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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1-10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요셉이 고독한 중에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와 복을 주심으로 형통하게 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고 형통하게 되었을지라도 방심하지 않고 시종일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경건히 살고 있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2절은
"①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②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입니다.
모세는 요셉에 관한 기사를 나머지 부분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37장 끝 부분에서 간단히 취급했던 것을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애굽사람 보디발에게 팔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형통하였다는 말을 추가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종종 악인이 하는 모든 일이 그들의 소원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긴 하나 하나님께서 자기 특별하신 은총으로는 그들을 향해서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자기 특별하신 은혜로 자기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는 한 사람들은 형통하지 못하리라는 느낌은 참된 것이요, 또 그런 표현은 온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야 마땅한 타락자들에게 조차도 일시적으로 자기 복을 하사하시는데 이는 그들을 친절히 초대하여 회개로 인도하시고 그들이 만약 완고하게 남는다면 더욱 변명할 도리가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복을 저주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운의 절정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들의 기쁨이 되었던 번영은 파멸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그 복을 박탈하실 때마다, 이방인이든 자기 가족에 속하는 자든 필연적으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선(善)도 다 복락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인간의 주위를 선회(旋回)하는 행운의 여신을 스스로 만들거나 아니면 각자는 제 자신의 근면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을 이런 타락된 생각에서 멀리 끌어내어 역경(逆境)은 하나님의 부재의 표시이며 순경(順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라고 선언합니다.
요셉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이 독특하고 비상하여 그가 하나님의 모든 복을 받는 자로 명백히 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세는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있었다는 것을 곧 덧붙여서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즉시 존귀한 상태로 받들어지진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에게 자유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종들 가운데 하나로 계산되어 주인의 뜻에 목숨을 걸고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에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혹한 일을 견디어 내야 할 때 우리는 약간의 즐거움이 우리의 잔에 섞인 것으로 만족하여 하나님께 배은망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2. 본문 3-5절은
"③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④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입니다.
1) 본문 3절 상반은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입니다.
여기에 보면 보다 명백히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에게서 유달리 빛이 났습니다.
이방인이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 은혜는 분명히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우리의 모든 형통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소위로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배은망덕은 야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한 계획이든 수고든 인간이 궁리해 낼 수 있는 어떤 수단이든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결코 그들을 유익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보디발은 이런 이유로 요셉에게 큰 존중심을 품고 그를 자기 집 관리자로 세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도 경건한 신앙에 감동되어 하나님께 부득이 영광을 돌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경우에는 요셉이라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은사를 그토록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작 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는데 이 때에 그의 배은망덕은 다시 나타납니다.
그는 적어도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따르기 위해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기 개인 이익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셉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그가 요셉의 수고를 이용하여 보다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2) 본문 3절 하반에서 5절은 "③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④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 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행 방법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셉에 대한 자기 부성애를 복으로 증명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의 복은 애굽인들의 이익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위해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기에 자기 수고로 전혀 부유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달성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요셉에게 대한 보디발의 인간적이고 후한 대우였습니다.
그는 교만해서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를 악하고 더러운 노예로 학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종종 그런 은총으로 악인들을 달래시는 것은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경건한 자에게 대한 그들의 맹렬한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게 쏟아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혜 중에 일부분이 신자들로부터 타락자들에게 흘러나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를 열납(悅納)하여 후대하거나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따르는 자들과 연합하는 것이 매우 이롭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들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 그 향기를 확산(擴散)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세적 혜택이 푹 젖는다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큰 이익이 되진 못합니다.
더욱이 그 현세적 혜택은 타락자들을 질식시키고 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단 한가지 점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집중시켜야 마땅합니다.
요셉으로서는 보디발이 그를 통해 큰 이익을 얻는 것보다 보디발의 재산이 그를 위해 증가하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입니다.
3. 본문 6절은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입니다.
1) 본문 6절 상반은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인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잠시동안은 종살이의 고역이 경감된 데서 상당한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새로운 시험이 그를 공격했습니다.
그가 얻었던 총애는 모두 없어지고 보다 가혹한 운명의 원인과 기원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가(家) 전체를 주관하는 총무였습니다.
그는 그런 존귀한 자리로부터 하루 아침에 감옥으로 옮겨집니다.
이렇게 급강하시키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곧 사형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자기가 하나님께 버림받고 포기 당해 끊임없이 새로운 위험에 내버려짐을 당한다는 것 밖에 무슨 생각이 떠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대적이라고 선언하신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경건한 자는 특수한 식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혹한 고난을 은혜로서 경감시키실 때 신앙의 눈으로써 그 은혜를 깊이 투시할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조하시기 위해 손을 뻗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종종 비치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보다 짙은 어두움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비록 자기 백성을 역경의 파도 속에 내던지시는 일이 종종 있기 하나 그들을 속이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분께서는 때때로 그들의 고난을 누그러뜨리셔서 숨쉴 시간을 허락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비록 가정 총무 자리에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완전히 버림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고난이 완화되는 일이 결코 헛되이 나타나진 않았습니다.
고난이 완화되었다고 해서 그의 마음은 교만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고난을 끈기 있게 참을 수 있을 만큼 단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시는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그 때에 우리도 원기를 회복한 사람처럼 힘을 모아 다른 투쟁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2) 본문 6절 하반은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입니다.
(1) 거룩한 요셉에게 있어서 준수한 모습은 큰 재난의 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우아한 외모를 크게 소원하지 말고 차라리 각자 자기 분깃에 만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빼어난 자들에게는 아주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은 온갖 음란한 열망을 스스로 삼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셉에게는 경건한 신앙심이 너무도 우세하여 모든 불결한 것을 혐오하였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영혼을 낚는 올무로 바꾸는데 이력이 난 사단은 요셉을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안출 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극히 많은 위험 가운데에서 성령으로 우리를 제어해 주시고 우리 장식물로 주신 은사들을 때묻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해 주시도록 열심히 간구해야 합니다.
(2) 성경은 보디발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을 했다' 고 말합니다.
성령은 이런 언어 양식으로 모든 여인들에게 만약 그들이 정숙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정숙한 품행으로 그 마음을 수호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덮는 것도 모든 죄스러운 유혹을 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쳐다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모세가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불순하고 방탕한 추파입니다.
그 여자는 이전에도 요셉을 바라보았지만 그때는 아무 죄악감 없이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처음으로 요셉에게 시선을 던지고 정숙한 부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대담하게 그리고 방종하게 요셉의 아름다움을 응시합니다.
이와 같이 눈은 욕정에 불붙이는 마음의 횃불이라는 것을 유의합시다.
이 사례로서 우리는 만일 자기 자신을 철저히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모든 감각에 의해서 타락된 욕망으로 감염되기가 아주 쉽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자극하여 죄짓게 만들 것들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제시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자기 앞에 주어지는 죄의 기회를 쉽사리 포용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그리고 신속히 그것을 마음에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만약 사단에게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다면 눈과 귀와 몸의 다른 지체들을 쉬지 않고 다스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눈은 극히 예민한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억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4. 본문 7-9절은
"⑦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⑧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⑨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입니다.
1) 모세는 단지 요점만 간략하게 취급하며 개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음란한 여인이 갖가지 계교로 경건한 청년을 유혹하려고 노력했으며 더욱이 그런 파렴치한 방종심을 폭발시키기 전에 간접적으로 감언이설과 아양으로 요셉의 비위를 맞추었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른 것들을 생략하고 그 여자가 요셉과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서슴치 않을 만큼 야욕에 사로잡혔다는 사실만 설명합니다.
이런 음란은 세상적 정욕이 맹목적인 맹렬한 충동에서 행동한다는 두드러진 증거입니다.
2) 요셉을 통해서는 일반적인 충실성과 절제의 놀라운 본보기가 우리 앞에 제시됩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자기가 위임받은 권세가 크면 클수록 자신이 한층 더 엄격하게 자기 주인에게 얽매인다고 고백하는데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성실성과 순전성이 나타났습니다.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은 믿고서 부탁 받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속이지 못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해를 끼칠 권세가 있으면서 은혜를 잊지 않고 정직히 행하는 유덕자는 드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부여받은 권세를 하나님의 구속물로 간주하여 기록된 계명(의문)의 영역을 범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모세의 칭찬은 결코 과분하지 않습니다.
3) 더욱이 그는 자기 주인에게 어떤 수치를 돌리지 않아야 할 이유로 그 주인에게서 받은 은혜를 제시하는데 이 또한 주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는 그의 마음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늘날 도처에서는 이 신성한 상호간의 사회적 계약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인간은 거의 금수와 같다고 할 정도로 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입으면 그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고백합니다.
심지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배은망덕을 들어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본(本)을 진지하게 따른 자는 아주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4) 요셉은 사람에게 대한 존중심으로만 억제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 행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와 다른 사람과 모든 상황을 둡니다.
신실로 시험을 극복하는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보다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도적으로 자기 주인의 관대함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악한 여인으로 하여금 타락한 계획을 중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라고 말하면서 반대하는데 이것도 동일한 취지입니다.
그는 혼인의 경건한 의무를 상기시킴으로서 그녀의 몰지각한 욕정을 치료시킬 말 외에 왜 그 여인의 부패한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이런 말을 합니까?
지금 그는 그녀의 악한 유혹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이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것으로 판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최상의 치료를 그녀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인류 보편의 교류 방식에서 시작합니다. 다음에 혼인 관계의 신성성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고급한 교제자이신 하나님의 면전에까지 나아가서 그분의 성품과 맞딱뜨립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기사에서 혼인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권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결혼의 신실성을 유지시키시는 분으로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침상을 범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복수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사이의 보증자이십니다. 또 각자에게 상호간의 정절을 요구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받는 피해 외에 하나님 자신이 심한 학대를 받으시는 셈입니다.
5. 본문 10절은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입니다.
1) 이 부분에서는 요셉의 시종일관한 지조가 칭찬 받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방적인 공격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최후까지 모든 유혹의 정복자로 꿋꿋이 서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를 시험할 때는 실족하기 쉽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우리를 범죄로 유도하는 자가 그 책임의 일부를 진다면 우리 책임은 면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불경스런 여인의 모든 유혹에 끝까지 공략되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이 점을 보면 그는 성령의 비상한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2) 반면에 그 여인의 악은 더욱 더 혐오스럽습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도 잘못을 그치지 않고 여러 번 거절 당하지만 제지당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보는 사람은 이방인이며 노예로 끌려온 자입니다.
그러나 그 노예는 너무도 분별심이 있고 자기 주인에게 대해 신실합니다.
더욱이 그녀는 그런 그에게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지 말라는 권면도 받습니다.
그럼에도 수치감을 느낄 줄 모르는 그 정욕은 얼마나 완강합니까?
우리는 여기서 육체의 방종에 의해 예의범절에 대한 존중심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악으로 돌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께 우리안에서 성령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해주시도록 간구합시다.
악과 세상과 정욕과 사단이 끈질긴 만큼 우리도 주의 은혜 아래서 끈질기게 버티며 항거하며 정복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열심히 간구해야겠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는 거의 없는 차원의 고급한 성령의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