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삼로드 2】
중국인들은 개시에서 해삼 가격을 싸게 후려쳤다.
해삼을 채취한 후 건조·가공해서 내보내는 어민의 고통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해삼 수요가 간절했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 연행무역에서 의주부 수검소의 수출입품 목록을 보면, 수출은 담배·해삼·홍삼, 수입은 모자·수은 등이 주력품이었다.
사신을 통한 무역이나 개시 무역에서만 해삼이 거래된 것이 아니다.
중국의 모든 무역선은 해삼을 필수적인 거래 품목에 올려두었고, 상품성 있는 해삼을 채취하기 위해 조선 해안에 직접 출몰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되는 해산물은 국제적인 무단 어업, 난폭 어업을 유발하는 대상이다.
중국은 일본에서도 해삼을 수입했다.
일본 쪽 환동해의 해삼은 전량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후반기인 1695년께부터 말린 해삼은 막부의 통화정책, 물가정책의 중요 수단이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일본은 금과 은을 수출하고 중국에서 생사·견직물을 구입했다.
그런데 금과 은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구리로 바꾸었지만 이 역시 부족했다.
금·은·동은 수출상품인 동시에 통화였다.
부족한 구리 대신 새롭게 개발된 교환 상품이 ‘다와라모노’라 부르는 표물(俵物)이었다.
해산물을 모두 가나미(俵)에 넣었기에 표물이라 부른 것이다.
표물은 건해삼·상어지느러미·말린 오징어·조각난 전복·말린 새우·우무·말린 가다랑어·쪄서 말린 정어리 등이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이리코, 즉 해삼이다.
에도 막부가 새로운 수출상품으로 해삼 생산을 독려하기 시작했던 1744년, 나가사키에서 수출된 해삼 총량은 31만7000근(약 190t)이었다.
막부의 요청에 가장 잘 부응한 곳은 다섯 군데 해역이었다.
기타큐슈, 세노 내해, 노토를 중심으로 한 동해, 이세시마, 홋카이도. 생산량을 살펴보면 환동해 권역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이리코는 고대부터 조공, 진상물, 신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이리코를 귀인에게 주는 물건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고대 관습은 중세부터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해삼 창자로 담근 젓갈을 필두로 이리코 진상이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한편 중국인들은 환동해뿐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해삼을 수집했다.
원주민에게 해삼 건조기술을 가르치면서 양질의 해삼을 구하고자 했으며,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보리진에게서도 해삼을 구했다.
영국인들이 호주를 최초로 ‘발견’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일 뿐이다.
그에 앞서 중국의 해삼 장사꾼은 호주 원주민으로부터 다량의 해삼을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중국에서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으로 퍼져나간 화교 집단의 주요 거래 품목이 해삼이었다.
중국인의 요구에 따라 형성된 세계 해삼 루트에서 북방의 해삼 집결지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간사이의 오사카, 개항장이자 대외 출구였던 나가사키에 포진되었다. 중국 본토는 베이징, 톈진, 푸저우, 광저우, 홍콩 등이 주요 거점이었으나 중소 도시에도 해삼 집결지가 산재했다.
중국인이 사는 곳마다 해삼은 필수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홍콩 재래시장은 과거에 남방 해삼이 흘러들어 오는 집결지였으며, 현재도 사정은 변하지 않아 남방의 말린 해삼이 흘러들어 오고 있다.
남방 해삼 집결지는 싱가포르, 마닐라 등이었다.
마닐라에는 일찍부터 화교 사회가 존재했고 이들은 묵묵히 해삼을 수집해 광둥으로 보냈다.
싱가포르가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임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싱가포르 국부를 떠받치는 중요 요소에 해삼이 숨어 있음은 덜 알려져 있다.
북방으로부터 남방에 이르기까지 해삼을 먹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식욕이 불러일으킨 ‘해삼 루트’가 곳곳에 만들어지면서 100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
동해안産의 건해삼 최상품은 kg당 1백만 원~3백만 원까지도 갑니다.
별 생각없이 먹었던 해삼이 이렇게 중요한 무역 아이템이었다니 신기하시죠?
(옮김)