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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용서받지 못한 골키퍼
堂井 김장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한국 팀 최고의 골키퍼였던 정찬식.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떨쳤지만 월드컵에서 실패자로 - 무슨 이유인지 - 낙인찍혀 자신의 축구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2000년 3월 23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태어났다. 비록 가난한 산동네지만 정이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으로 축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176cm의 작은 신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점프력이 뛰어나 아무도 그의 플레이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 서울의 축구단에 스카우트된 후에는 승승장구했다. 어떤 때에는 대한민국의 아시안컵 우승, 동아시안컵 우승, 아시안게임 우승, U23 챔피언십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단신이지만 점프력이 뛰어난 정찬식의 플레이에 감탄했고 정찬식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2026 북중미 월드컵 본선에서도 골문을 완벽하게 책임지며 통일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통일 이후 정찬식은 평양 축구단에 입단했다.
통일 한국에서의 생활
하지만 통일 한국의 초기 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정찬식이 북한 주민만 만나면 ‘남조선 반동’이네 어쩌네 하는 욕설을 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북한 동료들은 그를 만나면,
“두고 보갔어. 너이 새끼 행동 조심하라우.”
라는 협박을 한 것이 한둘이 아니어서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는 결국 입단 3개월 만에 경주로 떠나게 된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 토함산 등을 거닐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또한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구단에서 활약을 하여 총 94경기에 출전했다. 경주에 있은 지 얼마 후 국가대표로 뽑혔다.
월드컵에서 1
드디어 그 때가 왔다. 때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 당시 한국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첫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 ‘꾀돌이’ 장영태, ‘현대판 일지매’ 권상우 등 당대 최고의 공격진을 구축한 한국은 그 어떤 팀도 쉽게 상대할 수 없었다. 정찬식 역시 최강 통일 한국의 축구 선수 자격으로 월드컵에 참가했다. 한국인들은 뛰어난 활약을 보인 정찬식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고 그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북중미 월드컵 본선에서도 골문을 완벽하게 책임지며 통일 한국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예선에서 파라과이를 1:0, 알제리를 2:0, 32강에서는 이란을 7:0, 16강에서는 멕시코를 3:1, 8강에서는 벨기에를 4:1, 4강에서는 이탈리아를 3:2로 이겼다. 한국인들은 정찬식이 이번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것을 많이 칭찬했고 그 계기로 한국은 드디어 베트남을 결승에서 만났다. 미국 LA에서 열린 결승전은 8만 8천여 명이 지켜볼 정도로 크나큰 관심을 받았다. - 물론 여태까지 활약한 정찬식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월드컵에서 2
통일 한국은 이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다. 통일 한국은 과거 박항서 감독이 이끌었던 베트남을 이겨야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었다. 미국 LA 땅에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등의 관중들의 응원 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막상 베트남의 파상 공세로 한국은 계속 위기를 맞았다. 전반전에는 막상막하(莫上莫下)였다가 후반 3분 베트남 선수한테 선제골을 내주며 위기를 맞았으나, 후반 23분에 경세호가 동점골을 성공시킨 뒤 후반 41분에 ‘꾀돌이’ 장영태가 역전골을 넣었다. 그러자 LA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후반 추가시간에 연성일이 쐐기골을 성공시킨 후 통일 한국과 LA 경기장은 그야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 추가시간은 그 당시 3분이 주어졌는데, 연성일은 후반 47분에 골을 넣은 셈이다. - 결과는 3:1. 통일 한국의 승리였다. 드디어 통일 한국은 2026년 월드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월드컵에서 3
2026년에 개최된 월드컵 조 편성은 다음과 같다. 종전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 32개였던 참가국 선수가 이번에는 48개국으로 늘었다. 유럽 16개국, 오세아니아 1개국, 남미 6개국, 북중미 6개국, 아프리카 9개국, 아시아 8개국이었다.
A조 – 캐나다(북중미, 개최국), 브라질(남미), 나이지리아(아프리카)
B조 – 이탈리아(유럽), 시리아(아시아), 뉴질랜드(오세아니아)
C조 – 네덜란드(유럽), 토고(아프리카), 에콰도르(남미)
D조 – 독일(유럽), 온두라스(북중미), 러시아(유럽)
E조 – 멕시코(북중미, 개최국), 세르비아(유럽), 이란(아시아)
F조 – 통일 한국(아시아), 파라과이(남미), 알제리(아프리카)
G조 – 슬로베니아(유럽), 아르헨티나(남미), 일본(아시아)
H조 – 벨기에(유럽), 스웨덴(유럽),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프리카)
I조 – 미국(북중미, 개최국), 가나(아프리카), 태국(아시아)
J조 – 파나마(북중미), 사우디아라비아(아시아), 콩고민주공화국(아프리카)
K조 – 잉글랜드(유럽), 콜롬비아(남미), 쿠바(북중미)
L조 – 프랑스(유럽), 베트남(아시아), 모로코(아프리카)
M조 – 카타르(아시아), 스페인(유럽), 베네수엘라(남미)
N조 – 포르투갈(유럽), 핀란드(유럽), 이집트(아프리카)
O조 – 우루과이(남미), 크로아티아(유럽), 스위스(유럽)
P조 – 에티오피아(아프리카), 폴란드(유럽), 우즈베키스탄(아시아)
2026년 FIFA 월드컵은 특이하게 진행되었다. 이 대회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 경기라도 더 치르게 하기 위해 모든 경기 일정을 32강 형식으로 짜서 월드컵을 개최했다. 각 조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팀은 A조에서 H조로 이루어진 것을 I조, J조, K조, L조, M조, N조, O조, P조 가 추가되어 본선 2라운드를 치르게 되었다. 통일 한국의 경우 같은 조에 편성된 파라과이와 알제리가 참가해서 각 조당 4경기에서 3경기로 줄었고, 그 대신 각 조에서 1위나 2위를 차지한 팀이 본선 32강에서 만나 16강 그 이상을 다투는 방식이었다.
월드컵에서 4
통일 한국은 파죽지세의 베트남과 마지막 경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팀인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통일 한국의 대통령은 경기가 끝나기 전부터 한국어로 통일 한국의 승리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고, FIFA에서는 우승 메달을 만들어 준비하고 있었다. 통일 한국이 베트남을 3:1로 격파하자 그 메달들은 26명의 선수들의 목에 걸려서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통일 한국의 대통령이 승리 연설을 발표해서 국민들이 기뻐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통일 한국의 우승 기념곡은 〈승리자 대한민국〉이라는 노래로 정해졌는데, 통일 한국이 우승하자 이 노래가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다. 한국 본토에서는 모든 우승 기념행사가 동시다발로 열렸는데, 그 노래도 불려서 국민들은 하나가 되어 너무나도 기뻐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침 해-가 뜨-는 동해바다에
빛나는 여명-이 떠-오르면
챔피언 통일 한국 빛나는 그-승리
우리들은 월드컵의 챔피언이다.
후렴 - 아아 우리들은 배달의 자손
반만년 질곡의 세월 이제야 이겨냈네.
통일의 그날, 그리고 영광의 월드컵
우승으로 장식했으니 너무나도 기쁘다!
2. 백두산에서 한라산 영광의 승리
천하에 그 이름을 널리 떨치며
긴 터널을 헤친 듯 빛나는 태극전사
통일 대업 대한민국 길이 빛나라!
후렴 - 아아 우리들은 배달의 자손
반만년 질곡의 세월 이제야 이겨냈네.
통일의 그날, 그리고 영광의 월드컵
우승으로 장식했으니 너무나도 기쁘다!
통일 한국에서는 이번 월드컵 결승전에서 베트남을 역전승하여 결국 우승을 쟁취하게 되자 전 국민이 환호하였다. LA 경기장에서는 관중 전체인 8만 명이 밤새도록 스탠드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기뻐하였으며, 한반도 전역에 전국적으로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수십 명이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특히 이 경기에서 통일 한국이 베트남에 역전승한 것에 대한 기쁨과 희열과 행복을 참지 못한 남북한 사람들이 환호하며 기뻐 날뛰는 바람에 곳곳에서 잔치가 벌어졌으며, 오토바이, 버스, 자동차, 지게차 등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한국인들의 무대가 되었다. 이런 엄청난 분위기 때문에 베트남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준우승 수상식을 즐겁게 진행하고 한국인들의 환호와 축복 속에 귀국하였다.
2026 월드컵 그 이후
한국 축구 연맹은 감독 등 관련자들과 선수 25명에 대한 포상을 진행하고, 우승 포상금 30억 원을 지급했으나, 이 당시 출전했던 정찬식은 경기 종료 후 즉각 해고를 당했으며 두 번 다시 한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대표팀의 품위를 손상시킨 책임을 물어 경주 한수원에서도 퇴출되고 한국 축구 연맹에서도 영구제명까지 당했으며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정찬식은 몇 개월 간 한국에서 괴롭힘을 당해오며 살다가 2027년 11월 7일에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는데,
"한국에서는 아무리 크게 잘못을 해도 40년형 이상을 받지 않는데, 베트남과의 경기 이후 나는 한국에서 몇 개월간을 죄인으로 살아왔다.“
라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얼마 후에도 통일 한국 축구는 더더욱 발전했으나, 정찬식은 철저히 잊혀졌다.
월드컵의 정론
월드컵이라는 것은 1930년 이래 전 세계 축구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최고의 무대인데, 국민들은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위해 열띤 응원을 펼치고 그 선수들이 뛰어난 성적을 거두기를 바란다. -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다. - 그리고 선수들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통해 울고 웃는다. 하지만 선수들 그 자체들도 사람이기에 때로는 축구를 향한 팬들의 과도한 에너지 때문에 엉뚱하게도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콜롬비아의 안드레아스 에스코바르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 귀국 후에 총에 맞아 죽었고, 통일 전 한국의 장현수는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페널티킥을 내줬다는 이유로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사형 요청이 올라오는 등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장현수는 2018년 가을에 봉사활동 기록 조작을 한 탓에 다시는 국가대표에 속할 수 없게 되었다. 참, 브라질 축구는 2002년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01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벨기에한테 1:2로 패배하여 4강 진출에 실패하자 브라질 국민들은 귀국한 대표팀 선수단을 향해 수십 개의 계란을 던졌고 폭죽을 터뜨렸다 한다. 인류가 축구를 향한 열정도 좋지만, 지나치게 엄청나면 수많은 선수들에게 영원히 치유하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기곤 한다.
조국에서 버림받고
정찬식은 결국 대표팀에서 퇴출되었고, 강제 은퇴 이후에도 코치와 감독, 해설자로 나가지도 못했으며, 축구장이나 훈련장 근처에서 영원히 출입이 금지되었다. 결국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정찬식은 외할머니 댁에서 얹혀살아야 했다. 그로부터 2027년 11월 7일, 결국 일본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전부터 익혀 온 일본어가 도움이 되었다. 결국 정찬식은 ‘남북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 ‘남북을 절망에 빠뜨리려는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한국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고, 결국 외할머니 상(喪)을 치른 후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정찬식은 희생자
어떻게 보면 정찬식을 향한 비난은 통일 한국의 당시 상황과 맞물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 통일 전 한국은 경제난과 취업난에 허덕이던 저주받은 국가였다. 그러한 한국 국민들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축구였다. 그들은 연전연승하며 세계를 주름잡던 대표팀의 선전에서 작은 희망을 찾았다. 게다가 새 대통령 선출 이후 남북은 통일되었다. 비록 통일 한국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정찬식을 향한 비난은 더 심해졌고, 견디다 못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원했던 기쁨과 행복을 주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재산 몰수와 왕따, 취업 제한뿐이었다. 정찬식의 전 재산은 불우이웃 돕기에 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방금 날아온 슬픈 소식은 어머니는 화병으로, 아버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었다. 축구 때문에 불효자가 된 정찬식은 결국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끝내는 견디지 못해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서울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의 후신)을 나서는 무거운 발걸음.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소리와 손가락질은 멈추지 않았다.
잘못된 열정, 그리고 정찬식의 파멸
월드컵은 세계 모든 선수들이 뛰기를 원하는 꿈의 무대다. 자국의 국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나라를 대표해서 뛰는 최고의 무대에서 4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선수들은 월드컵을 통해 자신의 축구인생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선수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로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자국 축구의 위상을 높이고 ‘영웅’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때때로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한 큰 실수를 범하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월드컵이란 큰 무대는 단 몇 경기 내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선수들이 얻는 심리적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비판과 비난은 엄연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잘못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은 행해질 수 있지만 선수를 죄인으로 만드는 맹목적인 비난은 있어서는 안 된다. 선수들이 월드컵을 위해 4년 동안 노력하면서 흘린 피와 땀은 어떤 말로도 형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살해 위협 등을 비롯해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어떤 선수도 국가를 대표해 뛰는 대회에서 고의적으로 팀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경우는 없다. - 그 경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 진정으로 팀을 위한다면 선수를 격려해 주고 필요하다면 적절하게 올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옳다. 이는 팬부터 축구협회까지 축구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해당한다. 이미 우리는 정찬식을 포함한 수많은 선수들을 ‘희생자’로 몰아갔다. 축구를 향한 잘못된 열정은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생
그 후 정찬식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결혼도 하고 취직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왕따를 당해야 했다. 정찬식은 결국 한국 생활을 마감하고 축구선수의 꿈도 영원히 정리했다.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그는 한국인의 이지메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아들과 딸과 사위가 주는 용돈으로 살았다. 81세에는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 정찬식은 완전히 잊혀진 외톨이가 되었다.
2091년 3월 6일, 정찬식은 병이 들었는데, 스트레스성 심장병이란다. 그 병이 더 심해지자 유족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최고형벌이 사형이지만 나는 그 경기에서 이겼어도 65년을 죄인처럼 지냈다. 한국인들은 이제 혼 좀 나야 한다. 나무 접시가 놋접시가 되겠는가.”
정찬식은 그 후에도 한국인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 자신의 유골을 일본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족들에게 다시는 한국에 가지 말라는 말도 남겼다. 또한 장례는 치르지 말고 땅에 묻지도 말아달라는 유언도 했다. 향년 91세.
정찬식은 한국인으로부터 잊혀졌고, 다시는 한국의 번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들의 잘못된 이기심과 삐뚤어진 열정이 만든 비극이었다. 그 후 정찬식의 증손자는 일본의 총리가 되었고, 외손자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여 기업가로 활약했다. 그 뒤로는 납골당에 안치된 정찬식의 유품만이 초라하게 방문객들을 반길 뿐이다. 조그만 납골당 안에 안치된 정찬식의 글은 다음과 같다.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다. 후회는 없다. 그때(2026) 국가대표로 선출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죽어서도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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