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 태극권의 탄생
양징보(楊澄甫)는 양로선의 손자다. 양징보는 체구가 장대했다. 무예가 당대 최고였다. 대결에서 진 적이 없었다. 태극권의 역사를 말할 때 특히 그를 손꼽는 까닭은, 지금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유행을 하고 있는 태극권이 알고 보면 양징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양식 간화태극권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다.
청말 당시 중국 대륙은 서방 세력의 침탈과 근대화의 물결로 상상불가의 대 홍역을 치루고 있었다. 서방 세력들은 총칼과 대포를 앞세우고 침략해 들어왔다. 전근대적인 무기밖에 기댈 데 없는 청나라는 속수무책이었다. 각지에서 분기한 의병들이라고 해볼 도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협심이 뛰어난 무술인들도 들고 일어났다. 허나, 가진 게 ‘권(券)’과 ‘검(劍)’과 ‘창(槍)’이 전부인 그들은 서양인들의 근대식 화력 앞에서 대책 없이 무너졌다.
양징보는 시대를 읽는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의 안목은 목전에 벌어진 사태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었다. 무술의 시대가 갔음을 직감했다. 무술로 권력을 획득하고, 무술로 국가를 지키고, 무술로 자기를 방어하는 시대는 끝났던 것이다. 그는 간혹 도전자가 나타나면 손발을 부러뜨려놓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는 이상하게도 그 부상당한 도전자를 몇 달이고 치료해서 보냈다. 이는 더 이상 무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묵언의 시위가 아닌가 해석되는 바가 있었다고. 양징보는 생각했을 것이다. 태극권의 효용 가치는 이제 무엇인가? 오로지 권법에 미쳐 살았던 그였다. 그의 혜안은 활짝 열렸다. 이제는 ‘양생(養生)’이다.
그는 태극권의 양생적 쓰임새에 주목하고 이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궁리했다. 태극권이 더 이상 몇몇 권가의 비전(秘傳)으로서 쓰이는 시대는 지났다. 진씨든, 양씨든, 박씨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원하는 자는 다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명을 기르는 일에 있어 태극권만한 것이 있는가?
대중화하자. 여성과 노인과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잘 기르기 위한 최선의 꿍푸, 그것이 태극권이다. 살상하는 에너지를, 기르고 살리는 에너지로 바꾸자. 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삶에 공헌하는 태극권을 만들자. 배우기 쉬운 태극권을 만들자.
간화태극권은 그렇게 나왔다. 일반적으로 양가전통식을 말할 때는 양징보가 이미 간화(簡化, 간단하게 만든 것)한 투로의 전형을 말한다. 양식태극권은 간화태극권의 선봉 역을 잘 담당하였다. 훗날 중국 정부는 인민체육위원회를 만들고 이를 통해 각 유파들의 태극권을 보급하기 쉽게 표준화시켰다. 태극권이 인민들의 건강을 위해 봉사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의 모든 대학들에서는 교양과정으로 태극권을 필수적으로 가르친다. 인민광장과 공원들에서는 아침마다 태극권의 물결이 넘쳐난다. 태극권은 세계화되었고, 태극권의 인구는 요가 다음으로 많게 되었다.
장삼풍과 소림사
진가구를 나왔다. 다음 행로는 소림사로 향했다. 뭔가 특별한 한 건을 기대했던 진가구는 생각보다 건질 게 없었다. 무엇보다 기대했던 유수한 사범들의 지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 방문 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사범도 전인(傳人)의 계보에 명단만 차지하고는, 현지에 없었다. 진가구의 후예들은 진왕정이 태극권의 역사적 창제자라고 주장한다. 신화적 전승을 부정하는 견지에서 보면 일리가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자긍심은 작지 않다.
그러나 나의 관점으로도 일단 진가구 발원설은 온당치 않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연구원인 이원국 교수는 태극권은 무당산의 장삼풍(張三豊)이 창시했다고 단언한다. 그는 무당산 도관들에서는 태극권 등 십여 종의 ‘무당꿍푸’가 스승과 제자의 맥락을 통해 면면히 유전되고 있고, 전인들은 중국 대륙의 곳곳에서 ‘무당삼풍 태극권’을 보급하고 있음을 증거로 든다.
내가 여러 자료를 통해 듣고 본 바로도 그렇다. 사실 난 이번 여행길에서 이런 정황과 증거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태극권 전승의 어느 과정에서 진가구가 중심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내가 전수받은 전통 108식도 알고 보면, 바로 이곳 진가구에서 인생의 한 시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양로선이 만든 것이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이번 방문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싸부의 말로는 장삼풍은 본래 소림사의 승려였다고 했다. 소림사에서 장삼풍은 최고의 제자였다. 무술로도, 지혜로도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천재 장삼풍은 달마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소림권을 정통으로 섭렵했다고 전해진다.
달마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가운데 ‘역근경’과 ‘세수경’이 있다. 그 중 역근경의 원리를 원용하여 만들어진 꿍푸가 소림권이고, 세수경의 원리에 노자도덕경과 주역의 원리를 혼융하여 만들어진 꿍푸가 훗날의 태극권을 비롯한 무당산의 내가삼권(內家三券)이다. 그러니까, 나중 일까지 포함하여 미리 말하면, 장삼풍은 본래 소림사의 종조인 달마의 최고 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교 역사상 무당산의 개산조사로서, 태극권과 형의권, 팔괘장의 내가삼권을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산문을 통과해서 나를 포함한 일행은 영화 ‘소림사’의 명장면이 연출되었던 바로 그 대문 앞에 섰다. 역사적으로 이곳을 출입하였던 사람들은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달마도 문이 닳도록 이 문지방을 넘나들었을 것이고. 일반인들에겐 소림사 하면 ‘이연걸’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지금 내겐 달마도, 이연걸도 아니다. 장삼풍의 자취가 더 궁금했다.
장삼풍의 사부는 당시 소림사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있었다. 사부는 제자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권력이란 무섭다. 종교 권력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가장 아끼는 제자, 가장 특별한 제자의 앞길에 대해 사부는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그리고 제자 장삼풍을 조용히 불렀다.
너는 당장 이곳을 떠나 무당산으로 가라! 무당산 금정봉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 너의 도를 완성하라. 그리하여 그의 불가와의 인연은 이렇게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