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자의 기틀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인물 중에서 “최진립”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최진립(崔震立) 장군은 경주에서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활동했고, 이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지냈던 인물입니다.
최진립은 사후에 병조판서(국방부장관)로 추대된 조선의 최고의 무장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12대 400여 년 동안이나 번영했던 경주 최부자집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입니다.
최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큰 궤적을 남겼고 후세에게 널리 알려서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인물임에도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로 역사의 기록에서 감쪽같이 지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경주 최 부자댁은 '부자는 삼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속설이 무색하도록 수백 년 동안 경주 최고의 부자로 번창했습니다.
그 집안에서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훈이 있습니다.
"흉년을 틈타서 재산을 늘리지 말고, 근동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저 가훈이 12대를 내려오면서도 커다란 부를 유지했던 비결이었습니다.
최 부자 집안은 돈을 억지로 모으려고 애쓰지 않고, 큰 덕(德)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타고
돈이 저절로 모이도록 했습니다.
집안에서 빗어 먹던 가주(家酒)가 '경주법주'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명주가 되기도 한 이 집안은 오래전에 지금의 ‘사회적 기업’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그러한 기업을 세우려는 꿈을 꾸었고 실행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남대학교, 삼성그룹, 박정희 대통령까지 엮어지는 기묘한 이야기이며,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는 이야기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한 ‘부자’의 장렬하고, 또한 슬픈 이야기입니다.
최진립의 집안은 약간의 농토를 소유한 지금의 중산층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사회 분위기는 흉흉했고 장정의 태반이 전쟁으로 희생되어 농업생산의 기반인 노동력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전쟁에 대한 불안감에 농사지을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어서, 아무리 비옥한 토지라도 어서 처분해서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농토를 아무리 헐값에 내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던 그 시기에 최부자댁은 비교적 좋은 가격을 치르면서 땅을 조금씩 사들였습니다
일할 사람도 없고, 언제 또 전쟁이 일어날지 몰라서 정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땅을 자꾸 사들이는 것은 그 당시로는 참 바보 같은 행동이었으나 계속해서 땅을 사들였습니다.
선견지명에서 나온 확신이 있었고, 또한 그 시기에는 그것이 땅을 짊어지고 피난하지 못하는 농민들을 돕는 방법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가 점점 안정되자, 농민들은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글: 정성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