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밀라노(Milano)는 롬바르디아주의 주도로, 로마에 이어 제2위이며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의류와 섬유산업은 예로부터 번성하였지만, 근래에는 항공, 자동차, 정밀기기 산업도 발달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경제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인구는 약130만 명이나 도시 주변을 포함한 인구는 약 530만 명으로 이탈리아의 최대 도시다. 인구의 14%가 외국인인 다국적 도시로, 금융과 대기업들이 본사를 두고 있는 경제수도로 세계의 패션디자인의 중심이며 산업, 음악, 스포츠, 문학, 예술, 미디어의 중심지이기도하다.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 평균 기온이 약 5℃ 정도로 춥지 않다. 지리적으로는 포 강(Po River) 남쪽과 알프스 산기슭 구릉지대 사이의 포 계곡(Po Valley)북서쪽에 위치하며, 북으로 코모와 마조레 등의 거대한 호수들이 있고, 서쪽으로는 티치노 강이, 동쪽으로는 아다 강이 흐른다. 평평한 지형으로 가장 높은 지대가 해발 122m이며 행정상 면적은 약 181㎢다. 외곽으로 바레세, 코모, 레코와 베르가모등, 많은 코무네(자치공동체)들을 흡수해 가며, 북쪽으로 팽창중이다.
이 도시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BC 600년경 갈리아족이 정착했던 밀라노는 수세기 동안 켈트족의 수도였다. BC 222년 당시에는 메디올라눔이란 지명으로 로마인 지배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가 된 밀라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에 이어 제2도시로 성장했다.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를 동서로 나누면서 밀라노는 황궁소재지와 행정 중심지로 부상했다.
374년에 성(聖)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면서부터 밀라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452년 훈족 아틸라의 침략을 받았고, 539년에는 고트족에 의해 도시가 파괴당했다. 8세기 말에 샤를마뉴가 밀라노 지역을 지배하게 된 무렵부터 밀라노 대주교의 권력이 강해져 9세기말에는 도시의 붕괴된 성벽이 재건하자, 전란을 피해 밀라노로 몰려든 인구도 증대하여, 11세기에는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천년에 걸친 대주교의 지배는 밀라노가 발전하는 근원이었지만, 대주교의 권위가 실추되자 정치 구조는 자치도시로 바뀌게 되었다. 롬바르디아 주변도시들 간의 다툼으로 밀라노는 파비아, 크레모나, 코모, 로디 같은 주변의 도시국가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치렀다. 그들이 밀라노의 로디를 침공하고 1118~27년에 걸쳐 코모를 파괴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는 사태에 개입하여 밀라노를 직접 통치하에 두기로 하였다.
1167년에 새로 확립된 롬바르디아 동맹의 후원에 힘입어, 밀라노는 1176년 프리드리히 1세를 격퇴하여, 이후 100년 이상 경제적 전성기를 누리면서 제조업자 길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계층의 영향력을 증대시킴으로써 교회의 재정적 특권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1237년 밀라노는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게 패하자, 토리아니 가문과 비스콘티 가문과의 투쟁 하에서 공국시대가 시작되었다. 토리아니 가문은 구엘프라는 이름으로, 비스콘티 가문은 기벨린을 이끌었다.
산업이 더 많은 세력을 가진 경제 동맹체를 탄생시키면서 밀라노는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1450년 밀라노는 용병출신으로 비스콘티의 딸과 결혼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에게 다시금 점령당했고 그는 새 왕조를 열었다.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와 견직물 산업으로 번영의 시기를 맞은 이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시대이다. 루이 12세의 후계자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승리로 밀라노를 재정복했으나 1529년 평화조약의 조건에 따라 밀라노는 다시금 스포르차 가문으로 넘어갔다.
밀라노는 후기 로마 제국 북부의 수도여서, 로마의 교회보다도 더 오래된 교회가 몇 군데 있어, 두오모 대성당(Duomo Cathedral)은 밀라노의 심장이며, 서쪽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으로 한 달 전에 예약을 하고 입장해야 한다.
밀라노 대성당
밀라노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오는 5세기 초에 지금의 대성당 자리에 바실리카를 세웠고 836년에는 인접한 곳에 같은 양식의 바실리카가 신축되었으나 1075년에 화재가 덮쳐 소실되었다. 1386년 밀라노 영주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공작의 후원으로 사촌인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가 이 자리에 새 성당을 세우기로 하여 대주교 궁전과 오르디나리 궁전과 성 스테파노 세례당을 철거하고, 수석 엔지니어 아래로 300여명의 두오모 건축공방을 만들어 엄격한 통제 하에서 두오모를 기공하였다.
갈레아초는 공방에 칸돌리아 대리석의 독점 사용권을 주었고, 세금을 면제하였다. 일부 석재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구(舊)성당에서 석재를 사용토록 하였다. 작업의 진척도 순조로워, 갈레아초가 1402년 사망 무렵에는 대성당의 거의 절반이 완공되었다.
이후 진행과정에서 16세기 중반에 고딕 대신 르네상스 양식의 외관을 지향하여 기둥과 로마양식의 외관을 설계하여 실내 장식 작업을 계속하였다. 1577년, 전체 건축물을 구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과 구별되는 새로운 성당으로 축성하고, 1585년에는 사제관을 개축하였지만, 1649년에 새 수석 건축가는 외관을 처음의 고딕 양식으로 되돌리고, 이미 완성된 세부장식들은 고딕 벽기둥과 두개의 종탑 내부에 집어넣었고, 1682년에는 대성당의 지붕 덮개를 얹고, 1762년에는 마돈니나의 첨탑을 세웠다.
1805년 나폴레옹은 대성당에서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면서 프랑스가 건축 비용을 부담할 것을 보장하자, 새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소아베는 세부 장식을 위쪽 창들에 덧붙이면서, 나폴레옹의 조각상을 한 첨탑의 꼭대기에 설치하였다. 1829년에서 1858년 사이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새 것으로 교체되었다. 1965년 1월 6일에 출입구가 완공됨에 따라 약 600년 만에 정식으로 완공되었다. 밀라노 대성당은 첨탑과 화려한 내부 장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딕 성당으로는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하늘을 찌르는 135개의 뾰족탑과 2,000여 개의 성인들의 조각상과 꼭대기에는 서있는 황금빛 마돈니나가 번쩍인다.
위풍당당한 대성당 입구의 청동문은 루도비코 폴리가기 작품으로 ‘예수 태형’ 부조를 만지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속설로 사람들이 매만지고 소원을 비는 문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엄청난 크기에 놀란다. 52개의 열주가 늘어서 있어 다소 어둡게 느껴지고 햇살이 스며드는 길고 좁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 내부를 성스러운 분위기로 만든다. 벽에는 당대의 유명화가 그림이 많이 걸려 있지만, 여타 이탈리아성당에는 많은 그림이 장식되어 있어 잘 알려진 유명작품이 아니면 일단 주목거리에서 빠진다. 이 벽과 외부로 나와 계단을 따라 맑은 날에는 알프스 산까지 보인다는 성당의 지붕에 올라가면 성모상(마돈니나)이 가까이서 보인다. 옥상 바로 아래에 있는 전망이 괜찮은 카페의 커피가 훌륭하다.
내부는 본당, 익랑(翼廊), 주보랑(周步廊)이 달린 본전(本殿)으로 되어 있고, 천장은 계단 형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외벽은 대소의 부벽(扶壁)과 번잡할 정도로 많은 소첨탑(小尖塔)으로 장식되어 호화로우나 통일감이 결여되었다는 평도 받는다. 성당 길이는 158m이며, 너비는 92m로 1386년 시공에 들어가 19세기까지 5세기 간의 공사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건설 기간을 기록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초청되어 성당 건축에 참여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다.
밀라노 광장
육로로는 알프스 북부의 대륙들과 이탈리아 중남부와의 교역의 연결점이며, 코모호수와 마조레 호수에서 발원하여 아다강과 티치노강이 밀라노를 싸돌아 포강으로 합류하여 해상교통의 편리함마저 갖춘 밀라노는 급성장하여 13세기 중엽에 비스콘티 가문이 군주제를 열어 비스콘티 시대를 열어 14세기 후반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때는 베네치아와 더불어 본토 최강의 도시국가로 떠올라 공작령을 선포하고 두오모 착공을 시작했다.
이어 용병대장 출신으로 아들 없는 비스콘티 가문의 왕녀와 결혼함으로써 비스콘 티가문을 이어받은 스포로차(1401-1466년)는 밀라노의 제2 전성기를 열어 베네치아 통령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코시모 메디치와도 친구 관계를 유지하였다. 스포라차성은 지금 밀라노 시립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여기에는 말년의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 론다니니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가 오히려 마리아를 부축하는 형상으로 시스타나의 피에타와 다른 감동을 준다. 1950년대에 구입한 것으로 박물관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중에서도 그의 최후의 작품을 소유하여, 그의 작품을 소유한 박물관이 되었다.
두오모 광장은 밀라노 중심 광장으로, 마주보고 서있는 두오모 대성당의 명칭을 따서 명명되었다. 약 17,000㎡의 광장은 지리적으로도 밀라노의 중심일 뿐 아니라, 문화, 예술과 상업의 중심이기도 하다. 14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광장은, 역사를 거치는 동안 지금의 규모로 확장되어, 현재의 광장은 19세기의 건축가 주세페 멩고니(Giuseppe Mengoni)에 설계에 따른 것이다. 통일된 외관을 가진 건물로 광장을 둘러싸는 그의 설계에서 이탈된 것은 두오모와 밀라노 왕궁뿐이다. 광장에 접해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도 그의 디자인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는 밀라노 중심에 있는 아케이드로 2개의 아케이드에 덮여있고, 광장의 북쪽에 위치한 스칼라 광장으로 통한다.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을 딴 이 곳은 1861년에 최초로 디자인 되었고, 아치형 유리와 철제 지붕으로 덮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