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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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 ㅡ이윤학
1 흐린 날 아득하게 저려오는 다리를 펴며 쓴맛으로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약간의 설탕이 나를 녹슬게 한다.
어떤 날은 꿈속에서 나와 발을 씻고 있다. 물은 비어 있고 돌아갈 수 없다 나는,
깨이지 않는 마취에서 영영 가망이 없다. 형광빛 엑스레이로 드러나는 뼈 하얀 뼈 속에 내가 있다.
2 복선으로 깔린 철길에서 잠을 잔다. 하행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상행으로 돌아눕는 잠, 멀리에서 가깝게 오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을 싣고 멀어지기도 한다. 더디게 오고 가는 시간을 선눈으로 느끼고 있는 눌림. 귀는 이미 밑변에서 심장과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 시집 『먼지의 집』/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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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자신이 만든 그늘에 고개 숙이고 평생을 살 여자 있다면, 그 그늘 밑에 신문지 깔고 눕고 싶네
변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짜인지 알고 싶네
버드나무 그늘 벤치에서, 헤 입 벌리고 잠든 남자들
떠나기 위해 매미들은 악을 쓰며 울고 있네
그 여자의 숨소리, 아주 작은 머리카락 흔드는 소리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것들이 헤매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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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징어
바닷가 노상 횟집에서 갑옷을 입은 오징어를 시켰다
갑옷을 벗겨내자 대야 가득 먹물이 퍼졌다
갑옷은 두꺼웠고 질겼다 우린 오징어의 갑옷만을 데쳐서 먹는 것이었다
대야의 물을 쏟아내자 하얀 배 네 척이 먹물을 타고 도랑을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갑옷 네 벌을 나눠 먹었다 오징어 네 마리의 닻 없는 영혼을, 노을의 바닷물에 풀어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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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분식점 ㅡ이윤학
긴 통로 끝에 있는 흰 벽, 헐은 탁자 위에 여자 셋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다.
지나간 분식점엔 주인도 없고 여자 셋이 머리를 맞대고, 플라스틱 접시들을 잔뜩 포개놓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턱을 받친 손바닥이, 두 개뿐인 갈라진 꽃잎이라면 쉴새없이, 무슨 맛을 구걸하는 저 입 모양들이 향기로울 수 있을 텐데.
맞은편, 수족관에서 금붕어들이 꼬리를 흔들며 물 위로 떠오른다. 이젠 배가 불러, 정말 못 먹겠어. 금붕어 입에서, 물방울들이 똥글똥글해진다.
식은 음식인 줄 알고 파리들이, 여자들 얼굴 위에 붙는다. 자꾸 꽃잎을 떼어내는 여자들. 꽃에 붙는 파리를, 멀리 쫓아버리는 여자들.
도랑 끝에 걸린 유리 거울 물결 없는 호수 안에 벌써 늙어버린 백조들을 담고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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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다리 위에
버려진 다리 위에 쭈그리고 앉은 노파가 붉고 매운 고추를 헤쳐 말리고 있다. 한 부대쯤 될까, 군데군데 허옇게 말라버린 고추도 있다. 다리는 축 늘어져 있다. 금방이라도 검은 물 위로,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것처럼 잔뜩 휘어져 있다.
떨어져 나간 난간.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근들이 앙상한 뼈들이, 낡은 골조 속에서 터져나와 녹슬어 있다. 굳은살처럼 여기저기 구멍을 때운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튀어나온 돌들이 매끄럽게 닳아 있다. 바닥엔 아직도 구멍이 여럿 뚫려 있다.
아득한 구멍 속에서, 거품을 몰고 깊이도 없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굽은 허리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노파가 실눈을 뜨고 일어선다. 가을 해가 버려진 다리 위에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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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 2
죽은 줄 알고 잘라버린 호두나무가 뒤늦게 새순을 피워낸다, 새롭게 태어난다! 죽은 줄 알고 묻어버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검불들이, 날아가려고, 꿈틀거린다.
굴뚝 옆에 세워놓은 나무 사다리 검버섯이 피고 있다, 뒤뜰에 딸기꽃이 저절로 하얗게 피어났다.
오줌통이 쉴새없이, 부글부글 거품을 몰아 올리고 역겨운 냄새가 퍼져나간다.
현기증 속을 새들이 날아간다, 물 없이 깊은 물 속을 날아서 간다……
하늘은 언제나 푸르렀고 무너지지는 않았다.
종달새 한 마리가 하늘 끝으로 솟구칠 때 아아아, 엉킨 마음의 실타래도 따라 풀려나간다.
---------------- 황혼의 아스팔트 (외 2편) ㅡ 이윤학
상엿집, 녹슨 함석지붕 햇볕은 그곳을 일찍 떠난다 리기다소나무들, 훌쩍 자라 있다 아는 사람들 해마다 줄어든다 아는 사람 없는 세상을 살지 모른다
그는 어디 갔나? 툇마루에 앉아 보면, 그는 항상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어둠이 내렸다, 그는 길가 도랑에 처박힌 것일까? 앞으로 반 발자국, 뒤로 좌로, 우로, 반 발자국
코스모스 꽃잎을 훑어놓으며 거리낌 없이 자동차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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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하여
점심 무렵, 쇠줄을 끌고나온 개가 곁눈질로 걸어간다. 얼마나 단내 나게 뛰어왔는지 힘이 빠지고 풀이 죽은 개 더러운 꼬랑지로 똥짜바리를 가린 개 벌건 눈으로 도로 쪽을 곁눈질로 걸어간다. 도로 쪽에는 골목길이 나오지 않는다. 쇠줄은 사려지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치는 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밀려가듯 개가 걸어간다. 늘어진 젖무덤 불어터진 젖꼭지 쇠줄을 끌고 걸어가는 어미 개 도로 쪽에 붙어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다. 하염없이 꽃가루가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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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마신다
장대비 그치고 관악산 삼림욕장 상수리 숲 산책로를 걸었다
약수를 마시고 아욱 쑥갓 텃밭을 따라 걸었다 늙은이들 호박 오이를 따 길가에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남자는 자전거 짐칸에 생수통을 묶고 반백의 머리 숙이고 걸어가고 있었다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앉은 남녀는 번갈아 손금을 보는 중이었다
상수리 이파리들이 떨리고 빗방울이 몇 개 떨어져 빈 개집 합판 지붕을 쳤다
비산농원 울타리 푸른 철사 그물에 빗방울이 맺힌다 물린 밥상머리에 앉아 눈물 콧물 비벼 짜는 네 모습 어른거린다
판자때기에 눌러 쓴 먹글씨. 닭. 오리에게 돌을 던지지 마라. 기울어 어린 느티나무 첫 가지에 얹혀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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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 속의 말뚝을 위하여 ㅡ 이윤학
저 머리들은 망치 자국을 가지고 있다 넓은 손바닥을 펴 들고 있다
퉁퉁 불은, 저 말뚝들은 썩어가고 있다
푸르른 이끼들, 무수한 망치 자국을 떠받들고 있다
말뚝들은 무너지는 육체와 정신의 경계에서 견디고 있다
터질 듯한 배때기, 허물어지는 경계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단추들! 옷이 찢어져도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나에게 독기를 불어넣어 주는 고통이여, 나를 비켜가지 말아라
터진 뚝은 다시 터진다, 홍수는 지나간다
—〈시힘〉동인지 25주년 기념호 ----------------- 보리수 ㅡ 이윤학
그대의 무덤 옆에는 아니고, 그대의 무덤 앞 한 층계 아래 보리수를 심은 이유를 묻는다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그대가 나에게 전해준 웃음을 떠올리고 꽃이 피었을 때 한 번, 열매가 익었을 때 한 번 찾아오리라
네 개씩 날개를 달고 뭉쳐 핀 꽃 그대가 웃을 때 쪼그만 치아 같다고, 깨끗한 피 수혈한 열매, 그대가 웃을 때 잇몸 같다고, 속으로 웃음을 전해주리라
그대가 남긴 유일한 연인이 되어 보리수 꽃과 열매가 모두 웃음에 닿도록 하리라
그늘이 될 만한 나뭇가지를 쳐내고 둘레의 억새풀을 뜯어내고 보리수가지 넓이로 쌓아놓은 돌담을 넓혀 가리라
—《문학의 문학》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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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렸다 ㅡ 이윤학
철근막대기로 꾹 찔러 넣은 것처럼 마루 밑구멍들이 끈끈이로 막혔다 오랜 시간 벽을 타고 흘러내린 끈끈이 액이 타일 바닥을 덮었다
쥐구멍 앞에 놔둔 끈끈이가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쥐구멍들을 쑤셔 막고 있었다
제법 덩치가 큰 쥐였으리라 사료 한 알 주워 먹으려다 그만, 끈끈이와 한 몸이 되었으리라
끈끈이를 뒤집어쓰고 데굴데굴 굴렀으리라 구멍 앞까지 굴렀으리라 구멍 속으로 기어들었으리라
털이 뽑히고 가죽이 늘어나 몸이 헐렁해질 때까지 울음소리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끈끈이로 구멍을 틀어막았으리라
자신의 구멍으로 사라진 쥐들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 구멍으로 나오지 않은 쥐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어디론가 맞구멍을 뚫고 나갔을 끔찍한 쥐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메타세쿼이아
너와 나의 창문 밖으로 끝이 없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펼쳐져 있으면
메타세쿼이아 가지에선 봄마다 부드러운 연둣빛 잎이 둥지 속 갓 태어난 새털처럼 돋아나 무수히 날개를 달고 날아갔으면
미래가 없는 곳으로도 날아갔으면 피라미드가 커서 피라미드가 커서 이 세상과는 상관없이 살아갔으면
그날의 민들레꽃
영안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웃음이 멎기만을 기다렸다 화단으로 돌아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민들레, 민들레, 민들레 노란 꽃판을 바라보았다
쩌개진 빨래방망이를 들고 쫓아오는 마누라를 피해 들입다 뛰는 노름꾼을 보았다 그를 따르는 살이 찐 어미 발바리를 보았다 마누라 뒤를 따르는 새끼 발바리를 보았다
밥 먹다 말고 마당가에 나와 손뼉을 치는 새끼들을 보았다
저녁연기, 물오른 밤나무 동산을 감고 있는 걸 보았다 얇은 판자때기 선반을 두르고 있는 걸 보았다
풀숲에 퍼질러 앉아 가랑이 사이에 고개를 숙인 사람 담뱃불을 이어 붙이던 사람
민들레, 민들레, 민들레, 뿌리를 씻어 오지게 씹어 먹는 간암말기환자를 보았다
—시집 『나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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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변 ㅡ 이윤학
검정 모자를 눌러쓴 눈 나쁜 아비와 늦둥이 딸아이가 캥거루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왼손을 내밀어 코스모스를 훑는 딸아이와 홀아비 냄새를 뒤로 피우는 아비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7번 국도변을 역주행으로 지나간다 영재유치원 가방이 핸들에 걸려 지나간다 체인 집 긁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지나간다 신문지에 말아 싼 제수용 북어포가 짐칸 고무 바에 묶여 지나간다 창문을 연 시외버스가 커튼을 쳐 매고 지나간다 아비의 가발과 모자가 날아간다 아비는 자전거를 멈추고 받침대를 세워 올린다 허옇게 드러난 아비의 대머리 놀란 딸아이가 몸을 틀어 허둥대는 아비를 바라본다 속내를 다 드러낸 코스모스가 끊임없이 피어 있는 7번 국도변 가발을 씌워주는 딸아이와 부끄러운 아비가 마냥 웃고 있는 7번 국도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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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손동* ㅡ 이윤학
은행나무 둘레에 버려진 자취 살림도구들 엠디에프옷장과 침대와 두 칸짜리 비닐소파와 냉장고와 비닐봉지에 쑤셔 박힌 이불 더미와 말라비틀어진 화분과 심하게 금이 간 어항 속 인조 물풀들이 은행잎에 덮인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골목으로 진입하자 하수구 뚜껑들이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붉은 끈을 동여맨 잡지 더미에서 <1990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과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을 꺼낸다
예쁘고 착해 보이는 규진이 언니 열심히 살아가세요
생일 축하하고 이성복 씨 같은 내성적인 사랑은 하지 마라
약수터 어귀 미루나무는 저녁 어스름을 꼬챙이로 꿰매 들고 소통 불가능한 말을 흘린다 풍 맞은 남자는 무당의 무음 방울지팡이를 바닥에 꽂고 돌리면서 딴청을 부린다 그는 지금 오래된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자전거로 귀가하는 남자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핸들을 비틀어 잡는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바로 언덕으로 치달으며 이륙하는 제트기 소리를 낸다
눈물이 쏙 빠지는 행복이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을 때 나는 비로소 당신의 만성비염까지 사랑하기에 이를 것이다
축축한 등줄기 결리는 은행잎에 누워 쿠린내와 약수 맛과 외국으로 나가는 여객기 배때기에서 시작된 휘파람을 부를 것이다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시집<짙은 백야> 수록
버려진 식탁 ㅡ 이윤학
언젠가 식탁을 하나 샀다, 꽃병 속에 꽂혀 있던 꽃이 시들어 몇 차례 버려졌다. 그리고 꽃병 속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꽃병은 엎질러지기 시작했다.
처음,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식탁은 저녁을 위해 차려진 적이 있었다. 의자들은 이 방 저 방으로 흩어졌다. 벗어놓은 옷이 뒤집혀, 의자 위에 쌓였다.
한 방에서 일일 연속극이 시작되고 한 방에서 흘러간 노래가 흘러나왔다.
식탁 위엔 신문지와 영수증,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올려졌다. 한때는, 그곳에서 양파를 기른 적도 있었다. 양파 줄기는, 잘라내자마자 다시 자라났다. 점점 가늘어져 창문에 가 닿을 듯했다.
말라 비틀어진 양파 줄기 위에 더 많은 신문이 던져졌고, 영수증과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봉지가 쌓여갔다.
검은 비닐 봉지 속에서 많은 과일들이 썩어나갔다.
어느 날 저녁, 그것들을 들어냈다. 몇 해 전에 야유회에 가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오랫동안 유리 밑에 깔려 있었으나, 놀랍게도 사진 속의 얼굴들은 잔디밭에 앉아 웃고 있었다
— 시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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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의 「저수지」평설 / 이광호
저수지 ㅡ 이윤학
하루 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 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ㅡ.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1995)ㅡ .....................................................
이윤학은 폐허의 시인이다. 이것은 시인이 단지 사물들의 잔해에 매혹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인에게 폐허는 기억의 풍경이고 삶의 형식이다. 기억은 폐허 속에서 생의 시간성을 읽어내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상실감과 부끄러움과 자기혐오는 삶 자체를 폐허의 궤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추억은, 폐허를 건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시인의 문장은, 그의 시가 폐허로서의 추억의 형식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한 시인의 내면의 시간들은 버려진 사물들의 몸을 통해 시의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 '저수지'는 그의 두번째 시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1995)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서 이윤학의 폐허의 미학은 풍요로운 이미지들을 피워내고 있다. '저수지'는 이 시집에서 일종의 서시(序詩)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시인의 시적 비전을 아름답게 압축한다. '그 저수지'는 오리떼와 손바닥만 한 고기들이 있는 곳이지만, 그것들은 '내 눈 속'과 '내 머릿속'에 있다. 그 이미지들은 '나'의 감각 안에서만 존재한다. 더구나 그들은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다. 저수지의 바닥은 저수지라는 사물의 깊은 내면에 속한다. 그 저수지를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비유할 때, 저수지는 거울이지만, 타자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유리이다. 저수지에 거꾸로 박혀 있는 산은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고, 돌은 그 저수지의 바닥 속으로 섞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 시는 단순히 풍경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물들의 고통과 상처가 드러나는 자리가 된다. 저수지는 외부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상처를 보여주는 거울-유리이다. 저수지의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상처는 저수지의 상처이면서, 저수지의 풍경으로부터 내부의 상처를 되비추어보는 '나', 그리고 당신의 상처이다. 상처를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존재들은 그 상처가 자신의 내부로, 자신의 몸으로 뒤섞이는 시간을 겪는다. 내가 받아먹은 상처들은 바닥에 이르러 내 몸의 일부가 될 것이다.ㅡ 이광호 (문학평론가)
산골짜기 옹달샘에서 생겨난 어린 물은 내(川)를 이룬다. 내가 변성기를 거치며 샛강이 되면 목소리엔 비닐 쓰레기도 엉킨다. 몸에 농약 물도 좀 섞이는 청장년을 지나니 이내 말이 없는 중년에 닿는다. 내뱉는 말보다 속으로 삼키는 말이 더 많은 저수지 같은 중년. 애초에 없는 듯, 깨우침인 듯 속까지 텅 빈 거울 같은 저수지는 한없이 평화로우나 자세히 보면 '어두운 산들이' '거꾸로 박혀' 있으며 그 산들은 무심히 던진 돌을 받아먹으며 진저리친다. 우리의 중년은 얼마나 많은, 던져진 돌에 상처받으며 살았는가. 오, 게다가 상처는 아무는 것이 아니라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삶에 섞이게 된다니! 그 수면의 찬란한 반짝임과 오리떼 노니는 평화가 실은 깊은 상처로 이루어진 거짓의 풍경인지도 모른다.ㅡ 장석남 (시인)
짝사랑 ㅡ 이윤학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몸을 토막 내고 꼬리를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토막 난 생선들에게 접시나 쟁반 역할을 하는 도마.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리는 도마.
일을 마친 생선가게 여자는 세제를 풀어 도마 위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칼은 엎어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누옥의 방 한 칸 ㅡ이윤학
화단을 지키는 고양이 밥그릇에다 성견 사료 한 알 한 알 떨어뜨려줬더니 골이 났는지 눈길도 주지 않더라
마름모꼴 방 끝의 티브이를 켰더니 화면 중심으로 불 꺼진 성냥골이 쏜살같이 떨어지더라
모자를 쓰지 않았는데 모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이 찾아올 때가 있더라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어떤 사랑도 실패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더라
정체불명의 내가 전전 주인이 하숙을 치던 식탁의자에 앉아 있더라 들린 벽지에서 흙가룰 떨어지는 소리
불룩한 배를 끌어안고 있더라
치킨집 개업 기념 벽시계 초침 좁아터진 방 한 칸 갉아먹는 데 이십몇 년이 걸린다더라
나무대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목소리 새벽 눈발이 들이치더라
비문을 옮기는 포클레인의 후미
갈림길이 하나로 통합될 때 너는 혼자가 되어도 좋았다 연잎에 흩어진 물방울 연꽃잎이 감싸 안은 허공을 보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잠자리가 물의 표면을 찍었고 나이테가 퍼졌다
마디 많은 풀들이 연못에 풀밭을 펼쳤다
죽은 개가 떠올라 불어 터진 옆구리를 드러내고 희멀건 눈으로 연못의 깊이와 하늘의 높이를 가늠했다
비탈진 공동묘지가 내려와 바닥에 석물을 내려놓고 억새를 심어놓았다
방금 전에 수장시킨 핸드폰 물방울을 피워 올리고 화물열차가 기적을 울렸다
오래된 봉분들이 일그러졌다 새로 생긴 봉분이 연못의 태양을 묻었다 너는 어금니로 풍선껌을 몰아 씹었다 나는 벌레들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