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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틴 숲의 학살(폴란드어: Zbrodnia katyńska, 러시아어: Катынский расстрел, 영어: Katyn Forest massacre)은 소비에트 국내의 스몰렌스크 근처 그네즈도보(Gnezdovo)마을 부근의 숲에서 소비에트의 NKVD(소련의 내무성, 비밀경찰)이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2만 2천~5천여 명을 재판 없이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다. 카틴(Katyń)은 이 사건이 있었던 장소에서 가까운 지명의 이름으로 사건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잘 알려진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대외선전용으로 당시 독일이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2010년 4월 10일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70주년 추모식에 참석하려다가 사망했다. (폴란드 대통령기 추락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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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사건의 발단
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양쪽에서 침공을 당한 폴란드는 패배하여 많은 폴란드인이 전쟁포로가 되었다. 1943년 독일 국방군은 카틴 근처의 숲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조사를 시작해 4,000명 이상의 폴란드군 장교, 경찰관, 공무원, 지역유지(有志) 등의 유체가 매장된 것을 발굴하여 구 소련이 그들을 재판 없이 학살한 것을 비난했다. 연합국측에서는 암호 해독의 거점이었던 블레츨리 파크에서 추축국의 무선통신을 첩보하여 해독하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커다란 묘의 구멍과 그것을 발견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구 소련 즉 적군은 독일의 주장을 반박하여 1941년 침공한 독일군이 전쟁포로인 폴란드인들을 붙잡아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4년 구 소련은 카틴 숲을 재조사하여 시체를 다시 발굴하였다. 같은 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카틴 숲 사건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지 알 대위를 밀사로써 발칸반도로 보냈다. 알은 추축국측의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접촉하여 소비에트 연방이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결론을 거부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나치 독일이 이 사건을 저질렀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알의 보고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인해 은폐되었다. 알은 자신의 조사를 공표할 수 있게 허가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엿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것을 금지한다는 문서를 알에게 보냈다. 알은 자신의 임무에서 제외되어 전쟁의 남은 기간을 사모아에서 보내고 만다.
[편집] 냉전 시기의 조사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 공산당의 간부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소비에트 연방의 프로파간다에 동조하여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다. 1989년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진실은 공개되지 않았다.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 때 구 소련의 검찰관은 카틴 숲 학살에 대해서 독일을 고발했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전쟁범죄 중 하나가 독일의 파시스트에 의해 폴란드인 포로가 대량학살된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독일 변호인은 변변치 못한 변호를 했으나, 미국과 영국은 이 고발을 지지하지 않았기에 이 문제는 취급되지 않았다. 카틴 숲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서 서방측에서도 동방측에서도 이론이 끊이지 않았다. 1952년 미국 의회에서는 카틴 숲 사건이 구 소련 내무성에 의해 1939년 계획되어, 적군에 의해 살해가 실행된 것을 인정하였다. 또한 1970년대 후반 영국은 사건이 있었던 1940년의 그날에 희생자을 위한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냉전 아래에서의 정치정세를 자극한다고 하여 비난받았다.
[편집] 냉전 시기 후 조사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학자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학살을 명령하고, 당시 내무인민위원부장관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명령서에 서명한것을 밝혀냈다. 1990년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카틴과 같은 매장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인 메드노에(Mednoe)와 퍄치하키(Pyatikhatki)를 합해, 소비에트의 내무인민위원부(NKVD)가 폴란드인을 살해한 것을 인정하였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후 러시아 정부는 최고기밀문서의 제 1호을 공개했다. 그중에는 서쪽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현지인 및 각 야영지에 있는 폴란드인 25,700명을 사살하라는 스탈린 및 베리야 등 소련 중요 권력자의 서명이 들어있는 계획서 및 소련 정치국이 제출한 1940년 3월 5일 사살명령과 21,857명의 폴란드인 살해가 실행되었고, 그들의 개인자료를 폐기했다는 계획이 들어있는 문서인 니키타 흐루쇼프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편집] 러시아-폴란드의 외교 마찰
- 러시아는 이 사건에 구 소련군이 개입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나, 국가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음.
- 러시아 군법원은 2005년 1월 11일에 이 사건이 유엔이 규정한 집단 인종학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정.
- 폴란드 국가 기념연구소(IPN)의 레온 키에레스 소장은 러시아 군법원의 결정에 "놀랄 일도 아니며 러시아는 해당 범죄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고 비난.
- 러시아 당국은 카틴 사건 관련 문건 183건 가운데 67건만을 폴란드 정부에 제공하겠다고 밝혔을 뿐, 116건은 기밀을 이유로 공개를 꺼리고 있는 중.
[편집] 영화화
2007년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에 의하여, 이 사건을 제재로 한 영화 《카틴》이 제작되었다. 바이다의 부친도 이 사건의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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