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6:1-15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3.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5.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6.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오늘 본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겼던 법궤를 약 20년 후 다윗이 예루살렘 성으로 옮긴다는 내용입니다.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던 중 소들이 뛰자 웃사가 손으로 붙들었는데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죽습니다. 언약궤가 안치되었던 집에 복이 임하자, 약 3개월 후 다윗은 기쁜 마음으로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 옮깁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언약궤의 출발, 웃사의 죽음, 3개월의 거치기간, 예루살렘으로 안치되는 언약궤 등입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 웃사의 행동에 대한 상황 설명입니다. 웃사는 실은 잘 못한 것이 없습니다.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므로 떨어지려는 언약궤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행위는 인간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나무랄 데가 없지만 여호와의 진노를 사고 맙니다. 율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민수기에 따르면 아무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였고, 이동 시는 채를 언약궤 고리에 꿰어 운반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형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 당시 언약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 누구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가드를 문자 그대로 블레셋의 가드로 보고, 그 지역으로 옮겨졌다는 주장입니다.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꺼렸기 때문에 이방인의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가드는 블레셋 영토인 가드가 아니고, 레위인의 성읍인 ‘가드림몬’이라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내진 것은 그는 다름 아닌 고핫 자손으로, 율법에 의거 그들이 궤를 운반하는 직책을 가진 자들이라 그렇다는 것입니다. 후자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역대기에 오벧에돔이 나오는데, 그가 고핫 자손으로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적국대국인 블레셋의 성읍에 하나님의 궤를 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 이는 언약궤를 맨 레위인들이 처음 여섯 걸음을 무사히 옮기자 다윗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 감사제사 지냈다는 말입니다.
▶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이 분노하여 그곳을 ‘웃사의 사고’ 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노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웃사의 지각 없는 행동과 다윗의 율법에 대한 무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당시 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율법에 대한 무지입니다. 만약 그런 규례를 한 사람이라도 알았다면 적극적으로 말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 달 후 실수가 교정되어 언약궤는 다윗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런 사실을 보더라도 다윗의 분노는 자신과 웃사의 실수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백성들은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옵니다. 헌 수레가 아니라 새 수레인 것은 그들이 나름대로 법궤를 귀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법궤 운반은 중단됩니다. 무언가 하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거룩한 행사를 더는 강행하지 않고 보류합니다. 어쩌면 왕으로서 무능력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시간을 갖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궤는 사람들에게 메어 집니다. 율법에 따라 제대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신상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다윗은 잘못을 인정하고 즉각 수정합니다. 이로써 궤는 다윗성에 무사히 안착합니다.
선한 의도로 하는 일이 뭔가 삐거덕거리고 순탄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고나 불행으로도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시간과 경비와 수고에 개의치 말고 우선멈춤 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진전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 혹시 영적인 면에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는 아무리 마천루를 쌓은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삼만 명을 동원한 다윗은 자존심을 접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징표로 응답하십니다. 잘못된 것을 발견한 다윗은 또 한 번 하나님을 경험하는 귀한 영적 경험을 하게 되고, 그의 신앙은 업그레이드됩니다.
마냥 전진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멈출 때도 있어야 합니다. 울퉁불퉁 하는 도로에서 수레가 뜁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로는 수정호수가 아닙니다. 도로 사정으로 인하여 자동차 바퀴는 종종 휠 발란스를 잡아주어야 합니다. 정비 없는 자동차가 없듯이 수정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