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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여성
성경본문: 잠언 11: 14-17
14.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17.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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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8: 1-3
1.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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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 목사
오늘 여전도회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의 모든 여성들에게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산하의 모든 여전도회와 회원들에게도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여성들이 여전도회에 가입하여 함께 교제와 선교와 봉사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는 어느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은 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다 드리고 선교지로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파송 교회의 목사님과 교우들이 다 인천공항에 환송을 나와 기도를 하고 출국해야 하는데 목사님이 출국장에서 쫓겨나왔습니다. 이유는 여권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여권이 위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서 사실을 알고 보니 사모님이 여권의 사진을 떼내고 다른 사진으로 바꿔 붙인 것입니다. 여권의 사진이 잘 못 나와서 예쁜 사진을 다시 붙인 것입니다. 공항경찰은 공문서 위조로 구속하겠다고 하였고 목사님과 교우들이 잘 설명해서 고의가 아니기 때문에 구속은 안되었고 여권은 압류당했습니다. 그 날 선교사님은 혼자 출국하시고, 얼마 후에 사모님은 다시 여권을 발급받아 아이들과 함께 뒤에 출국하였습니다. 자신의 모습에도 이렇게 만족하지 못하고 삽니다. 사진이야 생긴대로 나왔겠지 사진이 거짓말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모님의 범죄가 여성답잖습니까? 범죄라고 하기엔 너무 재미 있고, 귀엽잖아요? 아마 이 범죄는 여성다움의 죄라고 봅니다. 여성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여성다움을 잃으면 더 이상 여성이 아닙니다. 여성의 외적인 아름다움 보다 여성의 내면이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믿음이 아름답고 마음씨가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성이기를 포기하지 마세요. 여성다움은 여성의 모든 삶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성의 여성다움은 교회에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절대로 교회에서도 여성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는 굉장히 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상대적으로 여성에 대한 기사를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나오미, 룻, 엘리사를 곁에서 잘 도와주고 죽은 아들을 다시 얻은 수넴여인,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하던 이방 수로보니게의 여인 등 믿음과 행실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여성의 대명사인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 어리석은 왕비였던 아하수에로왕의 폐위된 왕비 와스디, 자신의 남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했던 욥의 아내, 딸을 시켜 세례요한의 목을 쳐서 소반에 담아오게 했던 헤로디아, 남편과 공모하여 성령을 속이려고 했던 삽비라 등의 어리석고 악한 여인들도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도운 수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곁에 교회를 함께 섬기던 좋은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율리아 등 참 좋은 여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이런 여인들이 없었으면 사역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의 여성의 역할은 한결같이 음지에서 피어나는 꽃 같습니다. 엄청나게 큰 일을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여성의 역할입니다.
파키라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음지에서 잘 자라고 실재 면적이 작은데 비해 잎과 줄기는 넓어 거실에 잘 어울리는 식물입니다. 최근에는 방안에 이런 음지 식물을 두어 공기청정 대용으로, 공해성분 흡착으로 사용합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에 아주 유용한 식물입니다. 여성의 역할도 그렇습니다. 드러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입니다. 알아주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여성과 여성들의 역할을 다시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성은 남성과 인격적으로 동등합니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이 인격적으로 동등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는 민족은 평등사상이 꽃핍니다. 성경을 아는 민족은 개화되고 여성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결코 어느 한 쪽을 우월하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27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합니다. 여기에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창조의 소제가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먼저 지음 받았다는 창조의 순서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공통적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 사람으로 지음받았다는 것, 공통적 인격을 주셨다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남녀의 우월과 열등을 말하고 있는 곳이 없습니다. 남자가 우월하다는 것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고대의 문화적 유산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런 옳지 못한 논리가 근대까지도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을 신학이 대변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 신학자들이 여자는 영혼이 없다, 흑인은 영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것 뭐 있겠습니까? “백인 남성만 영혼이 있다”고 하면 될 것을 복잡하게 한 것 같습니다. 신학이 정권과 전통의 시녀 노릇할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한자문화권도 남성우월주의가 심합니다. 한자어에는 계집 녀(女)자가 들어가는 한자는 거의 다 좋지 못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한자문화, 유교문화 등이 여성을 움츠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고 성경을 알게 되자 이런 구시대적인 문화는 많이 사라지고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여자에 대하여 편향적 남성우월을 얘기하는 듯한 바울까지도 갈라디아서 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합니다.
윌리엄 보더스의 “Handyman of the Lord”(주님의 사환)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흑인 남자가 미국 남부의 어느 한 저택의 벨을 눌렀습니다. 배가 고파 밥을 좀 얻어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집에서 나온 주인은 “뒷문으로 와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흑인은 이 말을 들었고 뒷문으로 가서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택의 주인 남자가 뒷문에 나타나서 “우선 식사 기도부터 하시오. 자, 따라해 보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굶주린 그가 따라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틀렸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나 흑인 남자는 완강히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집주인은 흑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째서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라고 하는가?”. 흑인 남자는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형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빵 한 조각을 주겠다고 형제를 뒷문으로 오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동일한 분일 리가 없으니까요”.
이런 불평등의 사고는 기독교인에게도 피치 못하는 부분입니다. 인종에 대한, 여성에 대한, 물질에 대한 불평등은 인간 사회에 팽배한 인간의 장벽입니다.
기독교는 평등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에는 평등 사상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면 개화되고, 개혁되고, 민주화되고, 사회가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여성을 폄하하여 교단적, 교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정서적 편견을 마치 성경적인양 해석하여 또다른 비신앙을 자아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러분은 몬테소리학원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1907년에 노동자 자녀를 위한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몬테소리 방식의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몬테소리는 “나는 여자 의사가 아니다. 나는 단지 의사이고 공교롭게도 여자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유독 여자만 “여”자를 붙입니다. ‘여의사’, ‘여군’, 심지어 교회에서도 ‘여목사’, ‘여장로’라고 합니다. 교회는 용어나 생각이 평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에서부터 남편과 아내가 평등을 실천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가정에서 행복할 수 없는 여자는 어디에 가도 행복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지켜줘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꼭 존댓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 아내가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가정에서 내 아내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둘째, 여성은 남성과 다른 역할이 있습니다.
남녀에 있어서 안과 밖의 개념은 예로부터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에게만 집약된 문화논리입니다. 아내를 안 사람이라고 부르고, 남편을 바깥 양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문화적 유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업 주부도 많고, 바깥 일을 가지는 아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원래 아내는 ‘안의 해’란 뜻이라는데 이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밖해”든 “바개”든 호칭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남여의 역할은 전통적이 될 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건강한 가정은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조화를 이룬 가정입니다.
지난 주간에 요즘 한참 많이 말하는 사이쇼 히로시의 ‘아침형 인간’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원래 새벽형 인간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봤는데 의사인 저자가 의학적으로 아침형 인간이 좋다는 것을 조목조목 썼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보면 “세계보건기구(WHO)가 규정한 것에 따르면 건강은 조화로운 상태를 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은 조화로운 상태입니다. 조화가 깨지면 건강치 못합니다.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회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한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각자의 역할이 잘 분담되고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어느 배에 선장과 무뚝뚝한 기관장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에 항해에 누구의 전문적 기술이 더 필요한지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하루동안 임무를 바꾸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기관장은 갑판에 올라가서 배를 돌봅니다. 선장은 기관실에 내려가서 기계를 만집니다. 몇시간 안되어 기름으로 얼룩진 채 땀을 흘리며 선장이 올라왔습니다. “기관장, 기관실로 좀 내려와, 배가 안가” 그 때 기관장은 “배가 좌초됐어요”라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역할을 바꾼 결과는 좌초하여 배가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서로의 역할은 배가 움직이는데 다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남성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여성을 평가절하하면 안됩니다. 당시와 같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을 세운다는 것은 효율적이 못됩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전해도 듣지 않고, 남자가 가도 받아주지 않을 때입니다. 이런 때에 왜 여자를 세우고 효과 없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에는 요안나란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에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왕실의 고위관리인 헤롯의 청지기 구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마지막 부분에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준 예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이 왕의 신하가 구사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아내가 너무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서 왕궁에서 실직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구사가 일찍 세상을 떠나 요안나가 예수님의 여제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돈궤에 재정을 채우는 일을 요안나와 여인들이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지에 먼저 가서 준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드러나지 않고 숨어서 물질로 봉사한 사람들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서부터 십자가까지 따른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숨은 제자라고 하는 니고데모는 밤에 찾아왔지만 요안나는 낮에 찾아와서 따른 떳떳한 제자였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이 여인은 십자가와 부활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도 신분이 높은 쪽은 여성이었습니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여성들은 음지에 살았지만 여제자들은 오히려 양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제자들은 참 강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복제 동물들은 모두 암컷입니다. 체세포에 전기자극을 하면 혹독한 시련을 당합니다. 여기에서 생존력이 강한 여세포만 착상이 됩니다. 남자가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여성이 훨씬 강합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강합니다. 우리 나라의 평균수명도 남자는 72.9세를 살지만 여자는 80세를 삽니다. 교회의 여성은 강합니다. 여성들이 없는 교회의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의 교회에서의 역할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상을 받지 말고 인정받지 않아야 하늘나라에 가면 인정받고 상이 크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할 말이지 다른 사람이 강요할 말은 아닙니다.
폴 투르니에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책에서 “나는 남자가 결코 여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여자도 남자를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이성을 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여성의 섬세성은 교회의 힘입니다.
예수님 곁의 여인 가운데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은 마리아가 많았습니다.
그 외에도 오늘 성경에 나타난 요안나와 같은 훌륭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힘이 되고, 동역자가 된 여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힘이었습니다.
잠언 11:16에는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유덕한 여인은 존영을 얻습니다. 한국 여성의 노동의 양과 질은 세계 최고입니다.
제가 어릴 때까지만해도 어머니는 밤 늦게까지 일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하시고, 옷도 다리시고, 양말도 전구를 넣어 꿰매시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시고, 밤이 되어도 주무시지 못할 정도로 일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이 세상에 늙어서 허리가 굽는 것은 한국 여성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일을 많이 했기에 허리가 굽겠습니까?
흔히 노동의 질을 논할 때에는 네가지 요소를 가지고 가늠합니다.
첫째는 부하성(負荷性, Burden)이라고 합니다.
물건을 들어서 옮길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지게차와 같은 기계가 발달하여 부하성은 별로 따지지 않습니다.
둘째는 섬세성(纖細性, Delicacy),입니다.
일을 섬세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 여인들이 유난히 손이 발달한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셋째는 지속성(持續性, Constancy)입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끈기를 말합니다.
넷째는 복합성(複合性, Compound)입니다.
어느 한 가지 일이 아니라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한국 여인들은 복합성이 굉장히 발달했다고 합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따지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노동의 질이 높습니다. 특히 한국 여성들의 노동의 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대가는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지위 없이 직능만 있어도 묵묵히 일했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있습니다. 사회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사에 보면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일은 주로 여성이 합니다. 그래서 신전에는 주로 여제사장들이 일을 보았습니다. 여성의 종교심이나 여성의 신통력은 지금도 남성보다 월등합니다.
잠언 31:10에는 말합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지금도 교회는 이런 진주 같은 여인들에 의하여 굳어지고, 성장하고, 모습을 갖추어가도 있습니다.
결론
스펄젼은 “경건한 여성은 남편에게 사라가 되고, 동료들에게 마르다가 되며, 주의 말씀에는 마리아가 되는 여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라는 남편을 위하여 위로하고 헌신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마르다는 손이 부지런하여 대접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말씀 듣는데 열정적이었습니다.
이런 여성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이런 여성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 모든 여성이 이런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 14:1에는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여성다움과 성경적 지혜를 가지고 사랑받고, 존경받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영성들, 여전도회 회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여전도회가 더욱 교회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발전하고 주님께 영광 많이 돌리는 여전도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