영적인 기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기운의 원천이 바로 본인의 공부와 수행으로 얻고 닦은 지성과 영성으로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는 깨달음인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이라는 경전은 고난을 겪고 있던 유대인의 결속을 위해 엄한 율법으로 그들을 통제하기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율법을 위반하는 자는 저주와 보복을 받도록 되어있다.
만인에게 공평하고 자비로워야할 신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고 보복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유태민족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결속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무언가 의지하고 기다리지 않으면 현실의 고통스런 삶을 견뎌내기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강한 율법으로 묶어놓고는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가 온다고 하며 기다리게 하고 결속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집트의 노예생활과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구박과 천대 속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한 유대교에 의지하여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한 율법에 묶여 이해와 용서라는 것을 모르고 끝없는 보복과 복수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사랑과 용서’를 주장하는 훌륭한 성인 예수님을 만났으나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당시의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의 비라도 총독에게 이스라엘민족을 혼란에 빠지게 한다고 고발하여 십자가에서 처형을 하게 만든 것이다.
‘사랑과 용서’라는 새로운 사상을 펼치고 있던 예수님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결국은 처형을 한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율법에 묶여서 끝없는 보복과 복수를 하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사랑과 용서’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단이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상은 불교수행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약속이란 신약성경은 불교의 법화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종교학자들에게는 상식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예수님은 불교수행을 했고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불교수행을 했다는 흔적이 실증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처형되지 않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상을 수용하고 받아들였다면 유태인과 이스라엘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들이 겪은 고충은 말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던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처형하게 한 그들의 업보인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유태인들이 타민족보다 우수한 면이 있는 것은 그들의 생활지침서인 ‘탈무드’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5천년 동안 다른 민족의 박해를 받으면서 유랑생활을 견뎌낸 힘은 바로 ‘탈무드’란 정신적 지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마지막 구절은 저주와 보복이지만, 탈무드에는 전혀 그런 말이 없다.
탈무드는 유태교의 랍비(
첫댓글 고맙습니다...잘 읽고 갑니다..제게 필요한 몇몇 귀절은 스크랩하여 마음의 등불로 삼고자 합니다..
상락화 보살님과의 인연/ 작년 수안보에서 "공무원 퇴직자 교육" 함께 1주간 보낸적이 있는데 "결과부좌 수행"을 몸소 실천하여, 암도 이겨낸 훌륭한 보살 입니다.. 마하반야 바라밀 ..()...
그런 소중한 인연이 있으셨군요.
언제 기회되면 우리 지역단 연수시간에 한번 모셔보심 어떨실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