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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찰>은 <관여찰>(觀與察)이다!
- I see(나는 본다/안다)에 깃든 정보의 섭취와 몸형성
<있는 그대로 대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사실상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적어도 모든 존재 및 자연 세계를 관계와 과정으로서 본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얘기다.
수사적인 문구로서 동원될 순 있지만 정확한 사실을 담은 것은 못 된다. 명상, 관조, 등 이런 것들을 행하는 특정한 종교 단체나 모임에서는 아마도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지만, 그 역시 주관과 상상이 함께 관여된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객관적 관찰>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관찰 자체가 기본적으로 선별적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찰자는 우주와 사물로부터 멀리 떨어진 관중이 아니다. 상호작용의 관계와 과정이 전혀 없는 <무관련성의 관중>이란 있을 수 없다.관계와 과정의 존재론과 우주론을 펼쳤던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철학에서는 심지어 신(God)조차도 상호 관계와 과정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관찰은 <우주 속에 참여하고 있는 가운데 수행되고 있는 관찰>인 것이다. 여기에는 과학의 정밀한 관찰조차도 예외이지 않다.
우리는 현재 우주의 과거를 빅뱅으로 알고 있지만 그 정보가 새로운 관찰에 의해 다시 새롭게 업데이트 되면 우리의 과거라고 생각된 빅뱅을 부정할 가능성도 큰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공부하며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 우주에 새로운 지식을 창출시키고 있는 미래를 계속적으로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우리의 모든 관찰들은 새로운 우주를 계속 창출시키는데 관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모든 관찰은 기본적으로 <관여찰>이라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다만 어떤 <관여찰>이 가장 보편적 소통과 유익함을 지닐만한 것인가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우리 모두는 세계에 속해 있고, 세계를 구성하며,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적극적인 <관여자로서의 관찰자>인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 대해서 결코 순수 객관적 존재일 수가 없다.우리가 이 <관여찰>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 몸의 매순간순간들이 세계와 계속 관여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세계를 보며 이해한다는 것>과 <우리가 우리의 몸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보면 둘이 아닌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몸이 우주와 사물을 <본다>라는 관찰은 결국 <관계체로서의 몸형성 작용>에 다름아니다.
모든 관찰은 결국 선별적 행위인 것이고, 또한 그것은 근본적으로 <관여찰>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로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보는 것이 결국은 당신 자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형성의 정보도 바로 그렇게 섭취되고 있다.
오늘은 뭘 볼까? 고민하는 당신..
일반적으로 우리 모두는 덧없거나 일시적인 흥미꺼리들을 잘 찾아 본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고 낭비되지 않을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좀 더 찾아 <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그나마 우리 몸에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알고 보면, <봄>과 <앎>과 <됨>은 모두 같은 몸의 사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