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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3(주일) 민수기 14:11~25 “모세의 중보기도”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모세의 중보기도’라는 제목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 같습니다. 작은 문제에도 원망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대신 회개하는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가야 할 길을 점검받기를 원합니다.
1.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11~12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베푸신 수많은 이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정탐꾼들의 악평을 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며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10절). 이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11절)고 백성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전염병으로 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12절).
모세에 대한 원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인 것입니다. 왜 이런 불평과 원망이 나올까요?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굳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19:3)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미련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련은 어리석음입니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 뜻을 모르는 자 입니다, 그런자는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도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생활을 하시길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많은 은혜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큰 은혜보다 그 과정 속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 때문에 힘들어서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입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무기 가운데 또 하나 무서운 것이 원망의 말입니다. ‘원망’이란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해서 원망의 말을 듣는 순간 같이 원망을 주고 받게 됩니다. 원망은 사전적으로 ‘마음에 마땅치 않게 여기는 마음이요, 책임을 떠넘기는 수작이고 불평하여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원망에 대해 성경에서는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민14:11을 보면 원망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원망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일이라고 합니다. 또한 민14:35에서 원망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원망하는 자들은 복을 받지 못합니다.
민14:23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분명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가져다 주는 원망을 몰아내고 원망의 태도를 격리시켜야 합니다. 또한 감사와 찬양, 은혜와 축복을 말하는 거룩한 교회 안에 원망을 몰고 들어오려는 사람들과 친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요즘 신천지 이단의 전략이 무엇입니까? 그 묘략이란 방법으로 도전하는데 하나가 거짓말의 위장이고 하나는 원망, 불평입니다. 원망은 사람을 향하였어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민14:27 하반절에 “그 원망하는 말을 들었노라.”
하나님이 들으시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말입니다.
말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며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하나님은 말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말을 들으십니다. 반면 민14:27 하반절을보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원망하는 말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말을 다 들으시는 분이십다.
하나님은 나의 좋은 말, 신앙의 말도 듣지만 나쁜 말, 원망의 말도 들으십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만 주야 가릴 것 없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빛도 지으시고 어두움도 지으시고 축복도 만드시고 저주도 가져오시는 하나님이 내 모든 말을 들으신다는 것을 깨닫고 원망하는 말을 내 인생에서, 내 입술에서 폐기처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원망의 말을 품어 냅니까?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내 환경이 점점 힘들어질 때 우리는 그 환경을 묵묵히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원망하며 가족이나 동료, 지체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적용) 오늘 내가 이웃을 향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의 사소한 불평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임을 인정합니까?
2. 중보기도하는 모세(13~19절).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모세는 주의 명성을 위해서 백성을 멸하시는 것을 취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5,16절). 그리고 큰 권능을 나타내주시고(17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19절).
첫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저들을 사랑하며 하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지금 누구를 사랑합니까? 수없이 실망시키고 좌절하게 하고 결국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저들을 철저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를 해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목자의 심정,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고는 사랑하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느 정도 사랑했는지 압니까? 모세의 기도를 보니 자신의 영혼을 걸고 기도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출32:33절에 보니 그러나 합의 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리소서 라고 자신의 영혼을 걸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듯 하였습니다. 모세 자신은 지옥에 가도 좋다는 것입니다. 대신 저들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둘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명예를 붙들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들을 죽이시면 그동안 주의 명성을 들었던 저들이 애굽에서 인도는 했지만 가나안으로 인도할 능이 없어 그러했다 합니다. 그러니 나는 죽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되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가난해도 병들어도 주님을 인정하지만 믿음 없는 가족, 믿음 없는 남편은 어떡합니까? 주변의 사람은 어떡합니까?
셋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하십시오 말씀하셨던 대로 약속하지 않으셨니까?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약속하셨던 대로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옵소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약속하지 않았나이까? 이 백성을 긍휼이 여기고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놓아버렸는데 모세는 아니라 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걸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넷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들고 하는 기도입니다.(19절)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으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시옵소서 모세는 철저히 주의 인자와 광대하심을 따라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원래부터 이들은 못났고 말 잘 안듣고 불평하는 백성임을 아셨지 않습니까? 저들은 못났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왜 이제 와서 심판하시겠다 합니까?
모세처럼 한 공동체의 지도자는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자기 욕심을 버리고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지도자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로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모세와 같은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자기 죄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거나 남의 죄나 공동체의 죄를 방관하지 않고 대신 떠안고 짊어질 때 그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광대한 인자하심”(19절)에 호소하는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적용) 나는 내 가족과 이웃의 죄를 정죄만 합니까? 아니면 그들의 죄를 긍휼히 여기고 대신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합니까? 내 죄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지는 않습니까?
3. 조건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20~25절).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용서해주십니다(20절).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이적을 보고서도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불순종한 백성에게 대해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고, 훗날 오직 마음이 그들과 다른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22~24절).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의로운 심판을 하고 계십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것은 결코 그들이 잘나고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이 달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입니다(24절).
민 32:11-12 [11]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 그것이 이들의 생과 사를 결정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을 선택하고 그런 삶을 살았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기를 선택하고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삶에 대한 결과를 그들이 받은 것입니다. 그럼, 갈렙이 선택한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은 무엇을 말합니까? ‘온전히 따랐다’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사실 상당히 예외적인 표현입니다. 본래는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득 채우다”는 의미의 단어와 “~뒤에, ~를 따라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여호와를 따라 (자신을) 가득 채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 대다수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저 강한 백성들에게 전멸할 것이 뻔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 모습에 대해 하나님은 오늘 본문 24절에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사용하셨던 표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갈렙을 “내 종”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부르셨을까요?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닙입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결과에 관계없이, 지금 자신이 처한 위험에 관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갈렙과 같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런 열매를 맺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갈렙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여기서의 ‘마음’은 ‘영’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로서, 갈렙의 속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는 말로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을까요?
갈렙은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었고, 다수는 그저 그런 하나님을 경험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자신의 편에 섰을 때 얻는 것으로만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아니셨던 것이죠.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에는 이런 말이 들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의 말에는 늘 하나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의 생각과 말에는 하나님이란 용어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계산에 하나님을 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자신을 가득 채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따라 온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고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으로 올라가야만 한다고 당당하게 백성들 앞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가 본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동일했다면, 그 백성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동일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상황에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거역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어 주실 것을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즉, 그의 마음은 다른 백성들과 달랐습니다. 어떤 면이 달랐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에는 자기 자신이 가득차 있었지만, 갈렙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가장 높은 자리에 계셨고,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24절에서 말하는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의 목소리가 아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온전히 따르게 됩니다.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 길을 인도받고 온전히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목자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양들을 친히 돌보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성도는 진정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고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요10:1~10).
적용) 약속된 구원에 이르는 일을 막고 있는 나의 불순종은 무엇입니까? 나는 일상의 작은 일에도 말씀으로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 말씀에 온전히 따라갑니까?
결 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힘든 현실과 부정적이고 어리석은 말에 쉽게 넘어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의 작은 문제에도 믿음을 잃고 세상에서 방황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며, 나의 죄를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세처럼 내 가족의 죄부터 대신 회개하며 중보하고, 성령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