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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고전 3장16-23)
성경본문:고린도전서 3:16-23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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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로 거룩한 성전입니다.”
얼마 전 장경동 목사님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대접하는 교인과 함께 한 자리였는데, 그 교인이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은 믿음도 부족하고 열심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 잠시 일어나 밖에 나갔다 왔는데 보니까 그 사이를 못 참고 담배를 피우고 온 모양입니다. 원래 유머 감각이 있는 장 목사님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잘 믿고 성령님을 모시려면 담배를 끊어요. 연기가 가득하면 예수님이 답답해서 오시겠소?”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브루클린에 있는 Tabernacle Church의 담임인 Jim Symbala(짐 심발라) 목사님의 [성령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제목입니다.
그 책에 보면 하나님을 믿게 된 한 여성 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한 믿음이 있어서 예배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일어난 변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참석했던 파티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파티를 끊습니다.
자신이 일로 생각했던 속옷광고가 단순한 광고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옷차림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귀함 때문이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되므로 그녀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 이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성전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그 성전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거룩함’이라는 주제는 끊임없는 바울의 가르침이요, 자신도 이 부분 때문에 늘 고민하는 내용이기도 하지요.
우리를 가장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 거룩함이 깨어질 때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거룩함이 지켜지지 않을 때 실망하지요.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가 더럽혀질 때 하나님이 우리를 멸시하신다니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모시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단순한 건물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함 가운데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질책하는 것을 본문 16절에 보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교인들이 성전인 그들의 몸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성전인 성도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성령님이 거하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거하시지 못하면 성령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어서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님이 거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성전인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나요?
‘불경어수(不鏡於水) 경어인(鏡於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지 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는 뜻이지요.
물을 거울로 삼으면 기껏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뿐 아니라 인품까지 파악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거룩함은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거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씀 중의 하나인데, 17절에 보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곰곰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시리니”라는 말이 무엇일까?
그때 저에게 떠오른 인물이 바로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엘기가 98세가 되어 눈이 어두워지자 그의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장 일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제사장보다 그 두 아들은 불량자들이었습니다. 행실만 나빴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였습니다.
제사장이 지켜야 하는 규정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 세 살 갈고리로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만나면 거리낌 없이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상 2장 23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라고 말씀합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의 왕대일 교수가 쓴 [삶에서 그리스도가 빛나게 하십시오]라는 책에 보면 이 부분이 아주 의미 있게 해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악행’을 듣는다! 라는 말이 실제로는 악한 행동이나 행실이라는 의미보다 ‘말씀’이라는 뜻,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랍니다.
불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자기 아들들의 악행을 듣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을 통해 증명되지요.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의 상황을 사무엘상 3장 1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렇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불경어수 경어인”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먹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어야 합니다.
당신의 거룩함은 바로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신앙생활 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아주 못 견디게 하는 교우들, 친구들, 동료들의 모습 가운데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불행스럽게도 아들의 악행을 보았지만,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보지 못했던 엘리의 가문은 패가망신하고 맙니다.
그 아들 둘이 다 불행하게 죽임을 당하고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끝이 납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난 후에 지도자들이 모여서 패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논의한 끝에 다시 전쟁에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나가 싸웁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들고 나갔는데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궤를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거룩하지 못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법궤는 어떤 능력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이제 엘리와 그 아들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룩한 직분을 사무엘에게 넘겨주고야 맙니다.
거룩한 직분은 거룩한 사람을 통해서만 담당케 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의 몸을 더럽히지 마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것이니 우리의 몸도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도 거룩함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이 세상의 더러움과 분리되는 것이라면, 지혜 역시 세상의 지혜와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8~1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요,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은 자기 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곤혹스러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성급함이, 때로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혹시 들어보셨나요?
어떤 남자가 약국에 들어가 말했습니다.
“딸꾹질 멎는 약 좀 주세요.”
“예, 잠시만요.”
그러면서 약사는 약을 찾는 척하더니 갑자기 그 남자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그리고는 히죽거리며 말했습니다.
“어때요? 딸꾹질 멎었죠?”
그러자 남자는 약사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나 말고, 우리 마누란데….”
성경은 지혜에 관한 한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계획도 아무리 세밀하게 세워도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압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찬양이 있습니다.
<내 이름 아시죠>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셨죠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1장 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꾀를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형편을 바꾸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능히 이길 힘을 구해야 합니다.
여기에 신앙과 비 신앙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혜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하늘로부터 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귀를 열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얼마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느냐에 따라 그만큼의 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을 보세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난 다음에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전에는 자신의 판단과 결정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늘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도,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과 사상에 끊임없이 드러나는 일관성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드리지요.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기도가 틀어졌을 때,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많은지 말입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것이 최선의 것인 줄 알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섭니다.
얼마 전 어느 기도원에서 이삭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그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그랄 사람에게 우물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은 자신이 받은 축복을 버리고 쫓겨날 때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러면서 점차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그를 쫓아냈던 아비멜렉과 그의 친구들로 하여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창 26:28)
이삭이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완전한 승리를, 그리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이 와서 파놓은 우물을 차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권면합니까? 18절을 보세요.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원리를 가지고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 신앙인들이 겪는 갈등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법칙과 성경의 원리가 맞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아가면 세상 사람에게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당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리석게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삶의 지침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육체의 본능대로 살면 동물이요,이성을 따라 살면 인간이요,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우리를 향해 주시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인간으로 살 것이냐?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이냐?”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지혜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라면,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교회의 문제를 자꾸 세상의 잣대로 재려고 해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선교사 로스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개신교 역사를 보면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말씀을 깨달아 개종한 청년들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사건입니다.
1872년 8월 23일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소속으로 중국 땅을 밟았던 로스 선교사는 본래 만주에 있는 중국 사람을 선교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존 로스는 만주에서 정작 중국 사람보다는 아직 서양에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나라 조선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주에 도착하자 그는 6년 전 셔먼호를 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죽임을 당한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스는 결혼 1년 만에 아내와 사별해야 하는 아픔을 겪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은둔의 땅 조선에 복음의 문을 열겠다는 것은 새로운 선교의 비전이 되었고, 1874년과 76년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지대였던 압록강변의 고려문까지 가서 조선 상인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스의 우리말 선생이 되었던 이응찬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의주 상인 서상륜과 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1878년부터 로스는 이들의 도움으로 요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 로마서 등을 차례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1886년에는 신약의 완역이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의 최초의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복음이 들어와 있었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조선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존 로스가 중국 선교사로 왔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조선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주에서 당한 로스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을 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유 없는 고난을 겪는 것처럼 생각했던 욥의 고백을 기억하시나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의 풍성함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준비하며 묵상하는 중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21절이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Living Bible>에서는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So don't be proud of following the wise men of this world” 또한,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라는 말은 “For God has already given you everything you need”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헛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이 쓴 책을 읽다 보니까, 중국이 개방된 지 얼마 안 되어 만리장성을 방문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경 대학생의 안내를 받으면서 구경을 하는데 만리장성을 보는 순간 ‘굉장하구나!’라는 탄성이 나오더랍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나지막이 하는 말이 “미련한 짓이지요.”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것만 막으면 나라가 튼튼하리라고 생각했으니 미련한 짓이요, 그런데도 그 많은 사람을 죽여가면서 이 성을 쌓았습니다.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것이 만리장성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웃으십니다. 인류역사상 어떤 인간의 구상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헛것으로 아십니다.
얼마 전 ‘적벽대전’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한나라 말 권력을 잡고 막강한 병권을 쥐고 있었던 조조는 악인으로, 힘은 없지만 적벽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는 유비와 손권, 제갈량과 주유가 지혜 있는 자로 그려집니다.
80만 대군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키며 승리를 확신하는 조조가 얼마나 어리석은지가 적벽대전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제갈량의 지혜에 비하면 조조는 빛이 발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제갈량도 천하를 통일키지 못하고, 유비도 손권도 단지 역사상의 인물로 사라져 갈 뿐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참다운 지혜란 사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을 얻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 허용하는 한도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행할 것, 생각하는 것을 모두 알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세상에 대해서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신앙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의 물결은 타되 세상의 물결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좀 바보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 가면 꼭 팁을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팁을 놓을 때는 그만큼 서비스를 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면 돈을 조금 놓습니다.
그런데 저는 좀 미련합니다. 팁을 받아야만 사는 사람이 조금 부족해도 돈을 풍족하게 놓습니다. 나의 만족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물건을 사고 속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값을 깎고 사는 물건은 많이 깎았다고 절대 기쁘지 않습니다.
물건을 사서 오다가 보면 그렇게 깎아주는 것을 보면 더 많이 깎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왠지 속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세상을 똑똑하게 사는 것 같은데, 그 똑똑함과 지혜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인생 최고의 가치는 마음의 평안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27절을 보세요.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가장 현명한 여러분의 삶에 선택은 하나님을 인정할 때 와지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세상에서 하는 대로 살아가면서 몸이 편한데 마음에 평안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데 힘이 들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이 있지 아니한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강력하게 주시는 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한번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오.
세상에 대하여 한번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억울하십니까?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까?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듣습니까?
여러분이 모자라서 듣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가 여러분을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실천하는 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You belong to Christ!”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게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