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버킷리스트 여행
나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들어찬 자리에는 어느덧 돌멩이 하나가 들어차 있었고
언제 죽을지 안다는 건 겪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슬픔이기에 시한부 인생이란 단어 자체만으로도
슬퍼질 수 있다는 게 있구나.... 라며 혼자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가족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허전함과 아픔의 무게를 알기에 남편인 나는 아내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결국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고 남은 시간은 아내를 위해 모두 쓰기로 했습니다.
암은 아내의 시간을 멈추게 할 만큼 지독했지만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기약하며 아내는 시간을 대들보에 매어둔
것처럼 하루하루 버텨주고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퇴직하고 아이 둘을 출가시킨 우리는 도시 인근에 자그마한 텃밭이 딸린 집을 얻어 우리의 인생만을
위해 살자며 굳게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여보! 고생 많았어”
“이제 자식들 제갈길 가고 우리 의무도 다 했으니 나머진 삶은 오직 우리 둘 만의 인생을 살아봅시다.”
그동안 서로 사랑한단 말보다 미안하다 말을 더 많이 하고 살아온 세월 앞에 난 당신만을 위해...
저도 당신만을 위해..... 살기로 했었답니다.
아내는 지금 암투병 중입니다. 언제 죽을지 안다는 건 겪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슬픔이기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뼛속을 도는 아픔이 만든 커다란 돌덩어리에 억눌린 채 빗속에 또 비가 되어 흘렀습니다.
시한부 인생이란 단어 자체만으로도 슬퍼질 수 있다는 아내의 말을 되새기면서....
복도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재단하듯 비수처럼 꼽히고 맙니다.
“아빠, 지금 생일 케이크가 문제에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엄마한테...... “
“알았다, 그만 돌아가거라....”
아들의 말을 바람의 언어로 남겨둔 채 병실로 돌아온 남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광택 낸 입술로
애써 웃어 보이며 아내의 손을 잡습니다.
“오늘 당신 생일인걸 알아 그리고 우리 결혼기념일이기도 하고.. ”
남겨질 이들의 슬픔 앞에 아내는 처음 기억이 난양 미소만 띤 채 “벌써. 고마워요, 여보 기억해줘서”
“아이들이 엄마 생일이라고 생일파티 하자는 거 겨우 달래 보냈지 뭐야....”
남편은 말없이 붓 끝에 맺힌 눈물로 책을 읽어주고 있었지만 말은 입에서 나와 귀에서 죽는다더니
아내는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기에 서글픈 마음은 감추어진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꿀꺽거리는 슬픔들 사이로 눈을 감고 누운 아내를 내려다보는 남편은
“당신 기억나 당신 생일날 우린 웨딩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결혼식 올리던 거”
“여보, 나 당신과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어디,,” “우리가 처음 만나든 곳”
그 당시 대학생이었는 난 "오면 고동이란 생선회 실컷 먹게 해줄게.."란
말에 방학이라 보라색 배낭을 메고 친구의 어촌마을에 놀러 가게 되었고
“회는 어딨어...” “따라와 봐 그건 우리 오빠가 전문이거든” 라며 이끌려간 그곳에서
“바닷가 외진 곳에 자그만 텐트 앞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통기타를 치다 날
보고선 가난한 집 창문처럼 웃어 보이며 수면을 걸어오는 배처럼 다가오던 모습이 내가 첨 본 당신이었어...”
까만 밤에 물살에 일렁이는 작은 돛단배를 보며 파도의 음표 소리에 맞혀 기타의 선율 따라 나지막이 불렀던
그때 그 노래... “밤배....”
검은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밀려만 가네..♪
자갈에 몽돌이 씻기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작은 텐트 앞에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 밤바다를 보며
나란히 앉아 아내는 그때를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여보, 기억나. 바로 여기서.. 첫 키스 한 거....
“무슨 여자가 늦었는데도 첨본 남자 옆에 찰싹 붙어 안가길래.. 키스해 달라는 줄 알았지..”
“에게게... 당신이 나 몰래 돌멩이를 어두운 곳으로 던져놓고선 내가 놀라서 가까이 오게 하려고
그랬던 거잖아요” “어ᆢ 당신 알고 있었네...이런 엉큼이... "
동튼 새벽 저 노쇠한 배처럼 밤새 아픔의 언저리에서 흘러나오는 옛날이야기 하나 부여잡고 울다 울으며
“여보.. 우리 아들 장가보낼 때 기억나 어찌나 눈물이 나든지.. 둘째 대학 입학식 때도.. 울었지 아마...”
“여보 우리 다 알아 게임할래요... 내가 다 알아하면 당신은 “비밀로 하자했는데”라고
말하면 돼요 ” 신이 난 아내는 실타래 풀어놓듯 지난 이야기 한 줄을 거푸 꺼내어놓습니다.
“친정엄마 병간호 한다고 친정에 가 있었을 때 그렇게 아파 입원까지 하면서도 나에게 비밀로 한 거 다 알아.”
“ 비밀로 하자 했는데,....“
적금 탄 돈 친구한테 빌려줘 못 받았다 한 거 그 돈으로 울 엄마 병원비 준 거 다 알아...
“ 비밀로 하자 했는데.”
“그리고 백수처럼 늘 놀기만 하는 우리 오빠 트럭 야채장사라도 하라며
나 몰래 3년 동안 차 할부금 부은 것도 다 알아” “비밀로 하자 했는데...
“그리고 당신이 나 보내고 밥 안 먹고 매일 혼자 울 거란 것도 다 알아...” .... .... ...
창 없는 창문에 기대어 담아뒀던 눈물로 우는 남편의 고개를 돌려세우며 사랑한 후에 남겨진 것들
앞에 사선으로 내려서는 비처럼 아내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보, 당신에게 새 아내가 생겼으면 좋겠어”
세상에 행복한 이별도 존재하는 거라며 아내의 마지막 엔딩노트는 그렇게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향기로운 인연으로 만나 죽음은 당하는 게 아니라 맞이하는 거기에 삶과 죽음이 다른 선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준 사람.
새벽녁 눈물조차 말라가던 그때 아내는 입가에 여린 미소를 띤 채 사랑했던 사람 좋았던 시간을 떠올리며
마지막 하루 같이 사랑하다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마음 보다는 물러나야 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룰지 알아가는 것이라면서...
펴냄/노자규의 골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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