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네 개의 영혼
1길조여
중흥사도 타고
대화궁도 탔드라
절벽 밑에 큰 돌을 달아놓고
밤낮 바라보아
안목을 길렀드라
보이누나
유월에 비 내리고 비 내리고
십이월에 긴 눈 내린다
수월히 살기가 가장 수월쿠나
너무 수월하매
잠 못 드는 밤이 잦았드라
길조여.
2
무관계여
오고가는 세월
봄날의 바람소리
늦가을밤의 짧은 종소리
선조들은
불편하여
자주 강화로 내뺐드라
눈 덮인 초겨울의 뜰에
그림자처럼 떨며
궁궐 쥐구멍에
햇빛이 드는 것을 보드라
나이 들어 친구를 몰래 사귀드라
무관계여.
3
고구마로 빚은 술이
입에 달지 않드라
몸이 마르면 옷을 줄여 입고
천연스레 여자를 만나서
긴 이야기를 들려주드라
해탈처럼 쉬운 건 없지
매일밤 해탈에 탈피까지 하고
아침이면 한 바퀴 돌아
제 자리에 와 있드라
매일 난파하는 꿈 꾸고 깨어
누룩 뜬 술을 조금씩 마시고 자지
아침이면 기억에도 확실히
눈부신 해가 매일 뜨드라.
4
이제는 참 사람 없는 해변을 걷기가 겁이 나데
아직 늙지 않은 건
남포뚝 계집이 모두 안다만
어쩌다 죽고 싶어지지 않을까 겁나데
내 죽음을 아까워들 한 만큼
크게 진 빚도 없으니
주머니에 손이나 찌르고
뭉게구름 피는 아래서
뱃놈들이 싸우는 거나 구경하고
폐선에 웅크리고 앉아 담배나 한대 피우고
어슬해서 돌아오는 해변 참 겁나데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지만
바다보다는 내가 먼저 어두워지데.
11. 논 1
쌀이 불쌍하다
우리는 논에서 죽었다
십삼촉보다 어두운 가을 어스름에
무섭게 밟히는 소리들
숨쉬어 보아라
낫날이 빛나지 않는다
시간의 전모가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움직인다
해오라기의 형상이 한 떼 날아가고
호박보다 밝은 달이
수수밭 위에 떠 있다
수수밭이 죽어 있다
그러나 움직인다
한 치 한 치가 어두움의 땅이다
움직인다.
12. 더 조그만 사랑노래
아직 멎지 않은
몇 편의 바람.
저녁 한 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출처] 황동규 시모음|작성자 리오
13. 탁족(濯足) - 황동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을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 황동규시집[우연에 기댈때도 있었다]-문지
14. 손 털기 전
누군가 말했다
'머리칼에 먹칠을 해도
사흘 후면 흰 터럭 다시 정수리를 뒤덮는 나이에
여직 책들을 들뜨게 하는가,
거북해하는 사전 들치며?
이젠 가진 걸 하나씩 놓아주고
마음 가까이 두고 산 것부터 놓아주고
저 우주 뒤편으로 갈 채비를 해야 할 땐데.'
밤중에 깨어 생각에 잠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미래를 향해 책을 읽지 않았다.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빨리 비워지고 헐거워진다.
날리는 꽃잎들의 헐거움,
어떻게 세상을 외우고 가겠는가?
나는 익힌 것을 낯설게 하려고 책을 읽는다.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지면
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이다.'
우주 뒤편은
어린 날 숨곤 하던 장독대일 것이다.
노란 꽃다지 땅바닥을 기어
숨은 곳까지 따라오던 공간일 것이다.
노곤한 봄날 술래잡기하다가
따라오지 말라고 꽃다지에게 손짓하며 졸다
문득 깨어 대체 예가 어디지? 두리번거릴 때
금칠金漆로 빛나는 세상에 아이들이 모이는
그런 시간일 것이다. *
* 문태준엮음[포옹,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해토
15. 삶의 맛
환절기, 사방 꽉 막힌 감기!
꼬박 보름 동안 잿빛 공기를 마시고 내뱉으며 살다가,
체온 38도 5분 언저리에서 식욕을 잃고
며칠 내 한밤중에 깨어 기침하고 콧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눈물샘 쥐어짜듯 눈물 흠뻑 쏟다가,
오늘 아침 문득
허파꽈리 속으로 스며드는 환한 봄 기척.
이젠 휘젓고 다닐 손바람도 없고
성긴 꽃다발 덮어주는 안개꽃 같은 모발도 없지만
오랜만에 나온 산책길, 개나리 노랗게 울타리 이루고
어디선가 생강나무 음성이 들리는 듯
땅 위엔 제비꽃 솜나물꽃이 심심찮게 피어 있다.
좀 늦게 핀 매화 향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발을 헛디딘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 있음!
봄에서 꽃을 찾을까, 징하게들 핀 꽃에서
봄을 뒤집어쓰지.
광폭(廣幅)으로 걷는다.
몇 발자국 앞서 뛰는 까치도 광폭으로 뛴다.
이 세상 뜰 때
제일로 잊지 말고 골라잡고 갈 삶의 맛은
무병(無病) 맛이 아니라 앓다가 낫는 맛?
앓지 않고 낫는 병이 혹
이 세상 어디엔가 계시더라도. *
* 황동규시집[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16. 방파제 끝
언젠가 마음 더 챙기지 말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 자국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지는 곳.
동해안 어느 조그만 어항
소금기 질척한 골목을 지나
생선들 함께 모로 누워 잠든 어둑한 어물전들을 지나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
17. 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